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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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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유월절을 하루 앞둔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식사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 이야기를 보면, 거기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물항아리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죠? 결례라는 것은 청결하게 하는 예식, 세정식을 뜻하는 말인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외출하고 나서 돌아왔을 때나 식사 전후에 손발을 씻는 결례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먼지가 많은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이 손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는 위생상의 문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접촉한 부정한 것들을 제거한다고 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의식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목요일 저녁에 다락방에 모였을 때도 식사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손발을 자기가 알아서 직접 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에 가게 되면, 그 집에 있는 하인이 씻어주거나, 아니면, 지체 높은 손님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집에 왔을 때는 그 집주인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락방에 모였을 때는 특별히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해야 되는데,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제일 짠밥이 낮은 제자가 해야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도 발을 씻으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발을 씻게 되면, 자기가 제일 하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수석 제자니까, 제일 거드름을 피우면서 누가 빨리 자신의 발을 씻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그래도 우리가 제일 먼저 된 제자들이니까, 우리 '밑에 선'에서 알아서 기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래도 내가 세리였었는데...', 빌립은 '내가 그래도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무도 발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고, 섬김의 도를 직접 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시기 전에, 자신들이 직접 발을 씻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저 녀석보다는 내가 더 낫지." "저 친구보다는 내가 나이도 많고 경륜이 있지." "저 양반보다는 내가 그래도 많이 배웠잖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큰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수고하시는 그 수고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함으로 인해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해서 남편이 아내를 때려서 숨지게 하는 사건! 왜 일어납니까?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해서입니다. 사람을 붙잡아다가 팔아 넘기고, 인권을 유린시키고,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모든 일들이 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내 생명보다도 남의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긴다면 이런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인도땅은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 인구는 3%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이런저런 영향들이 있었겠지만, 간디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간디가 남긴 말 가운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왜 그런 말이 나왔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간디가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에도 영국 사람들은 간디를 혈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하고 무시했습니다. 간디가 버스에 탔을 때도 여기는 백인들이 타는 곳이지, 너 같은 인간이 타는 곳이 아니라면서 뺨을 때리고 버스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국 사람들은, 간디를 무시하고, 그를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지금 인도땅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선적인 종교를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말로는 사랑을 얘기하면서, 사람을 무시하는 이중적인 종교를 어떻게 참 종교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인도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2천 년이라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기독교인구가 3%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10억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고 하면 치를 떨면서, 그들은 힌두교의 신들을 섬기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태도가 별 것 아닌 작은 일 같지만,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이렇게 엄청난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겸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겸손이라는 말을 원어의 뜻을 살려서 해석해 보면, 『자신을 자기의 가치 이하로 낮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헬라인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도 많이 듣고, 겸손이라는 것을 좋은 미덕으로 여기면서, 겸손한 사람을 높여주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듯이, 그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있으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게 되니까, 어떻게든 자신이 보다 높은 사람으로 여겨지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본문 뒤에 있는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셨지만, 겸손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의 그런 놀라운 겸손함의 모습처럼, 너희들도 서로 겸손하게 살라고 권면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빌립보교회는 유대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계층, 여러 색깔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고,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이렇게 합시다!" 얘기를 하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또 자기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들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크고 작은 분란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 되는데,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틀린 사람들'로 이해를 했습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틀렸다는 것입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분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관한 가장 좋은 처방이 바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만 하면, 다툼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고, 교회 안에 일치와 하나됨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먼저는, 남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래도 내가 남보다 낫다는 그런 교만한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하고, 가진 재산이 많고, 많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아도, 모두가 다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이런 점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낫다고 하는 그런 자존감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위해서는 내가 남들보다 뭔가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비록 하나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다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한 때는 참 교만했었습니다. 교만할 것도 없는 사람이고, 겉으로 남들 보기에는 겸손한 척 하면서 인사할 때도 남들보다 더 고개 숙여서 인사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줬었지만, 속 마음으로는 '그래도 내가 남들보다는 낫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 교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엔 왜 그랬었느냐면, 예전에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는 제가 최고의 남자 전도사였었습니다. 저보다 더 잘하는 남자 전도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목사님이 두 분 계셨고,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 전도사님들만 계셨거든요. 전임 여자 전도사님이 두 분 계셨고, 교육전도사님 두 분도 모두 여자분이셨고, 남자 전도사는 유일하게 저 혼자였기 때문에, 저를 능가하는 그 어떤  남자 전도사님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상당히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의 교만이 하루 아침에 깨어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주일 오후 찬양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작은 체육대회 아닌 체육대회를 하게 됐습니다. 청년들도 많이 와서 구경을 하고, 꽤 많은 분들이 부부동반으로 같이 모여서 족구를 하게 됐는데, 저도 교역자팀 일원으로 족구시합을 하게 됐습니다. 저희 교역자팀에는 다들 치마 입으신 여자 전도사님들밖에 안 계셔서 목사님 두 분하고 저랑, 관리 집사님, 이렇게 4명이 팀을 이뤄서 족구시합을 하게 됐는데, 그런데, 사실, 저는 제 기억으로는 제가 족구를 처음해 본 것이 군대에 가서였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족구를 할 기회도 없었고,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처음으로 족구를 해봤는데, 처음 해 본 사람이 잘 할 리가 있겠습니까? 엄청나게 욕을 먹으면서 한 게임만 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는 제대할 때까지 한 번도 족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교회 옆 학교 운동장에서 족구를 했을 때가 태어나서 두 번째나, 세 번째 해 본 족구시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도 제 실력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공이 날아와도 제대로 받아서 살리지도 못하고, 어쩌다가 공격기회가 와도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실점을 하고, 서브를 해도, 네트에 걸리거나 경기장 밖으로 나가버리고... 