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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시도 은혜입니다 (고후 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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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제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태어났기에 이른 아침에는 항상 아버님께서 잡아온 생선으로 회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각종 싱싱한 회를 아침이면 먹곤 하였는데 어느 날 저는 그만 새꼬시로 만든 생선회를 먹다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생선만 보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할머님이나 아버님은 그 생선뼈가 맛있다면 가운데 큰 뼈를 제외하고는 회를 만들고 그리고 큰 뼈는 찌개를 만들어 드셨습니다. 생선 가시 뼈로 인해 회를 먹지 않자 저만 특별히 모든 작은 가시마저 제거한 회를 만들어 주셔서 오랫동안 뼈 없는 생선회를 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크게 되자 작은 생선 가시가 있는 회가 건강과 영양 면에서 좋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또 한 가지 고민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계속남아 있으면 어떡하나 하고 두려워했는데 생선을 먹다가 목에 가시가 걸리게 되면 보통 된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은 다음 씹지 않고 꿀꺽 삼키곤 하는데 그리 쉽게 내려가지를 않습니다. 흔히 밥을 쌈 싸서 안 씹고 꿀꺽 삼키라고 하는데, 그러면 요행히 가시가 내려갈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박혀버릴 수도 있습니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럴 때는 달걀 하나를 깨어 꿀꺽 마시거나, 식초 물로 몇 번 입안과 목을 헹구면 가시가 내려갑니다. 이렇게도 제거가 되지 않으면 이비인후과에 가거나 숟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핀셋으로 꺼내야 합니다. 그러나 큰 가시가 아니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몸속에 나오는 가를 녹이는 효소인 산이 가시를 녹여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세 사람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답니다. 물론 우리 인생은 죽으면 염라대왕이 아니라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염라대왕은 한국에서 잘못 표현한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재미있는 이야기로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염라대왕이 이 세 사람에 대한 죽음의 명부를 뒤적거리더니만 하는 말이 “너희 세 사람은 아직 올 때가 안 됐는데 죽음의 사자 실수로 그만 사람을 잘못보고 데려왔으니 미안하게 되었구나! 이미 장례식까지 치룬 처지라 되돌아갈 수는 없고... 별 수 없이 다시 태어나야겠구나. 그 대신에 너희들의 소원 한 가지씩은 들어주마. 그러니 무엇이든지 말해 보도록 하라.”고 하더랍니다.

이에 한 첫 번째 사람이 대답합니다. “나는 한평생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하면 지긋지긋 합니다. 그러니 다시 태어나게 되면 부자로 태어나게 해 주십시오.” “오, 그래? 그렇게 해주마.”

두 번째 사람이 대답합니다. “저는 상놈으로 태어나 종으로 한평생 학대 받으며 살았습니다. 이제 다시 태어나게 되면 양반으로 태어나 권세 좀 누리게 해 주십시오.” “오, 그래? 그렇게 해주마.”

이제 끝으로 세 번째 사람이 대답을 합니다. “저는 돈도, 권세도 다 싫습니다. 단지 경치 좋은 곳에서, 아름다운 아내들을 거느리고, 많은 자식들을 두고, 근심 걱정 없이 무병장수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니 염라대왕 왈, “예끼 이놈아! 그런 좋은 곳이 있으면 내가 가겠다.”라고 하더랍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진정한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경제연구소에서 ‘세계 나라 중 어느 나라가 가장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는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영국 사람들이 가장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영국 사람이 25%, 프랑스사람이 16%, 일본과 독일이 13%로 나타났습니다. 100% 행복한 나라, 100%만족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처음에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시 서독에서 동독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서독 역시 사람 사는 곳이요. 그곳에도 여전히 문제는 있고, 고통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가사는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유진영에는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란 얘기였습니다.

