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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어그러진 길의 함정 (유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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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도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대부분의 교회가 10월의 마지막 주일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선언문'을 기점으로 하여 종교 개혁 주일로 지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시작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과 마지막 유언을 따라 땅 끝까지 선교하는 사명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자 로마의 핍박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흩어져 성도들이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게 되되었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을 살면서도 흩어진 그곳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 되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지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방선교의 첫 열매인 '안디옥교회'는 성장과 부흥을 계속하여 마침내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고, 이러한 선교 운동들은 곧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는 기독교가 복음의 열매를 맺고, 교회들이 성장을 하여 힘을 얻게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의 대표인 로마 교황이 국가의 대표인 국왕보다 더 높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핍박은 사라지고, 편안하게 되자 교회는 진리의 순수성과 영적인 힘을 잃기 시작했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어 점점 타락하고 부패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교회는 진리를 떠나게 되어 세속적으로 흘러갔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교황청의 타락과 면죄부 판매사건 이었고, 교황청의 타락은 교황 개인에 그치지 않고 교황, 수도원, 수도사에 이르기까지 부패의 골이 깊어졌으며, 성베드로 성당의 공사비용으로 비족한 비용을 위해 1506년부터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 사건입니다. 즉, 중세 후반기에 십자군 종군자나 자선행위자에게 교황이 발급해주던 것으로, 국가와 교회에 봉사한 이에 한해 비교적 가벼운 죄에 대한 일종의 사면권을 부여해 주는 것이었는데 1476년 교황 식스투세 4세가 연옥의 영혼들에까지 교황의 권한을 확대하자 오해의 여지는 더 커졋고, 이를 확대한 것입니다. 결국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교황이 이를 대신할 수 있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돈을 내면 "면죄부"를 주었는데 이 것을 사게 되면 '지은 죄가 사함을 받는다. 심지어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올 수 있다.'는 주장까지 텃첼이라는 신부가 성당헌금을 위해 선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거짓말을 퍼뜨리게 되었고, 교황청은 오직 성당을 짓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중세 교회는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그 잘못을 지적하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의 만인성자 교회의 문에 ‘95개조 선언문’을 내걸므로 종교개혁이 시작 됩니다. '오직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자.', '오직 믿음으로 살자.'는 운동을 벌인 것이 종교 개혁 운동이었습니다. 기독교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이 바로 "항의자"라는 뜻입니다. 개신교가 기존의 로마 천주교의 거짓 진리에 개혁을 일으킨 믿음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진리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뒤를 이어 바르게 진리를 따르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큼직한 종교 개혁을 살펴보면 사무엘의 미스바 회개 운동(삼상 7:5),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왕하 23장), 에스라의 종교 개혁(스 9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종교 개혁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해 힘써 싸우라."는 유다의 권고의 말씀입니다. 이 유다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주님 생전에는 믿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 후에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메시야 되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혈통으로는 자신의 형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된 메시야와 구세주로 믿게 되었고, 오순절 사건 후 믿음이 변화되어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위해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습니다.

"어그러진 길로 가지 말라."는 이 유다의 권고의 말씀은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몰래 숨어서 어그러진 길로 미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딤전 4:1절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훗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몰래 숨어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미혹을 따를 자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15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고 말씀합니다.  "어그러진 길로 가지 말라." 그 길은 함정이 있으며, 그 함정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그 길은 바로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성도들은 본받아야 할 자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였기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믿음의 길, 좁은 길은 걸을 걸어가되 세상을 사랑하지 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길에서 뒤 돌아 보지 말고, 저 높은 천성을 바라보며, 영생을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본문 3절에 "힘써 싸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고니제스다이"는 본래 '레슬링 경기에 선수들이 쏟는 노력'을 의미하였습니다. 유다는 "에파고니제스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수신자들 모두가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변질시키고 있는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운동선수가 경기에 애를 쓰듯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어그러진 길로 가지 말라."고 한 것은 그 길은 바로 가만히 들어온 자들의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 길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만히 들어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레이세뒤에산"은 ‘비밀리에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울과 베드로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이단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갈 2:4; 벧후 2:1). 이러한 자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이요. 진리인 복음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인에게 거짓 교훈을 전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 거짓 교사들로서 외적으로는 교회의 일원이었으나 내적으로는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와 율법의 정죄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호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 즉 성적인 탐닉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모든 도덕적인 제한조차도 무시할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여(벧후 2:19) 성적인 방종을 행하였습니다(Blun, Bauckham).

