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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정탐꾼과 라합 (수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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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여호수아 2:1-24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탐지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가로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 하였으나 (6) 실상은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길로 나루턱까지 따라갔고 그 따르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12,13)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14)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15)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17)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21)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따르는 자가 돌아가도록 사흘을 거기 유하매 따르는 자가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만나지 못하니라 (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오늘 읽은 2장 말씀은 사건 전개상 구지 없어도 되는 장입니다. 1장에서 바로 3장으로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오히려 그러할 때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꼭 전달하고 싶은 말씀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2장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2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나안 정복이라는 거대 사건에 묻혀 작고 소박한 한 인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리고는 심판받아야 할 곳이기 때문에 모두 죽어야 하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있는 한 사람 라합을 기억하셨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때 의인 롯을 기억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은 정복과 전쟁이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 속에 살고 있는 작고 연약한 한 인간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라합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은 여리고에 있는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야만적인 전쟁이 그 위력을 잃습니다. 전쟁이란 것은 얼마나 무자비합니까! 그런데 정치가들은 전쟁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말합니다. 자신의 정책 결정 하나가 또는 자신의 무심코 한 실수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그 정책에 피가 흐르고 사랑이 담기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라합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여리고성 전투를 잠깐 멈추고 계십니다.

여호수아의 신앙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여리고성에 비밀리에 보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1) 자 여러분은 여호수아의 이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은 분명히 1장 3절에서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1장 6절과 11절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수아는 못 믿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지금 정탐꾼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도 정탐꾼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가데스바네아에서였습니다. 그때는 각 지파별로 대표들을 공식적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곳에서 가서 “너희는 저기 네겝 지방에도 올라가 보고, 산간지방에도 올라가 보아라. 그 땅이 어떠한지 탐지하여라. 그 땅에 사는 백성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를 살펴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사는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사는 마을들은 장막촌인지 요새화된 성읍인지, 토지는 어떠한지, 기름진지 메마른지, 거기에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아라. 담대하게 행동하여라. 그리고 그 땅의 과일을 가져오너라.”(민13:17-20)고 아주 자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는데 다른 백성들 몰래 비밀리에 보냅니다. 그것도 단 둘만 보냅니다. 정탐 내용도 단지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는 단순한 명령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인지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여러 정황으로 살펴보건대 저는 여호수아가 성안에 군사의 수나 배치 상태 등을 알아보는 그야말로 정보 수집을 위해서 정탐꾼을 보낸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이스라엘 백성의 손에 붙이셨다는 싸인(sign)을 얻고 싶었습니다.

이는 사사기에 나타난 기드온과 300용사의 경우가 증명해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너무 많아 자기 힘으로 미디안 군대를 이겼다고 교만할까봐 그 군대수를 추리고 추려 300명으로 축소시킵니다. 300명의 군사로 수만 명의 미디안 군대를 이기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부하 한 명을 데리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동태를 살필 것을 명령합니다. 기드온이 적진에 들어갔을 때 미디안 군사 중 하나로부터 이런 꿈 이야기를 엿듣게 됩니다.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러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삿7:13-14) 이 말을 듣고 승리를 확신한 기드온은 담대히 싸워 승리를 쟁취합니다.

마찬가지로 두 정탐꾼이 정탐했던 내용 보고가 2장 마지막 24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여호수아는 이 말을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싸인으로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가 적진을 정탐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싸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싸인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엔 우리는 인생은 너무 약합니다. 기도할 때는 이 길이 옳다는 확신이 들다가도, 기도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 확신이 사라집니다. 아침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다가도 저녁 무렵이 되면 지쳐서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계신 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싸인이 필요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상에서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구름이 몰려오는지 사환을 통해 확인을 시킵니다. 그러다 일곱 번째 보냈을 때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왕상18:44)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엘리야가 확신을 가지게 되며 기도를 멈춥니다.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서 큰 비가 내립니다.

우리에게는 조막만한 싸인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낙담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히 의지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길에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싸인을 주십니다. 그것은 사람의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건을 통해 역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작은 싸인이 큰 비구름을 몰고 옵니다. 라합과 두 정탐꾼의 입을 통해 들린 여호와께서 여리고를 붙이셨다는 눈덩이 같은 작은 말 한마디가 진짜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눈사태를 일으킵니다.

