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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 가지를 보는 눈 (왕하 6: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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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상을 보는 눈

오래 전, 어느 유명 신발 회사에서 아프리카로 판매 사원을 보내어 그곳의 신발 판매 가능성을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파견된 판매 사원이 현지에 가서 보니, 대부분의 부족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는 즉시 본사로 다음과 같이 연락을 했습니다. “신발 판매 계획 취소 바람. 부족들은 전혀 신발을 신지 않고 있으며, 신발을 판매하는 상점도 전혀 없음.” 회사에서는 그 후에 다른 사원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그는 그곳의 형편을 살핀 후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보냈습니다. “신발 판매 계획 절실히 요망. 이 부족들은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므로 얼마든지 신발을 팔 수 있으며, 신발 상점 또한 얼마든지 세울 수 있음.” 두 사람 모두 동일한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시각으로 본 반면에, 또 다른 한 사람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시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신발 회사는 이 두 번째 판매 사원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곳에 신발 공장을 세워 크게 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외부의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 5 가지 기관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도 놀라운 것은 눈입니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제일 먼저 눈을 통하여 봄으로써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밝아야 하고 또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이 흐려지면 분별력이 떨어지고 정확한 판단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눈이 지금 어떠하냐, 즉 어떤 눈으로 현실과 사물을 보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2. 세 가지의 눈

오늘 본문 말씀인 열왕기하 6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있던 형편에, 북쪽에 있는 아람 왕국이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전면전은 아니고 주로 게릴라식으로 치고 빠지는 공격으로 이스라엘의 전력을 약화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고 계획을 세우면, 어떻게 된 셈인지, 이스라엘 측에서 미리 알아서 대처를 함으로 자신들의 공격을 피해가는 것이었습니다.

몇 차례 이런 일이 반복되자, 아람 왕은 자신들의 전략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미리 알아서 대처하는지 궁금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아람 왕은 자신들의 내부에 이스라엘 첩자가 있나 하는 것을 의심했습니다(왕하 6:11). 그러나 신하들은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고 하는 신통방통한 선지자가 있어서 무엇이든지 압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로 자신들의 작전을 훤히 꿰뚫듯이 아는 사람, 심지어 ‘아람 왕이 침실에서 한 말까지도 다 아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작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엘리사가 이스라엘에 있는 이상,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안 아람 왕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즉시 엘리사를 잡기 위해 군사를 보냈습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살고 있는 도단 성을 병거와 군사로 포위했습니다. 도단 성은 ‘두 우물’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곳이며, 수도 사마리아로부터 약 18 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아람의 군사 작전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 속에서 세상과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세 가지의 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

첫 번째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입니다. 이것을 대변하는 사람이 ‘엘리사를 시중들던 사람’입니다. 간밤에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거주하는 도단 성을 포위했는데, 엘리사의 수종드는 자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가 아람 군대가 온 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본 도단 성 주변 상황은 아람 군대의 엄청난 군사들과 말과 병거였습니다. 실로 엄청난 무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겁을 잔득 집어먹고는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15). 그래서 급히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15)?”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사람은 아람 군대의 엄청난 규모와, 그리고 작고 허술한 성인 도단을 비교하고, 도단의 약하고 작음, 그리고 자신과 엘리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적군의 위세에 눌려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나아가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 그 규모와 크기와 높이와 액수에 의해서 수시로 변하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런 것들에 의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눈에 보이는 것’의 규모와 크기와 높이와 액수가 남들보다 크고 높고 많으면 기가 살고, 남들의 것이 여러분의 것보다 조금 더 나아보이면 기가 죽고 하는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없는지요?

2) 육안과 영안이 다 가려진 경우

두 번째는 아람 ‘군사들의 눈’입니다. 밤새 성을 에워싼 아람 군대는 날이 밝자마자 엘리사의 성인 도단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는 엘리사의 기도로(18) 그들의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기보다는 주위를 보고 길을 가고 사람도 보는데, 웬일인지 상대가 누군지,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을 뜻합니다. 그들이 엘리사를 잡으러 왔는데, 엘리사가 그들에게 가서 길을 인도하겠다고 해도 그가 엘리사인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그들을 인도하여 도단이 아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으로 인도하여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감으로서 자신들이 이스라엘에 의해 꼼짝없이 포위된 상황인데도 전혀 알아차리지를 못했습니다.