그래서 "어그러진 길로 가지 말라."는 유다가 들려주는 권고의 말씀을 통하여 어그러진 길에는 어떤 함정들이 있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가인의 어그러진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이 사람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라고 하였는데 "화 있을진저"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할 때 자주 사용하신 표현으로(마 23:13, 15~16, 23, 25, 27, 29) 거짓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음을 교훈합니다.

유다는 거짓 교사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죄를 구약 성경에 나타난 세 인물의 죄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인의 어그러진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그것은 가인이 걸어간 길이요, 가인이 살아간 길이요, 가인이 흔적을 남긴 길은 어떤 길이었습니까?

1) 가인은 형제를 죽인 최초의 살인자였습니다.

가인의 죄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지 않자 받으신 제사를 드렸던 동생 아벨을 살인하는 무서운 인류최초의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창 4:1-15 ; 히 11:4, Blum, Green).

가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구원을 부인하는 자라고 하였으며(Cranfield, Bauckam, Green). 필로(Philo), 창세기 4:7절에 대한 해석을 '탈굼(Targum)'은 가인이 "심판도 없고 심판자도 없으며, 다른 세상, 즉 내세도 없으며 의인에 대한 선한 보상의 선물도 없고 악인에 대한 징계도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가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은 아담의 첫 아들이었습니다.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최초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기쁨과 감사가 어떠했겠는가? 가인의 뜻은 "얻었다"는 뜻입니다. 창4:1절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근 '불임 클리닉'을 위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신설하여 돕고 있는데 불가능한 불임부부가 '인공 수정' 방법 등으로 자식을 얻게 되면 기쁨이요, 감사요, 찬양이 나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담의 가정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과 감사와 찬양이 슬픔과 애통과 절망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아들이 살인자가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동생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담 부부가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이었겠습니까? 바로 인간 세계의 현재의 기쁨은 진정한 기쁨도, 영원한 참 만족도 아님을 보여 준 사례입니다. 본문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안한 부모였던 아담 부부가 가졌을 애통과 실망, 그 슬픔의 눈물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어쩌면 이 사건으로 인해 아담 부부는 어쩌면 창조주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를 하였을지 모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한 그 기쁨을 자신들의 범죄로 깨트려 버린 지난날의 잘못을 자신들의 자녀들이 "심은 것을 거두게 한 사건"을 통해 진정으로 깨닫고, 뉘우쳐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죽음, 가인의 범죄, 자신들의 애통을 미루어 짐작하는 아픔이 아니라 자신이 당해보고 아는 아픔이었습니다. 가인의 범죄 그것은 가인 자신만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그 부모들에게도 똑같은 아픔을 주는 고통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이 죄악이 하나님 아버지께 그만큼의 아픔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는 대목입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범죄를 그렇게 아파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기억할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

2) 또한 하나님께 온전하지 못한 제물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4:3-5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 이 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 여호와께 드린 제물이 아벨의 것은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가인의 것은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인의 제물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기뻐하신다.'고 인정하는 표시인 응답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차별하셨을까?"에 대한 주석 즉, 성경의 해석을 마음대로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 있는 제사와 피 없는 제사'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5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 '소제'라는 제사는 식물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기에 가인의 농산물도 제물로 드릴 수 있었고, 아벨의 양 새끼도 드릴 수 있는 제물이었기에 편파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히브리서 11:4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관하여 평가해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 11장은 "믿음 장"으로 불려 집니다. 제물의 종류에 대하여 제사가 인정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히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아벨의 믿음 생활이 가인보다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물과 믿음 없이 드리는 가인의 제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제물과 헌신과 충성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계십니까?

