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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전도회헌신예배] 골고다 언덕의 동행자들! (눅 23: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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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다 언덕의 동행자들! (눅 23:26~38)

시작하는 말

십자가는 신구약 성경의 초점이요, 인류 역사의 분수령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십자가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이런 성경의 빛 아래 인류 역사는 관찰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멀리 에덴의 실패(창3:1)를 회고하고, 또 멀리 신천신지의 구원(계21:22)을 전망하는 분수령입니다.

같은 골고다로 올라갈지라도 두 행악 자는 의미 없는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받는 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요, 한 동네에서 추방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골고다(해골) 언덕으로 끌려가신 예수님 !

예수님께서 빌라도 재판 석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지셔서 그들에게 희롱을 받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네 사람의 로마 군병들이 정방형으로 섰고, 가운데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셨습니다. 그리고 맨 앞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패인 팻말을 들고 가는 군병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도로와 가로를 지나 가능한한 가장 먼 길로 돌아 십자가형의 형장까지 행진하게 되었습니다. 되도록 길가에서 죄수의 힘을 소진시켜 형장까지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 재판 석에서부터 골고다 언덕까지를 “고난의 길”이라고 합니다. 소위 “비아 돌로롯사”(Via(길) dolorossa(정신적, 육체적 고통)라고 합니다. 지금 비아 돌로롯사에는 14개의 멈춤 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끌려가시면서 잠시 멈추셨던 곳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순례자들은 반드시 이 길을 한 번씩 걸어 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고난을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그곳에 아랍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집 주위에 철조망을 쳐놓고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감 !

예수님이 끌려가실 때에 이내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동안의 일정과 겪으셨던 고뇌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서 일찍 지치셨을 겁니다. 

십자가를 질 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원칙인데 지고 갈 힘이 없으면 주위의 구경꾼들을 잡아서 대신 지고가게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9-11절에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 인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침 구레네 시몬이 시골로서 오고 있었습니다. 구레네는 지중해 남부, 아프리카 북부인 지금의 리비아의 트리폴리(Tripoli)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살던 시몬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왔을 것입니다.

고난의 길(Via dolorossa)에서 예수님이 구레네 시몬을 만난 곳이 다섯 번쨉니다. 손쓸 여가도 없이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던 구레네 시몬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자기가 걸렸다는데 내심 괴로웠을 겁니다. 창피했을 겁니다. 억지로 끌려가서 주님의 십자가를 잠시 짊어지고 갔습니다.

십자가는 억지로, 죽지 못해 지고 가는 것이지, 즐거움으로 지고 가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만인의 구경거리요, 비웃음거리입니다. 희롱거리요, 조롱거리입니다. 비방거리요, 이야깃거립니다.  수치와 치욕스러운 겁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지고 가면 반드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였으며(막15;21), 그의 아들 루포는 로마교회의 저명한 인사가 괴었습니다(롬16:13). 

바울은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16:13)고 말할 정도로 구레네 시몬의 부인은 바울과 친숙하였습니다. 그 모두가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지고간 후의 축복이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 !

성경은 누가복음 눅8:1-3절에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갈릴리 여인들을 소개합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런 갈릴리 여인들과 예루살렘 여인들(눅23:28)은 구별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갈릴리 전도를 많이 소개했습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전도와 활동을  많이 소개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여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잠시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대 제사장의 사주아래 예수님을 대적하던 분위기에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십자가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분명히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여자의 복음인 누가복음에서는 여자는 늘 선하게 묘사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예수님의 고난을 애통해 했습니다.  슬피 울며 십자가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가 이단으로 판결을 받아 사형수로 끌려가는데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간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눌23:28)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좋아하고, 슬퍼하고, 울고불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보다는 내일에 오히려 더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끝맺는 말

떡 얻어먹을 때는 4000-5000명씩 모였습니다. 병 고칠 때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지붕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는 베드로의 모습도, 제자들의 모습도 보질 않았습니다. 가룟유다는 더욱 보이질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은 여인의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에 소개된 여인들은 은혜도 가장 많이 받았고, 봉사도 가장 많이 했고, 십자가의 길도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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