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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강절]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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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 절기로 대강 절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에서 거슬러 올라가 네 번째 주일부터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계속되는데 이 절기는‘그리스도가 오셨고, 오시고 있고, 오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대강절'의 어원은 ‘옴‘도착’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유래했으며 직접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약한 자의 위로가 되시며 능력이 되십니다.
병든자의 치료자가 되시고 절망하는 자의 소망이 되십니다.
모든 막힌 담을 허시는 화평이십니다.  슬퍼하는 자에 기쁨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평화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평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소망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합니다.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하며 세상도 병들었고 사람들도 병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오심이 절실해집니다.
오주님 우리의 상한 심령 저 깊은 곳까지 오시옵소서. 낙망하는 이들 가운데 오시옵소서. 이 땅 절망이 가득한 이곳에 어서 오시옵소서.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을 묵상해보면 분명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낙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를 기록하고 있는 시인은 깊은 상실과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가 낙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세 가지 이유로 낙망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현실 앞에서 낙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지난날의 부귀와 영화는 모두 사라졌습니다.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마저도 그를 버렸습니다. 그가 처한 현실 앞에서 시인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낙망하며 불안하여 떨고 있습니다.
시인은 9절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둘째, 그는 자신의 무기력함 앞에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그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에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고 따르던 사람들도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원수들은 뼈를 찌르는 칼 같은 조롱으로 시인을 낙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10절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셋째, 그는 과거와 오늘을 비교하면서 낙망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부귀와 영화가 있었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에 부칩니다. 과거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벗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며 영적인 충만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도 없고 함께 기쁨으로 찬양할 벗들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눈물로 오히려 음식을 삼고 있습니다.
3절“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절“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시인은 지금 이렇게 힘겨운 현실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며, 과거를 회상하면서 낙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낙망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낙망케 하는 절망의 상황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42편의 포인트입니다.

분명히 낙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낙망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바라라’ 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인의 낙망이 오늘 여러분들의 낙망임을 압니다.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함 앞에서, 과거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낙망이 크십니까? 얼마나 많이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괴로우십니까?

요즘 익산에서 발생한 조류 인프루엔자가 고병원성이라는 것 때문에 발생한 지역에서부터 3키로 내에 모든 가축들을 살 처분해야 한다고 합니다. 평생을 쌓아온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절망적인 상황을 감당해야만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닥쳐온 뜻하지 않은 질병의 문제로 인하여 낙심되고 힘들어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생업의 문제로 허덕이며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며 낙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보려고 애써보지만 세상은 더욱 강팍하고 불법과 부정의 유혹 앞에서 갈등하고 낙망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잘해 주리라 믿었던 자녀들의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 당황하고 어떻게 자녀들의 문제를 풀어가야 할 지 몰라 답답한 심정으로 낙망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갈등과 어려운 문제들로 마음이 상하고 아파합니다.
쉽게 넘길 수 있는 말에도 상처를 받아 아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사실 삶 자체가 절망이고 낙심할 만한 것들로 가득한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낙망에만 붙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낙망의 상황이 분명히 있지만 낙망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낙망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42편은 낙망하며 절망의 깊은 수렁에서 힘들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헬렌켈러 여사는 자기의 글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닫힌 문만 바라볼 뿐 열려진 문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혔다면 또 다른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또 다른 행복의 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함같이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찾고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함으로 우리는 절망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46편에서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융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아니하리로다.”(시46:1-3)

절망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낙망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처럼 하나님을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낙망할 수 밖에 없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눈물과 한숨이 일어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의 패역함과 무지와 불신앙에 낙망하였을 때 시내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할 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의 낙망함을 넘어서 한나는 하나님의 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갈망하였을 때 그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열 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으며 낙망의 삶을 살았던 여인이 주님을 갈망하며 주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를 묶고 있었던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딸의 아픔으로 고통 받는 이방의 여인이 주님 앞에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하나이다. 하면서 주님을 갈망하였을 때 딸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 하나님으로 인해 새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힘과 능력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시맨즈의 글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심장 절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수술을 받기 전날 멋진 간호원이 내 병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나에게 꽉 잡아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간호원이 참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그녀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당신은 당신의 심장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직 기계의 도움에 의해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당신의 심장 기능은 다시 정상으로 움직이고 당신은 마침내 회복실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약 6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일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못하고 심지어는 눈을 뜨고 싶어도 뜨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당신의 의식은 완전한 가운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들어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비록 당신이 어찌할 바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빠질지라도 당신이 내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간호원이 내게 말해주었던 일들이 나에게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내 손을 잡아 준 간호원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어려움을 경험하는 동안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서도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 임재해 주실 것이란 약속은 그분이 가르쳐주신 보혜사란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이름처럼 지금도 고난과 슬픔에 싸여있는 우리의 손을 잡고 위로와 소망을, 그리고 힘과 사랑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버리지 않으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책임져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40편에서 시인은 절망의 수렁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받았던 은혜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1-2절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낙망하는 이들이여 진정한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 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2)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란 것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십니다. 그리고 그 도움은 확실한 것입니다. 신뢰할 만하고 믿을 만한 도우심인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고백이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림절의 첫 주일 제단에 밝힌 첫 번째 촛불의 의미는 기다림과 소망입니다. 이제 곧 기다림과 소망의 빛이 여러분 가운데 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낙망하는 가운데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사슴처럼 하나님을 갈망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낙망을 넘어서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곧 소망의 빛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낙망하는 심령 그 깊은 곳까지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가운데 자녀 가운데 힘겨운 삶의 자리마다 소망의 빛이 임할 것입니다. 소망의 빛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행복의 문이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하심이 함께할 것입니다. (이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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