이사야 1:11-12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 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 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탄식하시고 계십니다.

'피 있는 제물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아닙니다. 바쳐지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바치는 사람의 믿음과 헌신의 자세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제물은 무수한 제물이라도 무익하고 수송아지, 어린 양, 수 염소의 피일지라도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하셨다. 오히려 거룩한 성전을 더럽힐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려는 헌신의 예배"가 되고 있는가를 점검해 봅시다. 하나의 형식적이고, 의무적이며, 의식적으로 시간만 때우는 식의 예배는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를 잘 점검하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제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물을 드리는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의 믿음과 자세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려 하나님께로 부터 인정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아벨과 루터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지 아니하면 어그러진 함정에 빠진다.'는 교훈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바쳐진 제물은 바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무슨 말입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즉, 나의 죄를 지고 어린양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보다 더욱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중한 예배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이 예배에 얼마나 준비된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헌신의 마음과 결단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이 예배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면 가인을 통해 어그러진 길의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가인의 길은 예배생활의 소홀함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 있습니다.

본문에 "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발람이 걸어간 길은 '삯을 위하여 가는 길이요, 많은 사람이 몰려가는 넓은 길이요, 어그러진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발람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에서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 진 쳤을 때, '모압 왕 발락의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청을 받고.' 이를 금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보내온 예물에 마음이 미혹되어 저주하기 위해 갔습니다.

발람은 자신에게 약속된 커다란 보상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서 발락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 숭배와 음행에 빠지도록 한 배교의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민 31:16-19, Philo). 거짓 교사들은 발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부도덕한, 범죄를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도덕 폐기론'을 가르쳐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에 빠지고 타락하려 배교하도록 하였습니다.

민수기 22: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 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였으나 황금에 눈이 어두워 불순종한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처음 사람을 보내었을 때 그 밤에 발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과 함께 가지 말라고 하시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셨고, 그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발람'은 '발락 왕'이 보낸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 발락도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높은 귀족, 더 많은 예물, 크게 존귀케 하고, 무슨 요구든지 시행하리라."고 하며 발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결국 발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지만 '더, 더, 더'하는 유혹에 끌리게 되고, 결단력이 부족하여 마침내 "너희도 이 밤에 여기 유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민22:19)가 되고 만 것입니다.

발람은 물질 때문에 어두워진 눈은 여호와께서 심판하기 위해 보낸 사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나귀도 볼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자신을 건져 주기 위한 여호와의 사자의 손에 쥐어진 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제물에 어두워진 발람의 눈은 영안이 닫혀 볼 수 없었습니다.

주인의 생명을 지키려 이리 저리 피하며 몸부림치는 나귀에게 오히려 발람은 나귀를 욕하며, 지팡이 채찍질을 하고 있습니다. 끝내는 하나님의 역사로 '나귀의 입을 통하여 책망을 듣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짐승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마씀에 불순종하면 발람의 어그러진 함정에 빠지고 맙니다.

따라합시다. "불순종하면 당나귀 짐승보다 못하다." 이 교훈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삯을 위하여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발람만이 가는 길이 아니요,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삯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간다고 해서 그 길이 옳은 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찾는 이가 적다고 해서 그 길이 잘못된 길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 길이 어디로 가는 길인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믿음으로 루터처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몰려갈지라도 그 길이 삯을 위한 길이 되면 결국 바로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 되고 맙니다. 비록 적은 사람들이 찾을지라도 그 길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면 바로 복된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바른 길이 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따르는 길이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걷고 있는 신앙의 길이 삯을 위하고, 돈을 위하고, 물질을 위하는 길이 된다면 바로 발람의 어그러진 길입니다. '복 받는 것이 목적이 되기 위하여 예수를 믿고, 병 고치기 위한 것만 목적이 되어 예수를 믿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고'가 되면 바로 그것이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 됩니다. 찬송가 "내 가는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의 가사가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루터의 그 험난한 선택을 통해 사제로 파면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이 있었으나 진리로 승리한 것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그 길 끝에는 새 하늘 새 땅이 있습니다. 내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값없이 주시는 생명수 샘물을 얻게 됩니다(계21:1-7).

