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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물질관 (마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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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하나님이 인정하고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도가 누구이겠습니까?
저는 하나님 보시기에 순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욥1:8절에 욥을 소개하면서
      [ 욥같이 순전하여 악에서 떠난 자를 보았느냐? ] 고 합니다.
그럼 누가 순전한 교인이겠습니까?
시119:127절 [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
돈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돈이 우리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하나님 다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물질관이 바로 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바른 물질관을 확립하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까?
1.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까요?(19-21절)
산상보훈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즉
              [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복된 삶의 비결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를 마음에 품고 삶에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 -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그 믿음은 말씀에 순종과 기도생활에서 잘 나타나야 합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아신다
그러니 믿음으로 구해야지 외식하거나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합니다.

2)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의 최고의 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3가지 마5:39절 이하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되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의 원리입니다.
관용과 사랑과 봉사의 삶입니다.
3)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인간관계는 그래도 노력하는 편입니다만
물질과의 관계에서는 그의 대부분 교인들이 성경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자기가 더 잘 알아서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물질관이 바로 되어져야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물질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20절에서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 ] 고 합니다.
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할까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이 말은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는 곳에 마음이 그곳에 다 가 있습니다.
21절 보세요.
[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느니라 ]
사람은 소망이 잇는 곳에 마음이 집중 되어 있고
    따라서 시간도 그기에 다 투자합니다.
    나아가 물질도 그기에 다 쌓아놓습니다.
바울도 딤전4:10절에
    진정 경건한 성도는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땅에 그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두면 안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땅에 쌓아두면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도적질 해간다는 것입니다.
꼭 도둑이라 해서 밤손님만 도둑이 아니라
질병, 재난, 불의의 사고, 실패 등이 재물을 앗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다가 보물을 쌓으려면
    뭐니 뭐니 해도 헌금생활을 바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보물, 귀한 재물 가운데서
      얼마를 구별해서 교회 헌금함에 넣는 것이 헌금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헌금만큼 우리의 신앙인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 없습니다.
헌금의 기본은 십일조입니다.
특전대원 출신 목사님이 십일조는<10m 점프대>다 라고 비유합니다.
군인들 중에서 낙하산을 타는 특전 대원이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사람들, 보기에는 아주 낭만적입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 내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상에서 피 눈물 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일 공포를 느끼는 높이가 11미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특전대원들을 훈련시키는 곳에는 10미터 높이의 점프대가 있습니다.
10미터 짜리 점프대 위에 딱 서면 눈 높이가 11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내려다보면 아찔하죠? 거기서 계속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무섭지 아니할 때까지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10미터 점프대가 두렵지 않고 맘대로 뛰어 내릴 수 있으면
그 다음에는 비행기에서도 뛰어 내립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 아무리 높아도 무섭기는 똑같으니까요.
      어디든지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일조가 무엇이냐면 `10미터 점프대`입니다.
거기서 뛰면 비행기에서도 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에서 겁 없이 뛰어 내릴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헌금에 대해서는 자유 합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쌓아 놓을 수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로서 권면합니다.
인생을 허무하게 사시렵니까? 흐뭇하게 사시렵니까?
흐뭇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22-24절)
1)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22-23절
[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
[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
눈이 어둡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영안 즉 믿음의 눈이 뜨여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입니다.
물질에 욕심이 생겨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double vision 이 되어 사물을 바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double vision 아시죠?  T. V 화면에 물체가 두개로 보이는 것 있죠?
그러니 잘 분간할 수 없읍니다.
마음의 눈이 침침해져 사물을 바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염려하는 것입니다.
염려하게 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니 성도가 물질에 집착하게 되면 염려가 생겨
    하나님과 물질에 마음이 갈라집니다.
마음이 물질에 빼앗깁니다. 그러니 믿음의 눈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염려란 마귀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날에도 이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고 난처한 자리에 빠트린다. ]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염려란 우리를 짓궂게 괴롭힐 수 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송두리째 망칠 수 있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온전히 행동하려면 눈이 밝아야하듯이,
영적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투자하는 삶을 살려면
      영적인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청춘과 생명을 불살라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와 담을 쌓고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악 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영적 눈`이 흐르려지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못하는 이유가             
2) 두 주인을 섬기려는 약은 마음 때문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4절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여기에 재물이란 말 - Mammon 이라 하여 본래는 <신뢰하다>란 말인데
              돈만 믿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Mammonism 하면 배금주의를 말합니다.             
맘몬은 현대인의 우상인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돈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신앙생활 보다 사업이 더 바쁜 교인
예수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교인을 두고 말합니다.

