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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전 9: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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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투를 잘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보급입니다.
  조그마한 유목민 부족에 불과했던 몽고가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세계적인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던 것 외에도 병정으로 차출된 사람에 대한 지원을 그 가족들이 직접 담당하는 특별한 보급 체계가 성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럽을 주름잡았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고만 것은 광대한 러시아 대륙을 횡단함으로써 그 엄청난 대군의 보급에 큰 차질을 빚은 데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반면에 영국이 히틀러의 침략에서 생존하고 연합군 대반격의 교두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도 불구하고 호송선단을 통한 해상 보급로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투와 보급 -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잘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병법의 상식'에 불과합니다.

  성경 말씀은 '전투하는 지상교회'에서도 그와 꼭 같은 원리가 적용되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이 복음 전선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전도자라는 전투원과 교회라는 보급부대가 각각 완수해야만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006회계년도'를 마감하는 주일을 지키면서,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우리 각자가 지켜왔던 본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해봄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승리하는 교회의 전투력을 함께 증강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1. 교회는 전도자의 생계를 물질로 지원하는 보급의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7절에 기록하기를 "1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7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도전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반론으로 바울은 우선 "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직의 합법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하는 것이 사도의 필수 자격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 '바울 자신이 전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곧 자신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증거라고 밝혔습니다.

  사람의 심령을 예수 믿도록 만들고 잘 섬기도록 이끄는 사역이란 것은 정말 보통 어렵고 큰 일이 아니며, 더욱이 가짜 전도자들을 통하여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에서 예수 믿는 신자들이 생긴 것이야말로 그가 진짜 주의 종인 것을 명백히 밝히는 증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힐문하는 자들" 앞에서 이처럼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밝힌 후에, 이어서 바울은 그 사도직에 따라오는 당연한 권리 하나를 그들에게 "발명" 즉 답변해주고 있는데 바로 3절 이하 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주의 형제들"이란 야고보 등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권"이나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란 사도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보통 사람들처럼 의식주의 생활이나 결혼 생활할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 자신도 다른 사도들처럼 "일하지 아니할 권"이 있다는 말은, 어떤 직업을 가지지 않고 단지 교회를 통하여 물질적으로 사례를 받아 생계를 꾸려나갈 권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군인이 "자비량" 즉 식량이나 군비를 스스로 충당하면서 근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농부나 목자가 자기 밭이나 목장에서 얻은 산물을 "먹는" 권리가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쓰시는 '군사'요 '농부'요 '목자'된 사도들 역시, 교회로부터 물질적인 대가를 받을 권리가 당연히 있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 논리가 비단 "사람의 예대로" 즉 일반 사회생활의 관례에만 따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율법도" 역시 분명히 확증해주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8절부터 12상반절까지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a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라고 기록된 내용이 그것입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은 신명기 25장 4절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타작을 시키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 굶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짐승도 일을 하고 나면 먹이를 받아먹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신령한 것을 뿌리는" 복음 전도자들이 "육신의 것"을 받는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사도들)를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라고 바울은 재차 강조했습니다.
  나중에 13절에서 밝히듯이 "성전의 일을 하는 자들"과 "제단을 모시는 자들"이 그 성전에 바쳐진 제물들과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 역시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구약 시대 때부터 지켜져 온 자연스러운 관례였던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 또한 꼭 같은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 7절에서 주님께서도 칠십 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4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잘라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명하셨느니라' - 간단히 말해서 교역자에 대한 사례나 전도자들에 대한 물질적 후원은 바로 예수님의 명백한 명령이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8장 21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헌금인 십일조의 용도가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하여 쓰이도록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교회 재정에 있어서 교역자의 사례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결코 목사의 욕심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정해놓으셨다는 것을 꼭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 15명의 세례교인이 모이면 교회 창립을 할 수 있도록 정해놓은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열 가정 정도의 십일조만 합쳐도 한 사람의 평균 수입은 되니까 그것으로 교역자의 생활 문제는 일단 해결되는 것이고, 나머지 헌금들로 교회 운영을 맞추어나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원로목사님께서 옛날에 미국에 있는 본교단의 어느 교회 창립예배에 설교하러 가셨다가, 그 교회가 아직 담임 목사의 사례를 예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을 아시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개척교회이기는 했지만 벌써 교인들이 칠, 팔십 명 모이고 재정적으로 이미 기반을 잡아가고 있던 교회인데도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창립예배 전날 저녁인가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원로목사님께 "목사님, 우리 교회는 정말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자랑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원로목사님께서는 "교회 집사들이 담임목사 사례도 정해놓지 않고 교회가 잘 되어간다고 말하다니, 이게 뭐가 잘 되어가는 교회입니까?"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물론 그 교회는 당장 담임목사의 사례를 결정했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형편이 약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개척교회 할 때에는 목사 사례는 교회 재정의 우선순위에서 몇 번째 뒤로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들이 진짜 문제인 것입니다.