자! 보세요. 저 사람은 나 같은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누구에게나 그 나름대로의 문제는 다 있는 법입니다. 지구상에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불행이 어디 있는 고 하니? 가시 없는 세상을 바라고, 문제없는 환경을 원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가시와 더불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는데 불행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중 한 사람이 바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델링이 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 부터 희한한 능력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9:11~12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은사를 체험하였고, 성경을 기록한 영감과 영력이 있는 바울에게도 항상 문제가 있었고,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겠습니까? 가장 확실한 육체적 질병을 소유한 그는 간질병.’, ‘위장병’ 또 는‘안질'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씨름합니다.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가시를 대하는 생각이 달라지고 자세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왜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가시가 필요 했던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그 가시를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 가정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있어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몇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즉 가시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처방입니다.' 오늘은 가시가 주는 교훈을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따라합시다. "가시도 선물로 만족하게 여기겠습니다. 가시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1. 교만하지 않게 합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반 절에서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자고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십 사년 전"이라는 말을 사용한 바울은 매우 오래 전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특히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함으로써 증언의 신빙성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체험과 '받은바 은혜가 너무 크므로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고’라는 말은 교만이라는 말보다 강도가 높은 말입니다. 즉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서신서들을 통해서 볼 때에 바울은 끼가 많은 사람입니다. 교만기가 많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는 환상과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남들이 하지 못한 체험을 가진 사람입니다. 삼층천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의 자라온 배경이나 그의 학문이나 지식 그리고 그의 열심 있는 헌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리만큼 대단했습니다.

고후 11:23절에 보면,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다”고 나옵니다. 그 앞뒤 전, 후 문맥을 살펴보면 대단합니다. 내가 내가 내가... 나도 나도 나도... 하면서 옛 버릇이 자꾸 나오고 있습니다.

빌 3장에도 보면, 자신의 지난 날 화려했던 경력이 또 튀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시기에 그 교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허락하셨는데 육체의 가시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2절에 "한 사람을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오래 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이 있어, 자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나'라는 말 대신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랍비적 표현법이 영향이었거나, 또는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은 다 용납해도 딱 한가지만은 용납 못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세요? 교만입니다. 교만한 자는 철저하게 대적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울을 사랑하셔서 그를 선택하여 왕을 삼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할 때 여지없이 그대로 내려 치셨습니다. 교만한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이런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래 그가 좀 곁길로 나가려고 할 때에는 가시가 찌르고 고통을 줍니다. 그래 다시금 제 페이스를 잃지 않고 바른 길로 걷게 하셨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시를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세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1~6절까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겸손해져 있는가를..., 삼층천의 신비한 체험을 소개할 때에도 혹시나 교만해 질까 해서 분명히 자신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라는 3인칭을 아주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안다. 한 사람을 안다. 그가 올라갔었다.’는 식입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십자가 뒤에 감추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가시가 주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에게 가시가 없었더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빌톨 프랭크'라는 유태인 정신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600만 명이 죽은 나치의 수용소 가스실에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그가 살아나온 후 한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중심적인 가치가 있으며 그 중 가장 첫째 되는 가치는 경험적인 가치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누가 어떤 경험을 하든지 그 경험을 버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뼈저린 아픔의 경험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진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어느 부분에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문제는 어설픈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조금 가시를 체험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졸부들이 문제입니다. 또 어설픈 운동자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데 아주 깊어지면 문제가 없고 탈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당한 가시로 느낀 큰 고통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충분히 익고 성숙한 참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가시를 통해서 교만했음을 깨닫고 겸손해 지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께서 흥왕하며 회복하게 하시는 은총을 국가적으로 사업적으로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줍니다.

본문 9~10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고백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의 뜻은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으로 주님의 응답은 나타났습니다. 9절 전반 구절에 "이르시기를"에 해당하는 '에이레겐'은 최종 판결문에 쓰이는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상당히 선언적이고 종결 적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매우 친절한 거절'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만족해야 했습니다.

많은 주석 학자들이 바울의 이 육체가시에 대한 '가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콜롸스'는 '가시'라는 말 외에 '파편', '말뚝'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가시를 육체에 지닌다고 할 때 이것을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적대자로 보거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 주장 보다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갈 4:13-15)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17:14-18;행 9:9;갈 4:14).

이 밖에 참고로 바울이 '복음을 위한 유대인 동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와 '언어의 장애'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근거로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첫 인상이 나쁘고(갈 4:13) 외모나 언변이 보잘것없다는 것을(10:1, 9-11;11:6)언급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즉, '바울에게 어려움과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그 가시가 바울에게는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훈련이 가혹한 법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적당히 넘어가지 않습니다.

