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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성장의 7가지 걸림돌 첫 번째] : 게으름 (마 25: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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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과 게으름

"이 책은 성경 다음 가는 가장 귀한 책이다." "이 소설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최고의 백과전서다." 도대체 어떤 소설책이 이런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까요? 바로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이 베드포드 감옥에서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원제는 The Pilgrim's Progress)입니다. 힌두교도인 간디조차도 이 책을 읽고는 "영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칭송했습니다. 너무도 귀하고 중요한 책이기 때문에 내용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성도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합니다.

<천로역정>의 내용은 저자의 꿈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제1부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처자를 버리고 등에 무거운 짐(죄)을 지고, 손에는 한 권의 책(성서)을 들고 고향인 '멸망의 도시'를 떠난 후 도중에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하늘의 도성'에 당도하는 여정을 그렸고, 제2부에서는 그의 처자가 그 뒤를 쫓아가는 여정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하늘가는 길의 여정을 그렸다'는 뜻으로 <천로역정>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누구인가? 당연히 우리 크리스천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죄의 삶을 떠나 '하늘의 도성' 즉 천국으로 가는 길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 '크리스천'이 '하늘의 도성'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사람들이나 위험들은 모두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며 만나게 되는 온갖 위험과 유혹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로역정> 제1부 7장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은 길을 가는 도중에 길옆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잠꾸러기 셋을 만나는데 그 이름은 각각 '무지'(無知=Simple), '게으름'(Sloth), '거만'(倨慢=Presumption)이었습니다. 그들 세 사람의 발에는 모두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는데 크리스천은 거친 들판에서 쇠고랑을 찬 채 자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 싶어 그들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여보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당신들은 매우 위험한 잠을 자고 있어요. 제가 이 쇠사슬을 풀어 볼 테니 어서 일어나세요." 그러자 그들 세 사람은 '크리스천'을 한번 힐끔 보더니 귀찮다는 듯이 각자 한 마디씩 하는데, 먼저 '무지'가 말합니다.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그 다음에 '게으름'이가 말합니다. "아이고, 난 더 자야겠어." 이번에는 '거만'이가 말합니다. "야, 너는 네 일이나 잘 하지 남의 걱정은 왜 하냐? 우리는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 사람은 다 제각각 살아가게 마련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세 사람 모두 또 잠이 들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가장 큰 적은 무엇이냐? 영적으로 잠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 영적인 잠꾸러기들이 있는데 대개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무지'와 같이 뭘 몰라서 자고, '게으름'이 같이 게을러 빠져서 잠을 자고, '거만'이와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 잠을 자는 것입니다.

영적성장의 일곱 가지 걸림돌, 그 첫 번째

오늘부터 또 시리즈 설교를 시작합니다. 이번 시리즈의 제목은 '영적성장의 일곱 가지 걸림돌'입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위험과 유혹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유혹과 함정에 빠지게 되면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평생 영적으로 부지런히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까닭은 성장이 없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살아있는 것은 모두 자랍니다. 즉 생명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신앙이 살아있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합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신앙이 자라야 하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퇴보한다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장이 정말 중요한데 세상에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물론 찾아보면 수십 수백 가지겠습니다만 저는 이번 시리즈 설교에서 대표적인 영적 성장의 걸림돌을 일곱 가지 뽑아보았습니다. 일곱 가지를 미리 알려드리면 재미없을 테니까 여러분도 그 일곱 가지가 무엇일까 한번 상상해보며 이번 시리즈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 첫 번째 걸림돌로 '게으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금 전 인용한 <천로역정>의 내용처럼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자칫하면 게으름에 빠져 영적으로 잠이 드는데 그렇게 되면 절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무지해서 영적인 잠에 듭니다. 어떤 사람은 교만해서 영적인 잠이 듭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흔한 경우가 게으름 때문에 영적인 잠에 드는 것입니다. 게으름이 왜 치명적이냐? 게으르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영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의 도성'(천국)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이지요.