그럼 물질하고 담 쌓고 어떻게 세상 살아가느냐?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물질하고 담 쌓아라 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노예가 되지 마라. 돈을 사랑하지 마라.
하나님보다 돈이 더 크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경제학자는 한나라의 피와 같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몸에 피가 흘러야 살듯이 국가에 돈이 흘러야 나라가 산다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확실한 수단`으로 생각을 합니다.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막강한 무기`로 생각을 합니다.     
또 `안전을 지켜주는 확실한 방패막이`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생명도 나의 건강까지도 보장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돈을 높이니 자연히 돈의 횡포가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돈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폭군으로 변했습니다.
얼마나 그 세력이 무서운지요.
돈의 힘 앞에 국가도 무릎을 꿇고 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돈의 위세 앞에서는
    法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보고 삽니다.
돈은 이미 화폐라고 하는 가치를, 그 영역을 뛰어넘은 지가 오랩니다.
이미 월권행사를 한지가 오랩니다.
    돈은 우리의 정신까지 지배를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가치관까지 마음대로 뒤집어 놓습니다.
우리의 전인격을 파괴하고도 남을 수 있고               
    이 세계의 도덕성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과 돈의 밀접한 관계를 꿰뚫어 보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충성은 한 분에게 충성해야지
          두 사람에게 똑같이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비극이 무엇입니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에게 돈이 하나님으로 보이면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집니다.
    돈은 사이비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 하고 돈 하고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
3. 예수님은 왜 물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까?(25-29절)
25절에 예수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하십니다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딜레마,
                곤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1.자고나면 끼니 걱정해야하는 제자들에게 먹는 것, 입는 것, 염려하지 말라 
하니 예수님 참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하신다고 하실 것입니다.
2. 또 어떤 분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먹는 문제 입는 문제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 하느냐?
그렇지요 지금 여기 있는 성도들 중에 먹는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교인 있긴 합니다만 얼마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이 땅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만 하신 말씀만이 아니요
                  또 돈 있다고 염려가 없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는 염려병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입시 때문에 이건 염려 정도가 아니라 안 죽을 만큼 고민합니다.
그럼 대학 들어갔다고 다 된 것 같은데 이제 취직문제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직장 들어갔다고 해서 다 된 줄 알았더니
조퇴니 명퇴니 심지어 감퇴 황퇴니, 오륙도, 정도가 아니라 사오정이라 하니     
자고 일어나면 염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 아무리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이고 염려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염려하지 말라 ] 합니다.
왜? 염려하지 말라 합니까?
1) 첫째는 신분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듭니다.
(1) 26절 공중 나는 새를 보라 
(2) 28절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11절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 
염려할 시간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분상 맞게 삽시다.
손에 성경책 들고 교회 가는 것,
    교회 와서 손들고 찬송하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보고
    세상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느냐?
예수 믿으니 저러겠지 하고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고 예수 믿는 사람 정말 다르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들이 주저앉을 자리에서 우리는 일어서는 것이고
    그들이  염려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방인들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걱정해도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두번째는 염려는 백해무익이기 때문입니다.               
27절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         
더 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되려 25절에 [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
이 말은 염려하면 목숨만 상하고 몸만 상한다고 합니다.
염려하면 제 명데로 못산다는 것입니다.                 
염려는 영육간에 백해무익 합니다.                     
염려 잘하는 사람치고 믿음 좋은 사람 있는가 보세요.
눅21:34절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 하면서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마음이 둔하여지면 신앙이 병들기 마련입니다.
      신앙 병들면 결국 삶이 말라지는 것입니다.

