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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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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국 방송사에서 공개적으로 퀴즈 문제를 내었습니다.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답을 엽서로 보냈습니다.
어디까지 자동차를 타고 가서, 어디까지 기차를 타고, 어디서부터 버스를 탄다.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려 택시를 탄다. 아예 헬리콥터로 날아간다.
그런데 그 중에 일등으로 당첨된 것은 이런 답이 아니었습니다.
일등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여행한다.”였습니다.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공간이 시간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이 퀴즈에 의하면, 사랑이 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순간적으로 시간을 벗어나게 합니다. 영원의 세계로 빠져들게 합니다.

만추의 계절입니다. 이 맘 때면 사람들은 사랑을 찾습니다. 추운 계절을 따뜻하게 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falling in love의 경험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정신분석전문의, 김혜남 박사가 “나는 너를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라는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분석을 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질 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필이 꽂혀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혜남 박사는 모든 사랑은 다 조건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움직여 조건적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혜수씨. (물론 가명이겠지요.) 29의 나이에 직업은 의상 디자이너. 그녀는 성실하고 의욕의 많아 의류 업계에서 성공했습니다. 너무 바빠 연애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같이 입사한 남자 동료와 친해지면서 사랑을 쌓아가고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결혼 날짜가 다가오면서 자꾸만 불안해졌습니다. “이게 정말 사랑일까?”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 사랑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심란해 하는 그녀를 동호회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구석에 조용히 술을 마시는 왠지 슬퍼 보이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난생 처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의 말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이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가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도 가슴이 시려왔습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어하는 그녀가 어느새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만나, 사랑에 빠져, 파혼을 하고, 그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열등감이 많아 콤플렉스가 작용하면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두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조용하고 슬프게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 그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니, 내가 저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단 말인가?’
힘든 결혼 생활을 참다못해 혜수씨는 상담가를 찾았습니다. 상담을 받는 도중 그녀는 스스로 남편의 모습 속에서 예전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외항 선원이어서 자주 집을 비웠습니다. 아버지는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고 동료들과 힘들게 부대끼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조용히 슬프게 술을 마셨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했지만 정작 아버지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술을 자시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김혜남 박사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혜수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히 술 마시는 남편의 모습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래서 한 눈에 남편에게 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던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남편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운명적 사랑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조건적 사랑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으나, 인간의 사랑에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너무 자기 사랑의 측면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살도록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난 후 인간의 사랑은 너무 변질되었습니다. 자기애적 요소가 너무 강합니다. 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도 사랑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율법의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나”(마 22:37-40)

저는 20대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오래 걸렸습니다. 30대 때는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며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잘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잘 안되었으나 노력은 했습니다. 이제 저는 40대입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끔 주께서 묵상 중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보다 신학을 더 사랑하는 구나. 신학이 너의 우상이구나. 너는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구나. 교회가 너의 우상이구나. 그러면 저는 화들짝 놀랍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의 요즘 묵상의 주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까?’입니다. 아직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나처럼 사랑에 무능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나? 참 고민이 됩니다.
그 날도 저는 운전을 하며 찬송을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사거리에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핸드 브레이크 채우고, 눈을 감고 습관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찬송 가사에 그런 내용이 있었어요. 그런데 문뜩 이런 생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뭐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저는 신앙에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 어떻게 사랑받고 싶으세요?’ 물론 항상 대답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성경 말씀을 찾아봅니다. 그 후, 제게 생각난 말씀은 요한복음 21장 15-18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가 6명의 다른 제자들과 함께 디베랴 호수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 말씀대로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고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듯이,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사랑은 우상에 대한 거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랑에 대한 과격한 거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번에는 비교의 대상이 없습니다. 그냥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말 그대로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지식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제게 주신 지혜를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업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 자체,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세 번째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 번째 질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아가파오 동사를 써서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필레오 동사를 떠서 필레오 사랑밖에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필레오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필레오 사랑을 하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 세 번째 질문과 대답이 참 좋습니다. 필레오 사랑이 참 마음에 듭니다. philosophy가 무엇이지요? 예,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philharmony는 음악에 대한 사랑입니다. philanthropy는 인간에 대한 사랑 즉 박애 정신입니다. 마찬가지로 philotheos가 가능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의 차이는 알겠지요?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이지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사랑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아가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감히 하나님을 아가페 사랑을 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필레오 사랑은 친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친구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마음을 나누고, 뜻을 나누고, 경험을 나눕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친해집니다. 친밀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이 정도의 필레오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에 대해 필레오 사랑은 할 수 있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필레오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을 필레오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도 우정이 싹 트고, 사랑이 생기면, 자꾸 마음이 끌립니다. 그 친구 잘 있나 궁금해집니다. ‘열아홉 순정’에서 국화씨에게 한 남자가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나도 몰라. 자꾸 생각나는 것을 어떻게 하냐? 밥은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자꾸 걱정되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냐?”
나는 하나님 생각이 잘 나지 않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분 계십니까? 그런 분들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는데, 나는 하나님을 잊고 있으니 참 미안하지 않습니까?

둘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옆에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계속 붙어 있고 싶어하잖아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배지요. 혼자서도 예배 드리는 삶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시46:10).

셋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주께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하는 사역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구의 부탁을 거부할 친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때는 친구가 부탁하지 않아도 친구가 기뻐하는 일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당회에서 결의하고 추진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구제 사역과 기독교 인재 양성 사역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못해서 한이지, 신앙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만한 일입니다. 예배가 본래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섬기는 ‘아바드’라는 말에서 나왔어요. 주일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미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부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높은뜻 숭의 교회 사역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감당합시다.  (송인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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