여러분도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토끼가 저만치 앞서 가다가 거북이가 보이지도 않자 안심하고 낮잠을 자지요? 그러다가 비록 걸음은 너무 느리지만 쉬지 않고 달려간 거북이가 이기게 된다는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하고 게을러지는 사람은 결국 패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무능하거나 느리더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가 이긴다는 뜻 아닙니까?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었다고 반드시 잘 믿으라는 법 없습니다. 잘 믿는 집에서 태어났거나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신앙 좋으라는 법 없습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처럼(마 19:30) 늦깎이로 아주 나중에 믿은 사람이 더 신앙이 좋을 수도 있고,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나 신앙적인 환경이 아주 열악한 사람이 더 잘 믿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아무리 먼저 믿었어도, 또 남들보다 빨리 은혜를 받았어도 토끼처럼 신앙의 여정 도중에 영적 게으름에 빠져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경고

성경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특히 잠언에 집중되어 나오는데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 유명한 는 말씀이나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잠 6:9).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르느니라"(잠 26:14) 등 잠언에만도 수십 군데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정말 이 말씀들만 보아도 허구한 날 침상에서 뒹굴뒹굴 하고 떡 그릇을 앞에 놓고도 손을 올리기 귀찮아 먹지 않고 있는 게으른 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상생활에서 게으른 자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생활의 게으름보다 영적인 게으름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달란트 비유인데 여기 보면 주인에게서 다섯 달란트 받아 당사해서 열 달란트 만든 종과 두 달란트 받아 장사해서 네 달란트 만든 종이 나오고, 또 한 달란트 받아 장사하지 않고 땅에 감추어 둔 종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온 후 어떻게 됩니까? 본문 21절에는 열 달란트 만든 종이 받은 칭찬이 나오고, 23절에는 네 달란트 만든 종이 받은 칭찬이 나오는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정말 글자 하나 한 틀리고 똑같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열 달란트 만든 종이 더 큰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똑같을까요? 그것은 칭찬의 내용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두 사람 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합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선하다'는 뜻이며 '충성되다'는 말은 '믿을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두 종은 "얼마를 남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충성을 다 하고 최선을 다했느냐?"로 평가 받은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최선을 다해 장사했기 때문에 비록 남긴 액수는 달라도 똑같은 칭찬을 받은 것이지요. 반대로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종은 26절에 보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는데 여기서 '악하다'는 말은 앞서 두 종에게 주었던 '착하다'는 칭찬의 반대말이며, '게으르다'는 말도 '충성되다'는 말의 반대말입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종들에게 준 칭찬과 책망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충성되고 부지런한 것이 곧 선한 것이고, 게으른 것이 곧 악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도 게으른 것은 용서 받을 수 없지만 특별히 영적인 세계에서 게으름은 악한 것입니다. 죄(罪)입니다. 뿐만 아니라 30절에서 주인이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바깥으로 내쫓을 때 "이 무익(無益)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고 말합니다. 게으른 종은 주인에게 백해무익(百害無益)합니다. 아무 쓸데없는 자일뿐 아니라 해만 끼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해도 게으르면 우리는 하나님께 백해무익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달란트가 돈의 단위지만 나중에 '재능'이나 '능력'을 뜻하는 말로 바뀐 것을 다 아시지요?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것들을 맡기셨나요? 재능이나 능력을 맡기셨고, 물질을 맡기셨고, 시간도 맡기셨고, 건강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달란트들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반드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그 재능과 능력과 물질과 시간과 건강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투자도 하고 사용도 해서 이윤을 얻어야 합니다. 물론 그 이윤이란 나에게는 영적인 성장이요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주님이 맡기신 재능과 능력과 물질, 시간, 건강을 땅에 파묻어 버립니다. 즉 훌륭한 재능과 장점을 가지고도 그것들을 사용해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쓰지도 않고 남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안 쓰고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도 땅에 파묻는 것이지만 본디 사용해야 할 곳에 사용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사용하는 것도 땅에 파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재능과 능력을 영적 성장이나 영혼 구원이 아닌 다른 데 열심히 사용합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취미생활이나 쾌락을 위해 말입니다. 이것도 땅에 파묻는 것이며 반드시 책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꼭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 있는 것만이 게으름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써야할 곳에 안 쓰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하고 다른 데 쓰는 것도 게으름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 하나를 파묻어서 이렇게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책망을 받았다면 하물며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파묻어 두는 사람은 얼마나 더 큰 책망을 받겠습니까? 작은 재능이나 능력으로 하나님 위해 쓰지 않은 것만으로도 바깥 어두운데 데(이것은 지옥을 의미합니다)로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면 하물며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재능과 능력과 많은 것들을 받아 게으름 때문에 사용하지 않거나 엉뚱한 데 사용하는 자는 얼마나 더 비참한 형벌을 받게 되겠느냐 말입니다. 이 게으른 종처럼 우리가 가진 것마저 다 빼앗겨 부지런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게으름과의 작별을 위한 점검