  목사가 다른 직업을 병행하거나 사모님이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사례를 받지 않고서 목회를 하는 것을 뭔가 더 순수하고 고결한 일처럼 여기는 것 - 이것은 아주 빗나간 사고방식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목사가 직접 돈벌이 하게 되면 기도할 시간, 말씀 준비할 정성이 어쩔 수 없이 나누어지기 마련이며, 목사가 생활에 구차해지면 아무래도 영적으로 힘을 쓰는데 방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전투원과 보급부대를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운영하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목사가 "육신의 것"을 스스로 얻으려고 바쁘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신령한 것"을 뿌리기 위하여서만 바빠야 하겠습니까?
  목사에게 있어서 스스로 부업을 가지고 돈을 벌어서 교회 재정의 부담을 줄이는 것과 그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믿게 하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하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일전에 우리교회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파송한 어느 선교사님께서 주일밤예배 설교 중에 간증하신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그 어려웠던 IMF 시절에 타교단에서는 선교사에 대한 지원 역시 줄어들거나 중단되는 일이 빈번했지만 경향교회에서는 잠시도 중단되지 않고 매달 꼬박꼬박 선교비를 보내어주는 덕분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감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급부대의 당연한 역할이요 책임인 것입니다.
  이처럼 비단 본교회의 교역자들의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질 뿐 아니라 하나라도 더 많은 개척교회 목사들을 지원하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선교사들을 물질적으로 완전히 후원함으로써, 바로 그 전도자들을 통하여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이 구령사역을 더욱 흥왕하게 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전도자는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하는 전투의 사명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12하반절에서 14절 말씀에 "12b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로서 당연히 받을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재삼재사 강조해왔던 바울은 여기에 와서는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교회로부터 일정하게 정해진 사례를 받지 않았던 것을 뜻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사도 바울은 '장막 만드는'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부업으로 삼아 자기의 전도여행에 드는 비용을 스스로 충당했었습니다.
  물론 빌립보교회 등 물질적으로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을 꾸준히 후원한 지교회도 분명히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재정적으로 약한 개척교회들이 대부분이었고, 사도 바울이 전도하러 다닌 지역은 주로 아직 교회가 하나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지원을 받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물질적으로 후원을 넉넉히 받지 못했던 것은 분명히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범사에 참는" 자세를 지켰던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하는 이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로부터 정식 사례를 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사도 바울의 사명에 대한 책임과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물질의 부족함과 생계의 어려움은 적어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복음사역을 중단해도 될 변명은 결코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15절부터 18절에 기록하기를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17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18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즉 '내가 무슨 선교헌금 더 받고 싶어서 이런 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정말 자기의 진심을 알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는 말은, '나는 내가 대가를 받지 않고 복음 전하는 이 특권을 잃느니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사도들에게 물질적으로 후원해야 마땅하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주신 명령인 까닭에 사도 바울은 그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혹 그것을 빌미로 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이처럼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의 동기와 목적은 물질 그 자체와는 전혀 동떨어진 데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복음 전파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시키셔서 하는 일' 즉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까닭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말로 하자면 '사명의식'입니다.
  만약에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으로, 즉 직무 유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내릴 것이라고 벌벌 떠는 마음 하나로 바울은 그 사명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라는 말은,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나는 보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에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 일을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사역에 대하여 물질적인 보수의 '상'을 바라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다른 "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함"으로써 얻게 될 상이라고 했습니다.
  즉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한 전도자에게 주어지는 진짜 상이란 그 수고하고 노력한 것과 정비례하는 물질적 사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앞에서 남겨져 있는' 상급이라는 말입니다.

  제보다 젯밥에만 신경 쓰는 것은 바로 세상 무당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사람 중에도 그처럼 '젯밥'만을 찾는 삯군들이 있습니다.
  교역자가 없는 작은 교회에 초청받아 가서 설교한 후에 사례 주지 않는다고 떠나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전도사가 오버타임 근무하는 만큼 교회에서 따로 수당을 받아야 한다.'는 따위의 요구를 주장하는 소위 무슨 전도사 협회라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미국 신학교의 실천신학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수님이 신학생들더러, 앞으로 어느 교회로부터 교역자 초청을 받게 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하여 항목별로 응답하는 숙제를 주셨습니다.
  그 질의 항목 중에 하나가 '교역자 사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난에다가 "사례는 초청하는 교회 쪽에서 정해주는 대로 받을 것이고, 만일 그것이 내 생활에 부족하면 다른 방법을 통해서 채울 수 있도록 강구해보겠다."고 썼습니다.
