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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 오늘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잠 30:7-9, 눅 1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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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잠언 30:7-9
“7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누가복음 12:22-31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두려움

여러분은 이 순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만은 내게 꼭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 이것을 내게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나라 경제를 보아도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북핵의 문제도 3년 전처럼 또 흐지부지되고 근본적인 문제는 쉽게 풀릴 것 같지가 않습니다. 또한 각자의 직장에서의 위치에 대해서, 부모님들의 경제 사정과 건강을 위해서, 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인간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 걱정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인간 됨됨이, 인격을 위해서 걱정을 합니다. 과연 나는 남과 비교하여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나는 성공할 수 있는가? 나는 과연 경쟁력이 있는가? 나는 과연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 등등 우리는 수많은 걱정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가능하면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빨리 현실로 나타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람들의 마음 깊이 박혀 있습니다. 구약의 욥기의 주인공 욥은 의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욥기를 읽으면서 욥의 잘못을 잘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인 어떤 약점이 있을지라도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은 의인이다. 욥은 흠잡을데 없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너무나 끔찍한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나 전 재산을 잃어 버리고, 10명의 자녀는 집이 무너져서 동시에 죽어버렸으며, 자신의 몸에는 몹쓸 병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명예와 지위는 다 사라지고, 아내와의 관계도 멀어졌습니다. 그가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탄식을 합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욥은 아주 깨끗하고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식들이 잔치를 한 다음 날이면 자식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혹시라도 죄를 지었을 가능성 때문에 제사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의인인 욥의 마음 속에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소원

그런데 사람들의 두려움의 이면에는 반드시 소원이 있습니다. 걱정이 있다는 것은 같은 내용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이 있는데 희망이 없다면 삶을 살아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우리에게 걱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바로 그 곳에서 우리에게 적극적인 희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기가 없을 때 도리어 삶의 허무와 무의미성의 노예가 됩니다. 그래서 복지 국가에서 마약 소비가 많습니다. 생활 수준이 높을수록 사람들의 행복감이 낮으며, 자살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르완다, 뱅글라데쉬,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는 행복지수가 아주 높습니다. 사람들은 위기가 오고 걱정이 있을 때, 더욱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삶에 위기가 왔을 때 더욱 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생에 대한 애착이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당해서 더 열심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생존의 두려움

그런데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위기 중의 위기입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은 바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확보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고 가장 원초적인 일입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 윤리나 법이나 생의 의미 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배고픈 일곱명의 조카를 위해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형을 살게 됩니다.

먹는 문제는 생존의 긴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상한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의 의미와 생의 목적과 삶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말합니다. 사람이 일단은 살아야 삶의 의미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존을 하되 윤리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사회보장과 여러가지 사회적 기능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세 많은신 어르신을 모신 가정에서 어르신과 며느리가 쌀 때문에 시어머니는 쌀이 꼭 한 가마니 이상은 있어야 안심을 합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쌀을 사올 생각을 안합니다. 요즘은 핵가족인데다가, 학생들은 학교 급식에다가, 학원으로 곧장가면 외식하게 되고, 남자들도 직장에서 늦게까지 근무하면 저녁을 사먹게 되고 해서 집에서 밥을 먹는 회수가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쌀은 갓 도정한 것을 먹어냐 맛이 있는데, 쌀을 많이 사놓으면 오랜 기간을 맛없는 쌀을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연세드신 세대와 젊은 세대가 쌀 때문에 갈등을 빚곤 합니다. 이것이 배고픔을 겪은 세대와 배고픔을 모르는 세대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죽느냐 사느냐의 걱정에 대해서 단호하게 “기도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말고 근심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주기도에는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주기도도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한 입에서 나온 가르침인데도 문자적으로 보면 분명히 반대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과연 걱정과 기도의 금지와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한번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이 기도는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양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도가 끼니가 떨어졌을 때만 하는 기도는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매 끼니 때마다 먹고 있는 음식도 그리고 이미 확보한 음식도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주신 것임을 감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식사기도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식탁 앞에서만이라도 경건한 사람은 그 신앙이 자라날 것입니다.

둘째, 이 기도는 염려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물질이 없어서 당장 위기가 닥쳐와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 졌는데 염려 안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의도는 단순히 염려를 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인간이 물질에 마음을 온통 다 빼앗겨서 두려움과 근심 가운데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서 걱정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를 장님으로 만듭니다.

한 집사님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교회 건축을 두 번이나 주도적으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사업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나마 소유하던 집을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학교를 다니는 상황에서 어느 곳에서 더부살이라도 하기에 적당한 곳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생겼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나이에 집 걱정을 해야 되겠습니까? 제가 언제 큰 욕심을 부린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만큼 열심히 살았으면 됐지 또 무엇이 부족해서 안 채워 주시는 겁니까? 제가 하나님 집을 두 채나 지었으면 되었지 뭐가 부족해서 저의 하나 밖에 없는 집은 왜 가져가십니까? 하면서 별의 별 불만을 다 터뜨렸답니다. 이 때 조용히 들려오는 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는 재물과 일상적 삶으로부터 자유하고 헌신한다고 하면서 내게 충성하지 않았니? 내가 너에게 부족하게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의 염려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염려지, 아직은 아니지 않느냐? 지금까지 너와 네 가족이 단 하루도 지붕이 없는 곳에서 잠을 잔 적이 있느냐? 단 한 끼라도 양식이 떨어진 적이 있느냐? 네가 가고자 했을 때 못 간 곳이 어디 있는냐? 또 네가 가진 지혜와 지식이 누구 것이냐?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아니하고 너에게만 준 것이 얼마나 많으냐? 너는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느냐?