김남준 목사가 지은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 게으름>(생명의 말씀사)이라는 책에 보면 참 재미있는 표가 하나 들어있는데 바로 '게으름과의 작별을 위한 매일자기점검표'입니다. 여기 보면 '게으름을 피하기 위한 스무 가지 점검질문'이 나옵니다. 매일 이 질문으로 자신을 점검하면 게으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듣고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1. 세워 놓은 계획에 따라 규모 있게 시간을 사용하는가?
2. 정해 놓은 기도의 시간을 지켰는가?
3. 기도 시간에 열렬하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였는가?
4. 성경 읽는 시간을 정해 두고 지키고 있는가?
5.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6. 공예배에 참석하였는가?
7. 준비된 마음으로 공예배에 나아가, 선포되는 말씀에 집중하였는가?
8. 직장 생활(학교 생활)을 근면하게 하였는가?
9. 부주의하게 일처리하지는 않았는가?
10. 필요 이상의 수면을 취하지는 않았는가?
11. 소중한 아침시간을 침상에서 낭비하고, 허둥지둥 하루를 시작하지는 않았는가?
12. TV를 보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13. 불필요한 정보나 오락을 위한 인터넷 사용에 과도한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았는가?
14. 취미 활동(스포츠, 영화, 책, 낚시 등)에 과도한 열정을 허비하지는 않았는가?
15. 불필요한 만남을 유지하느라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지는 않았는가?
16. 잡담이나 농담으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는가?
17. 헛된 공상과 불필요한 생각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는가?
18. 과식하지 않았는가? ➛ 과식도 게으름이랍니다.
19. 먹고 마시는 일에 과도한 욕망을 가지고, 많은 시간과 돈과 생각을 낭비하지는 않았는가?
20. 잠들기 전 하루를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내일을 계획하는 시간을 가졌는가?

이 스무 가지 질문을 던지고 나니 사실 제일 찔리는 사람은 저입니다. 제가 이 스무 가지 질문 중에서 적어도 3분의 1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상당히 게으른 사람입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누구보다 저 자신이 먼저 게으름을 벗어나 부지런하고 충성된 목회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안 그러면 저 자신의 영적 성장도 불가능할 뿐더러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목회자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은 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게으름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도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때 이 무서운 책망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빠삐용>이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 빠삐용이 살인죄 누명을 쓰고 수용소에 들어가 혹독한 강제노동을 받다가 여러 번 탈옥을 시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은 탈옥을 했다가 실패해 붙잡힌 빠삐용이 독방에서 꿈을 꾸는데 재판관들이 빠삐용을 둘러싸고 "너는 죄인이다."라고 집중 공격을 합니다. 빠삐용은 내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지 죄가 있어 감옥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데 그때 재판관이 준엄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지었다!" 사람들은 게으름과 방탕함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죄인지 모릅니다. 게으름이 죄인지 모르기에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게으름은 모르는 사이 우리 영혼을 서서히 죽입니다. 돈 10만원 낭비하는 것은 벌벌 떨면서 1시간을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는 것이 아까운지 모르는 이것이 바로 인생을 낭비하는 죄요 영적으로는 엄청난 큰 죄입니다. 나중에 반드시 재판장 되신 주님께 "너는 인생을 낭비하는 죄를 지었다!"고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결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영적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인 게으름을 버리고 늘 하나님 보기기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장차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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