  나중에 교수님께서 되돌려주신 평가란에 보니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문제에 대해서 수업시간 중에 잠시 토의가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미국 신학생들은 저와 교수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런 학생들의 주장은 어떤 교회에서 초청받을 때 목사 쪽에서도 자기가 요구하는 사례 액수를 밝히고 그것이 분명해진 후에 수락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에 가서는 교수님께서 "우리의 사명은 돈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잘라 결론을 내리시기는 했지만, 그처럼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신학생들까지도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신학생들이 목회에 나서기 전에 사례부터 신경을 쓰고 목사가 은퇴할 때를 대비해서 축재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이미 '삯군'일 뿐이지 결코 '사명인'은 아닙니다.
  전투원은 삼 세끼 주는 대로 먹고 오직 전투에만 전념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아니하고 보급품이나 몰래 모아두었다가 제대할 때 한 밑천 만들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 부대가 그 전쟁에서 어떻게 될지는 뻔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전도자는 교회 앞에서 보수를 요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인들에게 복음 전도자들의 생계를 지원해야 할 책임을 분명히 주셨다는 사실만은 정확하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일단 교인들에게 그들의 책임을 가르치고 나면, 자신은 더 이상 사례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고 이제는 그저 자기 쪽의 책임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로목사님께서 언젠가 고려신학교 졸업예배 설교 시간에 "목사는 직업(job)이 아니라 사명(vocation)입니다."라고 외치시던 말씀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철칙이며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강력하게 만드는 지극히 정당한 직업윤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목사라는 직분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는 '돈 벌기 위한 직업'이 결코 아니라, 당장 굶어 죽더라도 '부득불 해야 할 사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이런 복음의 사명인이 계속 배출되고 우리 경향의 '별들의 모임'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소명인'들이 계속 자라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후원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2차 대전 때 연합군의 승리 요건 중에 하나가 '2.5톤 군용 트럭'을 이용한 보급 수송의 효율성에 있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패턴 장군은, 보급부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고 그래서 그 관계자들의 공훈을 치하하여 훈장을 주면서 "전투대원의 무기는 소총이지만 보급대원의 무기는 2.5톤 트럭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보급부대의 표어가 '육군이 돌아가게 만들자'(Make the army run.)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전쟁을 할 때에 직접 총 들고 싸우는 전투부대에 속한 인력보다도 보급을 비롯한 여러 방면의 지원부대에 속한 인력이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 지원부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야만 전투부대원이 총 한방을 더 쏠 수 있게 되고 적군 한 명을 더 무찌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결국 육군 전체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 선교사, 신학생 등을 교회와 성도들이 후원하는 것도 꼭 같은 원리입니다.
  전자는 전투부대이고 후자는 지원부대입니다.
  목사는 혹 보급이 딸려도 계속 복음전파의 전투를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만 하고, 교회는 그 전투원들의 식량과 탄약이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지원을 해야만 합니다.
  이처럼 각자 맡은 분야의 책임에 충실할 때, '전투하는 지상교회'는 제대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원칙은 사실상 양자에게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교회가 살게 될 것이고, 그렇게 교회가 살아 있어야 교인들 역시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투대원이 총을 쏘지 아니하고 식량을 찾아 헤매게 되면 그 전쟁은 질 수밖에 없으며, 부급부대원이 자기만 먹고 살겠다고 전투대원을 지원하지 아니하면 결국 자기도 적군에게 죽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헌금은 사회사업이 아니라 오직 복음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되어야 하며, 빈민을 구제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전도자들을 후원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마땅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라의 경제는 계속 불경기에 허덕였고 대부분의 교회들 역시 재정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의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주셨고 또 경향의 성도들 역시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정성껏 헌금을 바침으로써 경상비의 예산을 넘는 흑자의 결산을 내게 된 것은, 또 하나의 큰 감사 제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 경향교회는 비단 본교회 교역자들뿐 아니라 40개 개척교회의 전도자들을 지원했고 28명의 본교회 파송 선교사들을 포함한 총 58명의 선교사들을 직접, 간접으로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교회를 통하여 바친 헌금이 2006년에도 이처럼 많은 전도자들을 먹이고 입혔으며 바로 그 때문에 이들은 복음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 경향교회의 교세증가가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교단의 많은 개척교회들이 더욱 든든히 서 가고 또한 선교지의 교회들을 통하여서 기적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하라'는 각자의 사명을 수행한 결과 함께 거두게 된 자랑스러운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전도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도록' 후원하는 사명을 다하는 지원군들이 됨으로써 그런 든든한 보급을 받고 '복음을 값없이 전파하는' 전도자들이 거두게 될 승리를 함께 나누는, 연전연승하는 교회의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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