미국의 '록펠러'가 얼마나 큰 부자입니까?돈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손자 '데이비드 록펠러'가 후에 맨해튼 은행 총재가 되었는데 그가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훈련이 얼마나 완고했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할아버지 록펠러는 손자들에게 한 주에 25센트씩 용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돈으로 400원씩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돈을 용돈으로 주고는 그 중 10%는 적금하고 10%는 자선을 위해서 반드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토요일 저녁마다 돈을 어떻게 썼는지 그 내역을 일일이 계산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봐서 잘 썼으면 5센트를 더 주고 잘못 사용했으면 5센트를 줄였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손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더 강하고 더 무섭게 훈련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가혹할 수 있고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셨기에 그를 3층천으로 이끌고 가셔서 그 나라의 모습을 모두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만해질까 봐서 그 몸에 가시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게을러질 때마다, 교만해지려 할 때마다 하나님은 사정없이 그 몸속의 가시를 움직여서 고통스럽게 하심으로 교만의 싹을 미리 잘라냈고 게으름의 근본을 잘라내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막 살아가는 것이 육신적으로는 훨씬 더 편할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편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간섭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런 하나님게서 주신 은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은혜'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본 구절에서의 '은혜'는 그가 사도가 되고, 또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고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줄 믿습니다.

고전 1:27절에 보면, “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이고, 사람들 보기에는 약하게 보일런지 모르나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분히 여기에는 교육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 가장 미련하고 비천해 보이던 사람들이 누굽니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들 아닙니까? 예루살렘 지도층에 비하면 무척이나 어리석고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선택 하실 때 예루살렘의 부유한 지도층에서 선택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사회적으로 우습게 보였던 무식한 어부들을 선택하셔서 제자들을 삼아 주셨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의 하시는 행동을 보아서는 얼마든지 예수를 따를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무식한 사람들하고 같이 있다는 것이 저들로서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들 하고 다니면 자신들의 스타일이 구겨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트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공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는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대낮에 찾아가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가 두려웠습니다. 그래 비겁하게 밤중에 몰래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그를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그것도 알지 못 하느냐?는 식의 꾸지람입니다.

어찌되었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가시와 함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다음을 보면, 뭐라고 고백하였습니까? 이제는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임을 깨닫게 되니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졌습니다. 그의 '육체적인 가시를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그 약점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9절 하반 절에 보면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고자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약점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시중에는 '성공의 비결'과 더불어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책자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실패담보다는 성공담에 대한 책자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를 읽어보면, 하나같은 공통점이 발견이 됩니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약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점들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약점으로 인하여 위대하게 되었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유럽 국가 중??'네델란드(Kingdom of The Netherlands)'는 국토의 상당 부분이 바다의 수면보다 낮은 절대 불리한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큰 제방을 쌓아서 농업을 발전시키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282km, 동에서 서로 176km 뻗어 있는 이 나라는 북쪽과 서쪽으로는 북해, 동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벨기에와 접하고 있으며 약 7,464㎢의 내수(內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2세기 이래로 육지면적의 약 1/5이 바다의 간척사업을 통해서 얻어졌으며, 증기, 디젤, 전기 펌프들이 풍차를 대신하여 간척지(바닷물을 제방으로 막아 만든 평지)의 배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는 제방이 무너져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후 더욱 견고한 제방을 쌓고 약점을 극복하므로 오늘의 네델란드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이라는 책을 보면 눈먼 여인이 어느 목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받아서 눈을 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이 수술을 받고 생전 처음으로 눈을 뜹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밝은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얼마나 밝고 아름답고 광채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 맑은 하늘, 밝은 햇살, 아름다운 자연, 꽃들, 이 여인은 감탄하고 또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길거리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깜짝 놀랍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밝은 세상에 살면서, 저 맑은 하늘을 보면서, 저 밝은 햇살 아래 살면서 저렇게 수심이 가득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 사람들이 근심이 가득한 채 살아가고 있을까 하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나는 세상 사람들의 얼굴이 저렇게 근심이 가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약점 때문에 더 이상은 괴로워하지도,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나의 약점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약점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들을 불러 쓰신 것이 아닙니다. 약점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약점 때문에 오히려 잘된 경우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가시를 통하여 얻은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3. 기도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8절에 바울은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이라는 숫자는 일정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자적 의미의 세 번을 뜻할 수 있습니다(막 14:32-42).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질고를 벗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생각 같아서는 형통한 날에 기도 더 열심히 할 것 같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저는 운전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고의 현장을 보거나 장면을 많이 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고속도로 상을 달리다 보면, 대형 사고를 어쩌다가 목격합니다. 그럴 때면 ‘아이쿠! 나도 조심해야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나옵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나도 달리면 저렇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조심스럽게 운전합니다. 그래 100키로 이상을 놓고 신나게 달리다가도 그 사건을 목격하고는 나도 모르게 70~80 킬로로 속도가 뚝 떨어집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운전자들이 모두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얼마를 가는지 아십니까? 10분에서 20분을 못가서 주변의 차들과 저도 다시 속도를 올려 달립니다. 인간은 모두가 이렇게 간사합니다. 조금 지나니 무감각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간사한 것이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기도 안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가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귀머거리들에게 알아??듣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가까이 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시는 수단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에게 기도한 것은 질고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사53:4) '구체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거론하여 이것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하였는데 '거저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간구했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간절히 그리고 또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다는 얘기가 성경에는 없는데, 유독 여기서만은 예외 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선 그 고통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런가하면, 덕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 사도라고 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다가 입에 거품을 흘리며 간질병으로 쓰러져 보세요. 그가 전한 복음이 제대로 전달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도하고 설교를 하려고 하면, ‘당신이나 잘 믿고 건강하시오.’라고 이야기 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사업과 전도를 하는데 어려움을 당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염려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중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보니 오히려 "약한데서 강하여 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십시오. 그전까지만 해도 가문 자랑하고, 학벌 자랑하고, 배경 자랑하고, 뿌리 자랑하고, 백그라운드 자랑하던 그가 이제는 무엇을 자랑 한다고 했습니까?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은 기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위대한 마술사와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약점을 장점으로 만드시는 참으로 놀라운 창조자이십니다. 프리즘이 무색의 햇빛을 받으면 신기하게도 일곱 색깔의 무지개의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던지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으면 가시와 같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바뀌고 유익하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는 약점을 정점으로 만들어 위대한 인생을 산 바울의 진솔한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가시 같은 것이 박혀 빠지지 않아서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빼주시기를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그 가시를 빼주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이 대답은 바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약함으로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러므로 인생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약점을 바꾸어 장점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가시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육체의 찌르는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되고, 오히려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고, 가시로 말미암아 괴로울 때마다 엎드려 기도하므로 나의 영혼은 주님께 더욱 가까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가운데 503장은 '톱 레이디' 목사님이 작사하신 찬송입니다. 가사 중 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세상을 살면서 풍랑을 만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는 톱레이디 목사님은

