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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삶처럼 (창 41: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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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쇼팽은 꽤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폐결핵이 심해 항상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습니다.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고독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파티가 열렸는데, 친구들이 쇼팽이 들어서자 그를 놀라게 하려고 불을 껐습니다. 그들은 유령처럼 보자기를 쓰고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쇼팽은 말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그 방의 분위기를 즉흥곡으로 쳤습니다. 이 곡이 유명한“장송행진곡”이라고 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요셉의 삶이 마치 이와 같습니다. 요셉은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고난에 고난이, 역경에 역경이 겹쳤습니다. 이복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래도 환경을 탓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살아 권세 있는 주인집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억울하게 강간미수범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러한 기막힌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신앙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요셉의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은 그를 당시 최고의 문명국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삶의 일부분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살펴보므로 우리들의 삶의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一. 요셉은 내일을 예비하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7년간 계속 풍년이 들었을 때에 전국 곳곳에 창고를 세우고 곡물을 많이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7년 풍년이 지나고, 7년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는 선정을 펼쳤습니다. 애굽 백성들의 생명만이 아니라 주변 나라의 생명까지 살리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를 배신하고 애굽의 노예로 팔았던 형들과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가족의 생명까지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내일을 예비한 결과입니다.

삶이란 내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는 세상에 태어날 날을 준비합니다. 태어난 후에도 자라가면서 끊임없이 준비를 합니다. 유치원에 갈 준비, 초등학교에 갈 준비, 중학교에 갈 준비, 고등학교에 갈 준비, 대학에 갈 준비, 취직할 준비, 승진할 준비, 결혼할 준비, 내 집 마련할 준비, 그리고 노후 준비 등 이처럼 사람의 삶은 준비의 연속입니다. 이 준비를 소홀히 한 사람은 후회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겨울철입니다. 벌써 눈이 내리고 기온은 영하로 내려갑니다. 이 겨울을 넘기기 위해 모두 월동준비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언6:7-8) 하셨습니다. 겨울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무더운 여름, 가장 열을 많이 받는 검은 색 곤충 개미는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선진국 특히 미국 같은 나라는 우주시대를 대비하여 끊임없이 투자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달나라 여행을 바라보며 우주 정거장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이 꿈같은 우주여행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서 발생되는 수입은 엄청날 것입니다. 중력이 없는 우주공간에서는 희귀한 효소,  섬유광학물질 등 최소한 400여 종류 이상의 합금이 생산될 것이라고 미래학자들은 예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이렇게 준비하여 개인이 누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100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곳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 곳의 삶은 영원한 곳입니다. 그 곳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가난이 없습니다. 질병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습니다. 이 곳에 갈 수 있도록 예비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구주로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3:16)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영혼들이 가야할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마가복음 10:48-49) 하셨습니다. 이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하시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오리 새끼와 병아리를 호숫가에 갖다 놓으면 병아리는 물에 관심이 없는데 오리새끼는 물을 보자마자 호수에 들어가 헤엄을 치며 즐깁니다. 그 까닭은 오리는 헤엄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병아라는 헤엄치는 본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영생의 본능이 있습니다. 전도서 3:11에“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피조 물, 식물이나 동물이 갖지 않은 영혼이 있고 영생을 사모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있고 내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되면 모든 식물들이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요즘 같은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콩이나 옥수수나 곡식을 땅에 심으면 땅속에서 죽어 썩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 수십 배, 수백 배 열매를 맺습니다. 고린도전서 15:35-36에“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라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42-44에는“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비겁하게 도망갔던 사람인데, 맛모섬에  귀양 가서 천국의 놀라운 광경을 보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갔던 사람들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죽기까지 십자가와 부활과 천국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체포해 죽이던 사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죽기까지 십자가와 천국을 증거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1에“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9에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고, 내일 세상 종말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의 확고한 지위는 내 본향 천국에 있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로 우리 그리스도들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유랑의 장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11에는“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고향을 찾아가는“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가신 하늘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2:38~40에“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너희도 아는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하셨습니다.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를 위해 무엇으로 예비해야 할까요? 그것은 곧 경건한 삶입니다. 내일을 준비하십시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육신의 좋은 날을 위하여 부지런히 요셉처럼 내일을 준비하십시다. 더 나아가 영혼의 좋은 날을 위하여 요셉처럼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셉처럼 고난이 닥쳐와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二. 요셉은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구별했습니다.