아람 군사들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것조차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아가 비교적 현실을 잘 본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눈에 보이는 그 이면의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람 군대의 경우, 그들은 눈뜬장님처럼 엘리사의 인도로 사마리아 성 안까지 들어왔으며,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분별을 못하고,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뒤에 있는 영적인 의미는 더더욱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제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극동방송의 <소망의 기도>라는 프로그램에 한 성도가 기도를 올렸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든지요! 그 성도의 남편이 무당과 동거를 하고 있는데, 이 무당이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만 해주면 집 사주고 차 사주고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무당에게서 빠져나오지 못 나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약 그 사람이 본부인에게로 돌아가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무당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그 무당은 100% 가짜 무당입니다. 진정한 영적인 존재라면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빌고 잘 되게 해주야지, 무슨 말도 안 되는 협박으로 한 남자와 그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성도의 남편에게는 엉터리 무당과 이러한 말도 안 되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나아가 그 뒤에서 성도의 가정을 농락하는 악한 영의 궤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아람 군대나 이 경우처럼, 현실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나아가 영적인 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눈은 있지만 갈 곳도 찾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가는 쓸모없는 눈입니다. 부패한 곳, 음란한 곳, 흑암의 세력이 득실거리는 멸망의 자리로 갑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보다는 이러한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면의 의미를 아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엉뚱한 데로 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3) 현실을 바로 보면서 영적인 것을 보는 눈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세 번째 눈은 엘리사처럼 영안이 활짝 열린 ‘영적인 눈’입니다. 사환이 도단 성을 둘러싼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만 보고서 떨고 있을 때, 엘리사는 도단을 둘러싼 아람 군대 뒤로, 땅과 하늘에서 자신을 지키는 여호와의 군대인 “불말과 불 병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환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한 후에, 사환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환의 눈에도 성과 아람군대를 다 둘러싸고 든든히 지키고 있는 여호와의 군대가 보였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잡으러 온 아람 군대를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사단의 궤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에게는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아울러 그 이면의 것을 볼 수 있는 “제 2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막에서 장사꾼이 낙타를 잃어버렸습니다. 낙타는 사막에서의 아주 귀중한 재산이자 교통수단이었기에 열심히 찾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사꾼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을 붙잡고 물어보자 “그 낙타는 오른쪽 눈이 안 보이고 왼쪽 앞발은 절름거리고 앞니가 부러졌지요?”라고 그 노인이 말했습니다. 노인의 말에 장사꾼은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정확하게 자기 낙타에 대해서 말하자, 장사꾼은 틀림없이 이 노인이 낙타를 감춰두고 있다는 생각으로 노인을 재판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당신은 이 사람의 낙타를 감추고 있는가?”
재판관의 물음에 노인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낙타에 대해 그렇게 잘 알 수 있단 말인가?”
재판관의 질문에 노인은 천천히 설명했습니다.
“길의 한쪽만 풀이 뜯어 먹힌 것을 보고 오른쪽 눈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래 위에 왼쪽 앞발의 자국이 다른 발자국보다 희미하게 나 있으니, 왼쪽 앞발이 절름발이인 것을 말해줍니다. 또 뜯어먹은 풀잎이 가운데만 남아 있으니 앞니가 부러졌다는 증거이고, 그 낙타의 앞뒤에 사람의 발자국이 없으니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고 길을 잃고 헤매는 낙타인 것이죠.”

이 노인은 주위의 모든 것을 잘 관찰할 줄 알았고, 정확한 추리와 상상으로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본 것처럼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이러한 눈이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관심과 정확한 판단들이 쌓여갈 때 우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는 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군대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 3의 눈”, 즉 영적인 눈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통치와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풀을 보고 ‘풀이다’는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름 모를 잡초 속에도 생명의 신비가 있음을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잡초를 키우는 하나님을 보는 사람, 바로 그가 영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크로스비(Fanny J, Crosby)라는 여자 분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우인데도, 자그마치 9000여 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그녀는 원래는 정상인으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6개월 때 유모의 실수로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많은 대상과 주제에 대해 아주 신령한 노랫말들을 많이 썼습니다. 찬송가 219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의 가사를 보면,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찌 아니 기쁠까. 주의 얼굴을 항상 뵈오니 더욱 친근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는 영적인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영적인 눈으로 주의 얼굴을 항상 뵈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크로스비 여사가 지은 204 찬송가 가사에서는 이렇게 노래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즉 그녀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구속주이신 주님을 뵈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제 3의 눈”, 즉 영적인 눈입니다. 여러분들도 엘리사처럼, 그의 사환처럼, 크로스비 여사처럼 이와 같은 영적인 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먼저 보이고, 그 속에 있는 영적인 원리, 신앙의 원리를 먼저 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주시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기쁨만 넘칩니다.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유혹되지 않습니다. 이런 눈을 가진 성도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오직 감사한 일만 보입니다. 그러므로 걱정, 근심, 염려, 음란, 탐욕은 그 근처에도 못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먼저 보입니까? 우리 모두 영적 소경에서 해방됩시다. 그리하여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과 하늘 군대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가져, 원수를 물리치고 승리하며,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영광을 세워가게 되시기 바랍니다.

3. 현실을 바로 보고 영적인 것도 볼 수 있어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을 바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1의 시력’인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제2의 시력’인 그 이면을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눈도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3의 눈’인 영적인 시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가 이러한 것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세 가지의 시력을 두루 갖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성도들이 특별히 힘쓸 것은 바로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 영적 통찰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우주인인 에드윈 올드린이 헝가리를 가서 한 대학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달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가까이 느껴지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소련의 우주인 가가린은 우주에 가서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올드린은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도 청결하게 되어서 늘 우리 주님과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며, 무엇보다 세상을 이기게 만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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