이 집사님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르는 힘이 솟아 났습니다. 그러자 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겨서 위기를 잘 극복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추상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의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기도의 ‘일용할’이라는 말은 ‘오늘 존재에 필요한’, ‘오늘 생존에 필요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살아가는데 필요한’이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따지면 내일이나 종말론적인 미래가 아닌 ‘오늘’입니다. 분량으로 따진다면 ‘구약의 만나처럼 매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배 정의를 외칩니다. 과격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부자의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어떤 사람들은 부드럽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까마귀를 보아라. 그리고 이것을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예수님은 헐벗은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헐벗은 이유가 단순히 가난해서가 아니라, 포악한 채권자에게 속옷은 물론 겉옷까지도 빼앗기고 수치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 들의 백합화를 보아라. 그리고 생각해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궁핍의 순간, 결핍의 순간에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모든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단 한끼도 먹을 수 없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양식을 주시는 손길 – 하나님 은혜

옛날 한 왕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요리사를 불러 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임금님, 요리는 기술일 뿐 야채를 제공한 사람의 공이 더 큽니다.”
요리사가 겸손하게 말하지 왕은 야채 장수를 불렀습니다.
야채 장수도 “진작 상 받을 사람은 야채를 재배한 농사꾼”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은 다시 농사꾼을 불러 치하하며 상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농사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씨를 뿌려 손질만 했을 뿐이지요. 때에 따라 비를 주고 햇빛을 내려서 자라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 드릴 따름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생존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존을 책임져 주시므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기도는 구체적인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 구체적인 우리의 일상의 삶의 한가운데까지 뻗쳐 있다는 것입니다.

맘몬으로부터 해방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존을 책임져 주십니다. 결코 물질이 우리의 생존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를 맘몬을 섬기는 데서 해방시켜주는 기도입니다. 특히 오늘날 물질이 인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유토피아의 환상도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맘몬이 등장했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이 말해야 더 신용이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나 사람의 말에 신용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경제력이 신용도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인간적인 것이 정당화의 기준이었는데 이제는 이익추구가 정당화의 기준이 되어 버렸고, 모든 가치 위에 경제적 가치가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상실의 두려움, 결핍의 두려움

사람들은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맘몬의 노예가 됩니다.

부자는 물질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긴급하게 필요한 상황에 있으므로, 물질 ‘결핍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부자 청년은 재산이 많았습니다. “너는 그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상실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또 다른 청년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9:58) 하셨습니다. 이 제자도 예수님을 따랐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결핍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아굴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우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기도를 함으로서 맘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는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모든 영역에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당신은 우리의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십니다” 하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의 의미는 단순히 음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 심리적, 사회적, 모든 욕구를 포함합니다. 기본적 욕구의 충족이 없이는 우리는 한 순간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인정과 용납을 필요로 합니다. 부모의 육체적 보살핌과 함께 사랑이 없이는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인정이 없이는 참다운 인간적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이모든 필요한 것을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만 우리는 매일의 삶을 만족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먹을 음식과 입을 옷과 따뜻한 가정과 살 수 있는 집과 좋은 인간관계와 안정된 사회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모순이 바로 이점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우리에게 영적인 욕구를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육체는 육체의 양식을 먹어야 삽니다. 영은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영의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성경말씀과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 우리의 영적 양식입니다.

한 부인이 앵무새를 사서 기르기 위해 애완용 동물을 파는 상점으로 갔습니다. 앵무새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간 부인은 바로 다음날 상점으로 되돌아와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앵무새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새장 안에 거울을 넣어 주셨습니까?” 상점 주인이 물었습니다. “앵무새들은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보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당장 거울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상점으로 되돌아와서는 새가 여태 말을 하지 않는다고 볼멘 소리로 말했습니다.

“사다리를 넣어주셨습니까?” 상점 주인이 말했습니다. “앵무새들은 사다리 오르내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다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그녀는 상점으로 와서 앵무새가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는 불평을 반복했습니다.

“그네를 넣어주셨나요? 새들은 그네 타고 놀기를 즐기거든요.” 그녀는 다시 그네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음날 상점으로 다시 온 그녀는 새가 죽었노라고 힘없이 말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상점 주인은 말을 계속했습니다. “혹시 앵무새가 죽기 전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

“예, 거기 음식을 파는 것은 없느냐고 한 마디 하고는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실제로 몸치장을 하기 위해 거울을 구입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들여놓으며, 그네를 구입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위한 양식을 먹고 있는 것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감이 없이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잠시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 속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영감을 주십시오 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 의’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기 의와 완벽주의와 절망으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처럼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걱정과 근심으로 하얀 밤을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서 헛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로부터 받으므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시편 127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염려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양식만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염려 없이 사는 삶은 자기 스스로 만든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여러분, 여러분의 염려를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현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현실 뒤에 있는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행복을 만들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의 용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현실의 다른 차원이 보입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자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육체적인 것과 사회적 환경과 영의 양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박병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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