1) 육체적으로는 폐병에 시달렸고,
2)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므로 가난과 고독으로 더불어 싸워야만 했고
3)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어려운 문제들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그런 가시와 같은 어려움 가운데 이 찬송을 작사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풍랑이 일어나면 목적지를 향해서 못가는 줄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풍랑이라도 돗대를 올리고 바람을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요,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여러 모양의 가시들에 대하여, 고난에 대하여 이제는 생각을 달리할 것입니다. 나를 미워해서도, 나를 저주해서도 아닌, 오히려 나를 아끼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 있음을 깨닫고 주님 앞에 한걸음씩 더 다가가는 좋은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은 ‘내게 꼭 필요하다’는 말씀 입니다.

이 가시는 네게 꼭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나의 겸손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도, 주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으로 당하는 시련을 신앙으로 잘 극복하시므로 더 큰 은혜를 힘입는 기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역설(逆說)적인 곳이 많습니다. 보통 상식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는 얘기 입니다. 언뜻 보면 상식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은데 실은 그 속에 엄청난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서 '역설적이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보십시오.

마태복음 23: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는 저마다 다 높아지기를 바라는데 낮아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겠습니까? 어디 그뿐인가요? ‘큰일 보다는??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21절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칭찬합니다. 마태복음 19:30절에는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막 10:31절)."고 하였으며, ‘상전이 되기보다는 종이 되라.’ ‘대접 받기보다는 먼저 대접하라.’ ‘얻기보다는 잃어 버려라.’ ‘영광을 얻으려면 십자가를 지라.’ 이 외에도 수 없는 내용들을 말씀하셨고 예수님 자신은 마가복음 10: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약할 때에 곧 강하게 됨이라.’ 이런 말씀들이 쉽게 이해가 되는 말씀 입니까? 그러나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보면 그것이 곧 진리요, 그것이 복음이요, 또한 십자가의 도가 역설적인 표현 속에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약할 때 곧 강하게 됨이라.’ 여기서 약하다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약함이 아닌 육신적으로 약하다는 얘기 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사단의 사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지고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왜 자신에게 가시가 있어야 했던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는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게 준 은혜가 족하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미스바교회 성도들도 이 세상 살면서 고통과 어려움과 상처를 주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을 때 원망하고 불평대신 바울이 고백한 신앙 따라합시다. "가시마저 하나님자세로 해석하는 방법을 통해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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