염려의 본질을 살펴보면  염려는 <물어 뜯는다 숨통을 죈다>는 뜻입니다.
마치 동물의 왕국에 사자가 얼룩말이나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죄이지요.
염려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염려하면 우리의 신앙이 맥을 못춥니다.
암병의 원인에 대해서 아직 확실히 밝히지 못하지만
    그러나 스트레스 받는 사람이 훨씬 발병률이 높으데요.
    스트레스가 뭡니까? 바로 염려 아닙니까?
염려는 백해무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염려하는 것 그것 백해무익이야
그러니 너희는 마음 푹 놓아라. 염려 붙들어 매어 놓아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질 대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가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4. 우리가 물질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30-32절)
1)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
뒤집어 생각해보면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는 비결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안 믿어주는 것 바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염려 뚝! 하면 뚝! 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32절 [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아멘~!

염려하는 근본원인은 현실적인 어려움 그 자체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염려 다 맡깁시다. 
베드로는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벧전5:7절에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
또 사도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4:6-7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면 그 분의 약속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약속이 무엇입니까?
5. 성경이 제시하는 성도의 바른 물질관은 무엇입니까?(33-34절)
33절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이것이 성도의 바른 물질관입니다.
현대인들 보너스 참 좋아 하지요.
하나님도 우리에게 보너스 주시기를 참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전파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한 그리스도인의 최우선적인 삶의 목표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삶의 목표를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저는 얼마 전에 대구에도 이런 교인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와 함께 젊은 집사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이 우리 집사님 선교헌금을 매달 1000만원을 한다고 자랑해요.
그래서 제가 [ 집사님 대단하십니다 ] 하니
        [ 제가 하는 것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니 하는거지요 ]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요. 
우리 내일교회도 이런 주의 손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너희가 욕심을 부리기까지 모으려고 하는 재물
      심지어 몸을 상해가며 까지 염려하는 돈 문제
      그런 것 다 보너스로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을 복음전파를 위해 사용되어질 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보물을 천국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가장 안전한 은행은 천국은행입니다.
그기는 사소한 오차도 있을 수 없는 곳입니다.

작가 <벤다아크>의 유명한 천국풍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갔습니다.
천국에서 천사의 안내를 받아 여기저기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곳에 와보니 참 아름다고 멋진 근사한 집이 있습니다.
이 부자는 깜짝 놀라면서
“야! 굉장한데 이 집은 누구집이요?”
“이 집은 당신이 거느리고 있는 하인의 집입니다”
“어떻게 하인이 천국에 이런 집을 소유할 수 있었소”
천사가 하는 말이
“천국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그가 보낸 자료로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무척이나 낡고 험한 집이 있었습니다.
“이 집은 누구 집이요?” “당신이 살 집이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집에 살 수 있습니까?
            뭔가 잘못되었겠지요.”
그러니 천사가 하는 말이“천국은 실수도 오류도 없습니다.
                당신이 보내온 재료로 이 집을 지은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풍자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는 풍자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무슨 재료를 보내었습니까?
내게 보화 같은 재료를 보내었으면 보화 같은 집이 예비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아무 것도 보내지 아니했다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신학자 <죠지 스위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 마지막 날  내가 얼마나 벌었느냐?
이것은 하나도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없다,
그 때 중요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위하여 주님께 드렸느냐?’ 가 중요한 질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 즉 복음전파를 위해 드려지는 삶이         
      우선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성도는 물질관이 분명할 대 물질적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가르쳐 줍니다.
욕심으로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 보다 물질이 더 크게 보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도 섬기고 맘몬도 섬기면 되지
    할런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돈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
이렇게 내일이 염려될지 모르지만 염려는 백해무익이야
그리고 염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에게 신분상 맞지 않는 일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삶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시한 삶의 목표를 나의 삶의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붙들어 들어 쓰시며
이 모든 것을 나의 삶에 넘치도록 더해 주실 것입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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