30세가 된 노총각 국무총리 요셉이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을“므낫세”라 하였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에브라임”이라고 했습니다. 므낫세란 이름의 뜻은, 본문에 설명하기를“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51절) 라고 했습니다. 차자 에브라임란 이름의 뜻은,“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케 하셨다 함이었더라.”(52절) 고 했습니다. 요셉이 지어준 두 아들의 이름에서 요셉의 심중을 읽을 수 있습니다.

1. 요셉은 잊을 것은 잊으려 했습니다.

요셉의 나이 30세가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한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형들의 배신으로 노예가 되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죄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낸 아까운 세월이 1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지난날의 원한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그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권세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지난날의 모든 고난과 이복 형들에 대한 원한들을 잊고자 아들의 이름을“므낫세”라고 했습니다. 원한을 기억하여 미워하며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하셨습니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 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몹시도 배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언은 마지막으로 "물 한 모금이라도 좀 주십시오."라고 사정했지만 영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언에게 줄 물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인디언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에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깊은 산중에서 사냥개를 놓쳐 그만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이 산 속에서 헤매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배고프고 목말라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마침 그 때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언은 그의 딱한 사정을 보고 그를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안내하여 후히 대접했습니다. 그 신사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출한 인디언은 바로 얼마 전 자기가 박대했던 그 인디언이었습니다. 너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신사에게 인디언이 조용히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얼마 전에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쯤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지난날 실수한 것, 잘못한 것, 실패한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잘한 것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난날 잘한 것 자꾸 기억하면 교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립보서 3:12~14) 했습니다. 뒤의 일 즉 지난날의 것을 잊지 못하면 앞의 것, 좋은 것을 붙잡는데 큰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2. 요셉은 기억해야 할 것은 잊지 않고자 노력했습니다.

요셉은 고통 받는 땅에서 낳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에브라임”즉“하나님께서 창성케 하셨다.”라고 지었습니다. 이날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한 요셉의 다짐과 노력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요셉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반역 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이사야 1:2~3) 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짐승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기친 고마운 분들의 그 은공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 형제들의 도움, 스승의 은혜, 고마운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근원적인 큰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마시는 공기와 물, 밟는 땅, 쪼이는 햇빛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구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셨기에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잊지 않아야 할 은혜는 쉬 잊어버리고 잊어야할 원한은 잊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남긴 말 가운데“은혜는 물에 세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반역적 기억 작용”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타락한 그대로 내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요꼬하마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지진으로 20만 명이 죽고 25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즉시 구호품을 거두어 수송선 150척에 싣고 일본인 이재민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때 천황 히로히토는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장을 보냈습니다. 직접 붓으로 쓴 그 친서에는“일본인은 미국 국민에게 감사하며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불과 18년도 되지 않은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진주만을 공격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 신문의 한 사설 제목에 “일본인은 세계 인종 중 은혜를 가장 쉽게 잊어버리는 족속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반역 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이사야 1:2~3) 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잊으면 짐승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참으로 귀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힘들고 억울하고 괴로운 날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 어두웠던 날이 이제 다 지나가고 높은 권세가 주어진 영광의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권세를 남용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맺힌 원한은 잊고, 하나님의 은혜는 길이 간직하고자 아들들의 이름에 새겼습니다. 푸른 하늘같이 맑은 요셉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요셉의 인격과 신앙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익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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