3. 고라의 어그러진 길로 갔습니다.

본문 11절에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고 했습니다. "이 고라의 어그러진 길은" 패역을 좇아가는 길이요, 멸망으로 달려가는 길입니다.

고라는 레위 자손으로 고핫의 손자로 고핫 족속에 속한 사람입니다. 고핫 족속은 성소의 모든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당시 성물을 손으로 만질 수 없었다(민4:15). 그래서 광야 40년의 길을 어깨로 메고 다니면서 충성하던 성직자, 직분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라가 주의 종 모세를 대항하여, 월권을 하고, 권위를 높이려고 모세를 모함하고, 대적하여 항상 시비를 걸고, 뒤에서 수근 거리고, 원망, 불평하는 자리에 앞장서고, 죄를 짓는 사람들과 합세하여 반역을 일으킨 것입니다. '다단, 아비람, 온'과 함께 네 사람이 주동이 되어 250명의 족장들과 함께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 반대편에 섰습니다.

'고라'는 '다단'과 '아비람'과 더불어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여 반역한 사람>이었습니다(민 16:1-35 ; 26:9 ; 시 106:16-18). 유다는 고라의 반역을 언급하여 거짓 교사들의 죄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고라가 모세의 권위에 반역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Bigg, Windisch). 고라의 반역이 단순히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인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 교사들도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권위를 부인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Bauckham).

그들은 민수기 16:3절에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하였습니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한데..." 무슨 말입니까? '어찌하여 너희만 거룩하게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라고 소리치며 주의 종 모세에게 대적한 것입니다. 심지어 주의 종 하는 꼴을 보니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라고 불평 물만을 하며 작당을 하여 모세를 대항하여 반역을 하였습니다.

성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고핫 족속'들이 부여받은 성전의 기구들을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일도 성직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핫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성직이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 첫 번째는 수레에 싣고 옮기다가 '웃사'가 죽음을 당하고 실패합니다(삼하6:3). 민3:30-31, 4:15절을 보면 법궤의 운반은 '고핫' 족속이 어깨에 매고 옮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웃사'가 죽은 이유에 대하여 대상 15:13절에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 하였음이니라."고 분명히 원인을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규례대로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즉, 다윗은 법궤 운반에 실패한 이유를 깨달았고, 마침내 제사장과 레위인을 모아 규례대로(출25:14-15, 민3:30-31, 4:15, 7:9) '고핫' 자손을 중심으로 어깨에 매고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겼습니다.

