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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욥의 감사 (욥 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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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주일을 기점으로 이제 한해가 끝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또 한해가 끝나갑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뒤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그래서 이럴 때 한번쯤 앞서간 사람들의 ‘참회록’을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제시대에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윤동주의 참회록이 있습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역사적으로 가장 뛰어난 참회록은 성 어거스틴의 것입니다.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는 그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부르며 약한 모습, 좌절감과 실패, 진리 추구를 위한 방황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 보다 수 천년 전에 이미 성경의 인물가운데 참회록을 썼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본문에 나오는 ‘욥’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욥기를 참회록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솔한 고백을 담은 참회의 기록이 바로 욥기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기를 통해 자신을 보고, 이 시기에 적절하게 읽어볼 성경입니다.

  욥이 보여준 고백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감사의 고백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감사의 고백입니다. 욥은 감사의 사람입니다. 욥의 신앙은 감사의 신앙이었습니다.

  과연 욥이 감사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욥의 감사는 환경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가 처한 어떤 상황이든지 그 현실로 인해 감사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이런 감사를 해야 합니다. 다윗을 통해서는 하나님으로 인해, 바울을 통해서는 사람으로 인해, 그리고 욥을 통해서는 환경으로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욥의 감사의 조건이 되었던 환경에 대하여 몇 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우리의 환경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요?

  첫째, 환경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당시 욥은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그의 환경이 변했는가를 1장에서 잘 보여줍니다.

  우선, 그는 재물을 잃었습니다. 1장에 욥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양이 칠천, 약대가 삼천, 소가 오백겨리, 암나귀가 오백...” 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된 욥의 소유는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재벌중의 재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 즉 가장 부자라고 소개합니다. 물론 이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복권에 당첨되어 얻은 것도 아닙니다. 그가 평생 땀흘려 모은 재산입니다. 물론 열심만 가지고 모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감사하며 재물을 잘 관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진 것입니다. 그의 허탈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에 사업이 어렵고, 직장을 읽은 사람들의 어깨가 늘어지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이럴 때 믿지 않는 자의 경우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생을 포기할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의 삶에 커다란 환경의 변화가 왔습니다.

  또한, 그는 자녀도 잃었습니다. 욥은 물질만이 아니라 자녀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아들 일곱, 딸 셋, 십 남매입니다. 물론 자녀가 많은 것만이 결코 축복은 아닐 것입니다. 말썽만 피우는 자녀라면 차라리 한둘이라도 적은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욥의 자녀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욥은 무엇보다도 가정의 화목을 강조했습니다. 재물이 많고, 형제도 많기에 형제끼리 싸울 수 있는 요소가 충분했습니다. 오늘날 재벌의 가족이 돈 때문에 얼마나 심하게 싸웁니까! 욥의 자녀도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달랐습니다. 1장 4절을 보면,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떨어져 있는 누이들도 불러 함께 즐거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졸지에 죽을 때도 사실 장남의 집에서 잔치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만큼 화목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욥은 자녀를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잔치가 끝나면 자녀들이 세상을 즐기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죄를 범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그들을 성결케 했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바른 신앙 속에 자녀들은 서로 존중하면서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다 죽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보람이며 꿈이었는데 그것마저 잃었습니다.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욥은 몹쓸 병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2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당시 욥의 병은 일종의 ‘피부병’입니다.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악창이 났고 몸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잠시도 앉아 있지도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손으로 긁다가 나중에는 기와 장으로 긁습니다. 곳곳에 피가 터졌고 열이 오릅니다.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 몸에 더러운 벌레가 득실거립니다. 살에 고름이 배어 나왔고 점점 검은 색으로 변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기야 뼈까지 쑤시는 고통에 처합니다. 차마 볼 수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도 탄식했고 친구도 일주일동안 울기만 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참담했습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욥의 아내는 그를 향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친구들은 욥을 가만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반문하면서 변론을 시작합니다.