그렇게 해서 그날 아주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고 나니까, 자존감이 그냥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 일로 인해서 한 달 정도를 꿈에도 그 일이 나오고 하면서... 하여튼 참 괴로웠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길을 가게 됐는데, 어떤 사람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뭔가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대놓고 욕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뭐 저런 기본도 안 된 양반이 다 있냐"고 하면서 온갖 욕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운동장에서 족구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그래도 저 사람은 나보다 족구는 잘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그렇게 욕을 하다가도 그래도 생각해 보면, '저 사람은 그래도 나보다 족구는 잘 하겠지. 저것은 저렇지만, 그래도 나보다 어떤 것은 더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내가 교만할 것도 없고, 남을 비판할 것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은 좀 나보다 못한 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보다 낫구나."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나은 자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먼저는, 남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기본적인 작업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분명히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자꾸 찾아내고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을 하지 못해서,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 안한 젊은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그럴 수 있을 것이고, 어른들 가운데서는 특히, 부부사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고, 특별히, 단점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보다 나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발견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상대방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무시를 하게 되고 그래서, 부부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은 족구사건을 통해서 잘 배워서 당연히 인정을 하지만, 저희 집사람에게서 저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고, 저보다 낫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키도 저보다 작고, 공부도 제가 더 잘 했고, 힘도 더 쎄고, 제가 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어머니라는 존재는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저는 힘은 더 쎄다고 하지만, 아기를 10분 동안 안지도 못하는데, 저희 집사람은 그 무거운 놈을 한 시간 동안 안고서 재우기도 하고, 밤에도 계속 일어나서 기저귀도 갈아주고, 울 때마다 안아서 달래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저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잘 찾아보면, 저희 집사람이 저보다 기억력도 좋고, 사람들에게 친근감 있게 얘기도 잘 하고... 또........... 더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렇게 두 가지 정도는 적어도 저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그렇게 계속해서 나보다 나은 점을 찾아나가야 상대방을 정말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앙에 있어서 상당히 교만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자신은 새벽에 1시간 동안 기도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기도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저렇게 밖에 못할까." 그렇게 비판만 하게 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기보다 낫다는 것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그 권사님은 자신이 라이벌처럼 생각하는 한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 집사님도 정말 훌륭한 신앙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그 집사님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나은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 집사님을 더 인정해 주는 것 같으니까, 그 집사님이 꼴보기 싫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새벽기도 마치고 나서 큰 소리로 1시간이나 기도하고 가는데, 그 집사님은 20분 밖에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기도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권사님이 실수로 시계를 잘못 보셔서 새벽에 1시간이나 일찍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직 4시도 안 됐는데, 벌써 와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권사님이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던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루에 20분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서 기도하는 시간만 20분이었고, 새벽기도 전에 이미 1시간을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까, 저녁에도 저녁마다 나와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그 사실들을 알게 되고 난 뒤로는, 그 집사님을 자신보다 더 나은 분으로 알아서, 존중하고 존경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교만들을 회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잘 섬기는 권사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잘 난 것처럼 여기면서 교만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들을 더 많이 발견해 나갈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게 될 것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남을 나보다 나은 존재로 대우해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해 나가면서,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 정말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죠? 옛날에 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푸줏간 주인이 있었습니다. 푸줏간 주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천민들 가운데서도 더 천한 취급을 받는 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체 높은 양반들은 당연히 그런 천민들을 벌레 보듯이 했습니다. 하루는, 양반 두 사람이 그 돌쇠에게 고기를 사러 갔습니다. 먼저 온 양반은 상당히 거만한 말투로, "야 이놈 돌쇠야, 고기 한 근만 다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돌쇠는 고기 한 근을 썰어주었고, 이어서 또 다른 양반은, "여보게, 김서방! 나도 고기 한 근만 주게나."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두 양반 모두 고기를 한 근씩 샀는데, 서로 비교를 해보니까,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먼저 고기를 산 양반이, 왜 이렇게 고기 양이 차이가 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돌쇠가 하는 말이, "그것은 고기를 썬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엣 것은 돌쇠놈이 썬 것이고, 뒤엣 것은 김서방이 썰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했다는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는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면서, 남들을 무시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여직원을 포함해서 부하직원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고, 하인 대하듯이 하고,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고, 또, 아이들도 알 것은 다 아는데, "어른들 얘기하시는데 애들이 뭘 안다고 그래?" 그렇게 말을 하면서 자녀들을 무시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의 직분은 역할의 차이에 따른, 역할상의 직분인데, 수직적인 계급처럼 인식을 해서, 소위 말하는, 높은 직분을 가진 분들은 그렇지 못한 분들에 대해서, 그들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대우하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정말 남을 나보다 낫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 저녁에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라는 제목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는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늘 말씀은 그 말씀의 속편이자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가 사람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사람들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섬기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확장시켜나가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우리 이웃들을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인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도, 하나님은 그 사람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마저도 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고, 그 사람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대우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되기를 소원한다면, 다른 일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사람들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면서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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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강절 첫째 주일인 오늘,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워서 우리 인간들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겸손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 우리들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겸손한 모습이 아니라, 주장하는 자세로,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왔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모습을 본 받아서, 우리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보다 나은 점들을 발견해 나가고,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인 사람들을 겸손히 잘 섬기고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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