민수기 16:8-10절에 "모세가 또 고라에게 이르되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으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핫 족속이 받은 성직은 이스라엘 회중에서 구별하여 특별히 주신 성직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사 섬기게 하신 성직입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구별된 자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더구나 남들이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 권찰, 교사, 성가대원, 기관 임원, 성도의 직분은 존귀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사명은 결단코 작은 일등이 아니며, 따라서 소홀하게 여긴다면 우리도 고라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라며, 동시에 주의 종에 대해서 대적하여 반대편에 서거나 원망하고, 불평하며, 목회활동에 간섭하는 월권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라는 자신의 성직에 대해 불평하고 작게 여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탐내었습니다. 심지어 "너희만 거룩하냐?"고 불편하였습니다. '우리도 거룩하지 않느냐?'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 변명을 하고, 이유를 붙여 모세에게 항변을 하였고, 이스라엘 족장들을 선동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지 않느냐?" 정말 그럴듯한 논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불만을 만들어 내고, 주의 종과 대적하고자 외치며 250명의 족장들을 등에 엎고 모세와 아론을 거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의 종 모세와 아론을 거역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의 종 모세를 지도자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땅이 입을 열어 고라의 일당을 삼켜 버렸습니다. 향로에 분향하던 250명도 여호와에게서 불이 나와 소멸하여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주의 종의 신앙지도에 거역하고, 목회 활동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만들어 내거나, 주의 종과 교회에 대해 작당하여 반대편에 서서 여당과 같은 생각으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월권을 하려했던 고라의 패역한 길은 바로 멸망과 어그러진 길을 겉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성직에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제사장직까지 탐을 내고 당을 지어 난동을 부렸던 고라의 패역함은 용서받을 수 없었던 멸망의 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종교 개혁의 기치를 앞장세운 10월 28일이 지났습니다만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개혁해야 할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 스스로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가인의 어그러진 길을 걷고 있는 신앙생활은 아닌지 살펴봅시다. '이 시간 내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루터는 오직 믿음과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살았습니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걷고 있는 신앙생활은 아닌지'도 살펴봅시다. '이 시간 내가 주를 찾은 발길이 삯을 위해 걸어온 발람의 길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직 '복 받기 위해, 돈을 위해, 병 고치기 위해, 소원성취를 위한 목적만을 위해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으로 걸어온 발람의 어그러진 길은 아닌지'를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나를 위해 유익한 것도 바울처럼 배설물처럼 버리고, 루터처럼 사제의 특권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는 길을 영광으로 여기고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고라의 어그러진 길로 걷고 있는 신앙생활은 아닌지'도 살펴봅시다. '이 시간 내 가슴 속에는 주님 주신 직문과 은혜에 진정 감사하고 있는지 감사의 절기에 내 가슴속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충만한지 살펴봅시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자들에게 내 마음을 빼앗기고, 귀를 기울이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아무리 생각하고 따져 봐도 내가 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왜? 교회 안에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불평과 불만 속에 빠져 있지나 않는지'를 점검해 봅시다. 내가 생각할 때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요. 교회 안에 내가 생각할 때 적은 직문이라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모든 직분은 참으로 존귀한 것입니다. 모든 직분과 직책을 귀한 성직임을 알고 사명감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자원하여 앞장서서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12절에 어그러진 함정에 빠진 사람들과 그들의 결국에 대하여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는 거짓 교사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짓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상징합니다(벧후 2:4). 한편 "유리하는 별들"은 유성이나 혹성, 혹은 별똥을 의미하는 것으로 거짓 교사를 가리키는 은유법입니다.

유리하는 별들이 항해하는 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바와 같이 거짓 교사들도 믿음과 영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교훈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별들과 같이 빛날 것이나(단 12:3) 거짓 교사들은 유리하는 별들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세 파묻혀 심판을 당하여 사라질 것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그러진 함정에 빠지지 않는 적극적인 신앙생활의 방법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큰 것으로 맡겨 주실 우리 주님이십니다(마25:21). 비록 남들과 비교하여 작은 일로 보여도 그 작은 일에 충성합시다. 각자의 재능을 따라 나누어주신 주님(마25:15) 그 주님은 실수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실수하셨다"가 되면 바로 발람의 어두운 눈이 되고 맙니다. 바로 고라의 어그러진 길이 되고 맙니다. 결코 작지 않은 일에 감사할 줄 모르는 고라의 패역한 길이 되고 맙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어그러진 길로 가지 말라. 거기에는 사탄의 함정이 있다."는 교훈을 잊지 맙시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리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고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가만히 들어온 자의 거짓된 가르침과 미혹에 빠지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이 사람 가인이여, 이 사람 발림이여, 이 사람 고라여!' 이들처럼『어그러진 길로 가다가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와 반대의 삶을 산 '마르틴 루터'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오직 말씀에 순종하여 삽시다.

루터의 신학사상은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인데 루터는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인화된 자를 법률용어로 설명하면, 피고인 인간이 유죄인데도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대로 둔 채 아예 고소 자체를 취하하기로 결정한 것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란?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이 아닌,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만이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전에는 믿음을 지적으로 인정하는 믿음(assent)으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전 존재를 걸고 내맡기는 신뢰(trust)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직 말씀으로만(sola scripture)'이란 사상은 오직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성령의 역사는 말씀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따라합시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으로! 오직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e)만 삽시다."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이 아니라 역사에 별과 같이 빛나는 루터와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결단과 구별된 삶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삶이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간 이런 거룩한 결단과 루터의 신앙을 본받기로 다짐을 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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