어리석은 스파이들

믿음의 싸인을 얻기 위해 여호수아는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합니다. 정탐꾼 정도 되면 믿음도 좋고 여러 가지 싸움 기술과 지혜로 무장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2장에 등장하는 정탐꾼은 정말 스파이가 맞나 할 정도로 어수룩하고 코믹하기조차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정말 유쾌했습니다. 말씀을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마치 한편의 코미디 스파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러분 스파이 코믹 영화의 스토리를 대강 알지 않습니까? 주인공이 첩보 임무를 수행하는데 정말 엉터리죠. 계속 실수만 하고 웃음만 자아내는데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고 유능한 스파이로 인정받고 끝나지요. 오늘 말씀에 나온 두 정탐꾼이 꼭 그대로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얼치기 스파이인지 보세요. 1절입니다. 정탐하러 간 사람들이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어디입니까? 다름 아닌 기생집입니다. 기생집이 정보가 많이 모일 거라는 판단에서였을까요? 그들이 이후에 보이는 행태를 보면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은 안했을 것 같습니다. 6장 23절에 보면 그들을 “정탐한 두 소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자신도 본분도 망각한 채 여리고 라는 화려한 도시문명에 취해 이들이 찾은 곳은 창녀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이들의 어수룩함은 2절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혹이 여리고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몇 사람이 땅을 탐지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그들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그날 밤 즉시 그들의 스파이 행위가 드러나 여리고 왕에게까지 보고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요란스럽게 스파이 행위를 했는지 바로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3절 이하의 주인공은 기생 라합입니다. 두 정탐꾼은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라합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지붕의 벌여놓은 삼대 밑에 숨으라고 하니까 그곳에 쥐죽은 듯 숨어 있습니다. 라합이 행여 자기들을 밀고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누설치 말라”는 엄포가 14, 20절에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라합이 하라는 대로 다하고 결국 라합과 그 가족을 살려주기로 약속까지 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여리고에 사는 모든 족속을 멸하는 심판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라합의 가족을 살리는 것은 일개 스파이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자기 권리 한계를 넘는 약속을 하고 만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창문에 밧줄을 내려 두 정탐꾼을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 것도 라합입니다. 라합은 그들을 무사히 성밖으로 내보냈을 뿐만 아니라 16절에 보면 바로 강가로 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고 산 쪽으로 가서 삼 일을 유하다 돌아가라는 치밀한 작전도 지시해줍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의 계획과 지시대로 착착 움직일 뿐입니다. 이들이 큰 소리 치는 곳이 한 군데 있는데 17-20절의 장황한 말입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네 가족들은 그 안에 숨어 있어라. 밖으로 나가거나 이 비밀을 누설하면 모든 것은 무효다’라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성 밑입니다. 이곳에서는 이렇게 시끄럽게 많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라합을 보십시오. 21절입니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간단하지 않습니까?

두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의기양양하게 보고한 내용도 한 번 보십시오. 라합이 한 말을 그대로 재인용하고 있습니다. 9~11절이 라합이 보고한 내용입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두 정탐꾼은 이 내용을 마치 자신들이 취합한 정보인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보고합니다. 24절입니다.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여러분도 재미있지 않나요? 저는 지금도 이 얼치기 두 정탐꾼들 때문에 즐겁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딱딱한 것만은 아니예요. 저는 지난 주에 답답한 일이 많았는데 이 말씀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웃기시는 분이세요. 이삭의 이름이 웃음입니다. 아브라함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까 마구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농담도 잘하셔’하는 태도였는데, 정말 90세에 아들을 낳으니까 너무 좋아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은 것이 이삭 곧 웃음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에 많이 웃는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이렇게 웃게 하시는 은혜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얼치기 정탐꾼들이지만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여인 라합과 그 가정을 구원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가장 결정적인 싸인인 “하나님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습니다”는 보고를 합니다. 사실 이 보고 얻으러 여리고 정탐을 보냈던 것입니다. 정탐꾼들은 어리석었지만 그들의 미션은 훌륭하게 수행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실수와 어리석음의 연속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이 어리석음을 바꾸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만드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의 실수와 어리석음에 대해서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하나님보시기에 잘 살아야 하겠지만 어디 인생이 그럴 수만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마치 유능한 화가 같아요. 우리가 실수로 망친 그림 위에 다시 멋지게 색칠해서 작품을 만들어 가십니다. 요즘은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옛날엔 길거리의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하얀 도화지 위에 아무 그림이나 글자를 그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글자나 그림을 그리면 이 화가가 그런 그림들을 이용하여 용을 만들어 내고 호랑이를 만들어 냅니다.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가 막힌 솜씨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대한 화가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실수해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라합의 신앙

오늘 말씀에서 가장 돋보이는 사람은 바로 라합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서는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고 라합의 믿음을 평가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결단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밀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라합은 여리고성에서 잠깐의 영웅이 되고 잠깐의 안전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불과 열흘 남짓 밖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합은 상천하지의 하나님, 곧 온 땅과 온 하늘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이런 결단의 결과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족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라합은 다윗의 조상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족보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이렇게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1:5-6)

여러분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분명한 결단을 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기로 작정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마치 창녀와 같이 천한 인생에서 존귀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 가문을 이름 없는 무명의 가문에서 라합이 다윗의 가문을 형성하듯 위대한 가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세상을 따르는 것은 잠깐의 영화를 누릴 수는 있으나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기울어져 가는 난파선을 타고 있다가는 조만간에 죽고 맙니다. 튼튼하고 안전한 배로 올라타야 하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느 배에 여러분의 몸을 싣고 있습니까?

라합은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들의 목숨 또한 구원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그는 자기 모든 가족을 거명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어떻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떠나 있는 가족들은 없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라합이 이토록 간절하게 매어 달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문에 붉은 줄을 매어 놓은 라합의 집에 피신해 있던 모든 라합의 가족들은 살렸습니다.

라합은 집은 분명 15절에 성벽 위에 거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다 와 하고 함성을 질렀을 때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집이 있는 성벽만은 무너져 내리지 않았습니다. 6장 23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다 살았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살았습니다. 우리들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기도할 자는 바로 우리들뿐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 우리 모든 가족이 삽니다. 모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예수님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구원까지 약속하고 계십니다.

라합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 라합은 정탐꾼을 돕기로 한 만큼 목숨이라도 내어 놓고 그들을 돕습니다. 정탐꾼이 사라지자마자 21절에 보면 붉은 줄을 창문에 매어 달아놓습니다.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격할 때 매어 놓으면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미리 매어 달아 놓는 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라합의 태도를 우리 시대에 적용해 본다면 라합의 신앙은 단호하며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빛과 소금의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붉은 줄을 매어 달므로 이 집은 예수 믿는 집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붉은 줄은 어디 있습니까? 혹시 세상에 나가서도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임을 모르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라합 신앙의 단호함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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