  피와 땀으로 평생 모은 재물이 없어지고, 사랑스런 자녀들이 졸지에 죽고, 자기 몸은 갈기갈기 찢겨져 만신창이가 된 욥, 이보다 더 극한 상황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환경은 바뀝니다.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하고, 나쁘다가 좋아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연속입니다.

  둘째, 환경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욥의 이런 어려운 환경이 잘못때문이 아니라 그를 시험하기 위한 것임을 명백하게 선언하면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1장 6절부터 12절까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욥의 고난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관여하신 것입니다. 사탄이 아무리 흔들어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서도 믿음 위에 서서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욥을 인정하여 사탄에게 시험할 것을 허용하십니다. 그래서 욥의 환경에 커다란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아니 그 이전에도 나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커다란 주권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가 삽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나님,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 세우기도 하시고 허물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내가 있고, 가정이 있고, 교회가, 민족과 나라가,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의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내가 택한 사람 욥을 아느냐, 참으로 내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이야” 이처럼 하나님은 욥을 귀하게 보셨고 끝까지 함께 하셨으며, 능력으로 붙잡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탄에게 우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종 아무개를 유의하여 보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말 귀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죄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를 잘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사람은 나의 고통의 때에 때론 무관심해도 하나님은 한번도 사랑하는 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계십니다. 우리가 울면 성령도 함께 우십니다. 우리가 탄식하면 성령은 더 통곡하십니다. 고난은 참기 힘든 아픔이지만 누군가 나를 알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힘이 됩니다. 우리의 아픔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면서 어려움을 잘 극복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환경과 현실을 믿음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은 달라질 수 있고, 환경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에 우리의 믿음은 우선적으로 나에게 당면한 현실을 받아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쓰리면 쓰린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모든 현실을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현실을 받아드리는 것에서부터 풀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은 내 곁에서 나를 불행하게 몰아가려고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결코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이 때론 어려울 때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끄시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앞선 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인생의 고난과 환경의 변화를 통해 얻은 진리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십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고 섭리하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강한 오른 손이 우리를 꽉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욥을 다시 보면, 욥의 이야기는 고난으로 시작했지만 회복으로 끝납니다. 욥이 어려워진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그 현실을 받아드리자 그에게 생명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시면서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욥의 희망이었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다 잃은 것 같아도 생명은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환경이나 상황보다 중요한 것이 생명입니다. 영적 생명은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바꾸면 천하를 잃어도 생명만 있으면 그것이 가장 큰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선포입니다. 그래서 욥의 이야기는 고난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고난을 시작으로 욥기가 펼쳐집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인 생명을 갖고 고난을 극복해 가는 욥에게서 돋보이는 믿음은 그가 자기 내면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초점은 욥의 내면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참회록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 참회의 내용이 욥기의 중심적인 흐름에 있습니다.
욥은 육신의 고통으로 점점 흐려져 가면서도 환히 밝아오는 영적인 세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또 다른 세계를 봅니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가 죄인이고 교만한 사람인 것을 깨닫습니다. 욥은 감사하면서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객관적으로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 속에서 자신을 깊이 드려다 봅니다. 죄와 허물로 완전히 죽은 자신을 봅니다. 한번도 생각지 않던 자신의 밑바닥을 봅니다. 그는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는 엎드려 통회합니다. 처음에는 환경의 변화와 육체의 아픔으로 통곡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죄를 보면서 통곡합니다. 물론 차원이 다른 눈물이요, 통곡입니다. 욥기에서 성경이 보여 주려는 중요한 의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내면을 보며 감격과 기쁨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결말은 갑절의 축복입니다. 욥은 물질도 갑절로, 자녀도, 건강도, 심지어는 생명의 연수도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욥은 그가 당면한 현실과 상황과 환경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2006년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우리에게도 가장 큰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환경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소중하게 보시고, 나를 주관하십니다. 때론 우리의 어려운 환경이 앞으로 임할 반전의 시작, 갑절의 축복을 얻는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을 견고하게 세우시고,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전진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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