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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과 땅 사이 (출 3:1~5, 살후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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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은 만물의 모체(母體)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리 반항적인 데가 있어도 땅을 숭배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욥기1;20-21에 보면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니’로 되어 있음은 땅이 만물의 모체로서의 의미를 알게 한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 중에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피조자임을 알게 한다. 인간은 땅에서 와 땅으로 돌아간다. 땅이란 온갖 존재의 세 으뜸(三元) 중 하나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삼원이다.

  우주를 주장하는 삼원인 ‘하늘’ ‘땅’ ‘사람’ (天地人)을 아울러 삼재(三才)라 한다. 삼재(三才) 역시 천지인(天地人)의 셋을 이르는 말로서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땅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베푼다.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는 늘 땅에 집착하고 땅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국가 간에 전쟁도 벌이고 영토 확장을 위해 남의 나라를 침략함으로 ‘제국주의’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본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한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의 할 일을 맡기신 장면에서 알게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이다. 준엄한 명령이다. 그러므로 땅을 생각해 본다. 숱한 목숨이 땅으로부터 오고 간다. 만물은 땅과 비비대며 땅을 판다. 땅에 부대끼고 땅에 매달린다. 땅과 씨름하고 땅에서 살다가 땅으로 간다. 흙은 땅의 원자이며 분자이다. 땅의 세포, 땅의 포자(胞子)가 흙이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흙으로 육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이 뜻은 인간은 흙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인간은 흙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다스리지 못하면 생명을 갖지 못한다.

  흙을 다스리는 것은 생명을 다스림과 같다. 흙에서 온갖 식물이 자란다. 온갖 목숨이 하나님이 만드신 땅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이 이치를 깨닫게 되면 흙은 일을 부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에덴에서 ‘선악과 열매’를 먹는 후에 에덴에서 떠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수고하는 일을 하게 된다. 성서는 ‘일 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했다. 옛말에 사람이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백일 동안의 양식이 줄어든다고 했다. (一日 不 作 白日不食) 일을 안 하고 놀고먹으면(無爲徒食) 그만큼 얻는 것이 없고 대가가 없고 보수가 없어 무엇보다도 일하는 즐거움과 일하는 삶의 의미를 잃는다. 땅은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나며 심는 만큼 얻게 되는 자연의 이치를 땅에 일을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모세의 소명(부름)과 사명(일)에서 ‘네가 서있는 땅’에 주의 한 점과 ‘신을 벗어라’ 하는 점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파브르는 그의 책 ‘곤충기’에서 ‘일하는 것만이 살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 점도 생각 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다. (창2:2-3)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에게는 ‘일’이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고 인간은 단지 관리하는 관리인이라는 사명을 망각하고 일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욕망과 편리주의에 따라 착취하며 문화를 형성해 왔다.

  그리하여 문화에 대해서는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따라 변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계획적이며 자유스럽고 통치적인 노력으로 살아왔다. 인간의 편리를 도모하는데 최대의 도구로서 인간의 문화는 자율적 문화 즉 탕자문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인간 중심의 인간과 자연의 이원주의가 물질문명의 발달을 가져왔으나 결과는 생태학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자연관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법칙을 회복하는 것으로 창조질서 회복은 땅의 환경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로 질서회복을 시키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현상은 창조자의 창조질서로 회복되어야 한다.

  광활한 하늘과 넓은 땅은 일찍이 존귀한 존재로서 간주 되어 왔다. 무수히 많은 생물체가 생겨나는 땅은 모체(母體)로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은 하늘과 땅의 순리는 자연에 속한 만물의 이치였다. 성서에서는 ‘하늘’에 대한 전통적인 묘사를 그것은 보편적으로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지고(至高)의 선(善)에 도달 하려고 갈망했었다는 사실과 우주적 계층적 질서 안에서 그 지고의 선이 영원이 계속되는 극치의 상태를 획득하려고 하였었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현대인의 세계관에 의하면 천국은 곧 하늘(heaven;sky)이라는 문자적 등식이 무효화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늘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이 무시를 당하는 것은 정치적, 문화적 저항에서 유래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으며 또한 아직 지식 화 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내세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아직 잔존한다는 이유이고 초심리학(para-psychology)의 데이터(data)와 황홀경에 잘 빠지는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되는 초자아적인 기질 같은 것들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늘에 대한 신앙에 적절한 삶의 태도가 금욕주의라는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신약 공관복음서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국한되어 있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도 4차례나 있다.

  이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가 통상적으로 사용한 표현 형태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신약 구절에서 ‘나라’에 대한 희랍어는 ‘바시레이아’이다. 그 낱말의 뜻은 ‘왕권’ 혹은 ‘지배’이다.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구성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즉 그는 하나님을 영원한 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순종으로 수용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실제로 보는 점, 하나님의 나라를 종말론적 소망의 대상으로 보는 개념도 알고 있었다. 여기서 우세하게 말한 점은 종말론적 개념이해에 두고 있음을 안다. 다만 미래적 종말론이나 실현된 종말론 중 어느 하나로만 이해는 금물이고 예수는 둘 모두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전파하는 말씀에서 알게 한다. 더 나아가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그 자신의 죽음을 명시적으로 연관 지어 말씀한 것은 없지만 그러나 매우 많은 증거들이 그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메시야로서의 그의 사명을 보여 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 제목의 설교 방향이 그러 하듯이 ‘하늘과 땅의 사이’를 성육신의 신앙으로 이해한다. 인류 원래의 타락에서 구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과 만물과의 약속이 옛 계약의 관계로 이해하여 율법을 말하나 새 계약의 관계는 땅의 사람으로 오시는 예수가 그는 곧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땅의 사람이심을 믿는 것 그것이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을 찾으려면 ‘하늘의 눈’과 ‘땅의 눈’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보는 것은 관(觀)이다. 그것은 입지(立志)를 말한다. 하늘과 땅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보일 때 이 세상을 알며 저 세상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상생(相生)하면 삶과 죽음의 교류 속에서 영원한 순환을 거듭하여 구원의 계속성을 이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세상을 하나로 보는 눈을 가질 때 그를 가리켜 ‘세상에 눈뜬 자’ ‘하늘에 눈뜬 자’라 말 한다. 창공을 날아 대륙을 건너려는 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눈먼 새는 창공을 나를 수 가 없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려면 먼저 세상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늘의 이치와 뜻을 알아야 한다.

  놀라운 일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땅을 보노라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세상을 알게 된다. 수천년 동안 잠든 땅이 새 하늘 새 땅으로 다시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보는 눈은 다만 눈감은 사물이며 세상이다. 새 땅으로 보는 눈은 살아있는 생명의 땅을 보게 된다. 아!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 달라는 주님의 기도가 바로 이것임을 알게 한다. 땅으로 오셔서 땅의 사람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 갈수 없다. 옛 현인들은 땅을 이 세상의 모든 짐, 만물을 모두 싣는 수레로 알았다.

  그래서 땅을 가리켜 여지(輿地)라고 했다. 이 말은 대지(大地)라는 뜻과 지구라는 뜻을 포함 한다. 이 말의 풀이는 온갖 기상의 변화와 온갖 인간, 온갖 동물, 온갖 식물을 비롯한 만물의 천변만화(千變萬化), 천태만상(千態萬象)을 하나의 거대한 수레처럼 땅을 믿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게 이 진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하늘과 땅의 사이’로 알게 한다. (배성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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