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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바람이 부는 계절에 우리는 (마 17: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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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6 억 원이 넘는 주택 보유자들에게 종합부동산세가 과세되고 있습니다. 종합부동산세는 정부가 집값을 잡으려고 비싼 집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를 부담시키는 제도입니다. 이에 세금 폭탄을 맞았다며 조직적으로 조세 저항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북한은 핵폭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이 정부는 세금폭탄으로 국민을 까무러치게 하고 있다’고 열을 올립니다. 주로 강남 지역 사람들이 연대해서 종부세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번 과세로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불만스럽지만 일단 내고 지켜보자는 순응파가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뀔 테니 내지 말고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는 관망파가 있습니다. 집을 가지고 있어봐야 세 부담만 늘어날 테니 집을 팔려는 청산파가 있습니다. 하지만 팔려고 내놔도 관망파가 많아 거래가 이뤄지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99 년도에 32 평 아파트를 3 억 오천만원에 샀는데 지금 집값이 16 억이 된 사람이 세금을 못 내겠다고 엄살을 부리는 것을 보면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세금을 내려면 누구나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국가가 살림을 꾸려나가려면 어쩔 수 없이 내야 합니다.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내고, 없는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는 세금 제도가 좋습니다. 그래서 부정부패가 사리지고 투명한 사회가 되어야 세금 시비가 줄어들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세금은 백성들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더구나 로마 식민지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세금의 대부분은 로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걷는 자들을 멸시하고 싫어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세금을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금 안 내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도착하니까 바로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 군데 머물러 있기 보다는 늘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래도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삼고 계셨습니다. 주민등록상 주소지로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의 세금 걷는 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도착을 알고 찾아 왔습니다. 세금 업무에 철저한 지독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반 세겔을 받는 자들입니다. 반 세겔이면 이것은 성전세를 뜻합니다. 출애굽기 30:13-15 을 보면 20 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매 년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든 자 곧 이십 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반 세겔은 두 드라크마에 해당합니다. 노동자의 이틀 치 품삯 정도입니다. 요즘 가치로 20 만 원 정도입니다. 살짝 부담스러운 금액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보면 크지 않습니다.

이 성전세는 성전을 유지하는 데에 쓰였습니다. 처음 이 성전세는 모세 시대의 성소를 위한 세였습니다. 그러다 성전이 지어지면서 더 큰 관리 비용이 들었습니다. 또 제사장들의 생활비 전부를 대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입는 옷만 해도 많은 돈이 듭니다. 매일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막대한 비용이 듭니다. 그 경비는 일 년에 반 세겔씩 내는 성전세로 충당했습니다.

이 성전세를 받는 자들이 지금 베드로를 찾아 왔습니다. 예수님은 반 세겔을 내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이 세금을 피해 다니신 것이 아닙니다. 여행이 잦다보니 챙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내신다고 대답하고는 예수님께 갔습니다. 베드로가 보고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먼저 물으셨습니다.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이 질문은 세상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풀어가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둡니다. 관세와 정세를 거둡니다. 관세는 지방세로 재산에 붙습니다. 일종의 소득세와 같은 것입니다. 정세는 국세로 사람에 붙는 인두세입니다. 일종의 주민세와 같습니다.

요즘은 세금 종류가 많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식민 속국이 많아지면 자기 나라 배성들에게는 세금을 걷지 않았습니다. 들어오는 조공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식민지가 되면 허리가 휘도록 세금을 마련해 바쳐야 했습니다. 당시에 로마 시민권자와 식민지 백성들의 위상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자기 나라가 강대국이면 그만큼 누리는 혜택도 많습니다. 백성들도 그러니 임금의 아들이야 오죽합니까? 왕이 자기 식구들에게 세금을 거두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에 타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내는 세금은 내지 않아도 됩니다. 즉 예수님은 면세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면세가 되니 내지 않겠다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는 안 내도 된다고 버티면 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것을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금을 내려고 베드로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27 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본래 어부입니다. 낚시를 던져 물고기를 잡는 일에 전문가입니다. 예수님은 세금을 내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일을 시킵니다.

극단적인 보주주의는 성직자가 세상일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으면 좋지만, 사정에 따라서는 일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농촌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텃밭을 가꾸고 토끼를 키우시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농부를 전도하려면 목사님이 농사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목사님이 고구마를 얻어 드셨으면 농사지은 감자를 캐서 화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물론 성직자가 교회 일을 제쳐두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라는 것은 아닙니다. 70 년대에 공장 노동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신분을 속이고 취직하는 목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이것을 산업선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위장 취업이라고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노동자들이 의식화가 되어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언제나 고기를 잡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쩌다 한 번입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팔면 돈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몫과 베드로 몫의 세금을 내려면 한 세겔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세겔이 되도록 물고기를 잡으려면 하루 종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발한 기적을 또 나타내셨습니다.

처음 낚시에 올라오는 물고기의 입을 열어 보면 그 안에 한 세겔짜리 동전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두 마리 잡을 것도 없이 바로 세금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물고기가 동전을 입에 물고 있었을까요?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물고기의 습성 가운데 알을 낳아 입속에 물고 있다가 부화시키는 종이 있습니다. 알이 부화되어 떠나면 입속이 한동안 허전합니다. 그러면 돌멩이 같은 것을 대신 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물속에 떨어진 동전을 물고 있던 물고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놈을 낚아 올리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물고기 이름 가운데 ‘페타스피쉬’라는 고기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물고기’란 뜻이죠. 그런데 이 페타스피쉬는 달고기과로 민물에서 살지 않고 바다에서 삽니다.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바다 고기를 잡았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 몸 한 가운데 둥근 반점이 마치 몸속에 은화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이름을 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릴리 호수에 사는 진짜 베드로의 물고기는 ‘시클리드’과의 물고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즐겨먹는 물고기입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입속에 있는 동전으로 세금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로마서 13:1 말씀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또 7 절에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크리스천이라도 세상 법에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독재자들이 이 본문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정책에도 무조건 동의하도록 요구합니다.

물론 크리스천들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정직하게 세금도 내야 합니다. 신성한 의무인 군대도 가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시민정신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라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래도 세금을 내고 군대에 가야 합니까? 답은 세금도 내야하고 군대도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를 생각해 봅시다. 당시는 로마 식민지 시대입니다. 세금을 내면 로마 정부로 들어갑니다. 군대는 로마의 정복 전쟁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식민지 군대는 최전방에서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 정부의 법 아래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는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십자가에 못질한 사람들도 로마 병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정치 투쟁을 하거나 민족 해방 운동을 하신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보다도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한 예가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실 때, 그 성의 멸망 장면을 미리 내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력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사랑과 순종과 용서의 방법으로 로마를 이기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 국가가 된 나라가 로마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독재자에게 무기력하게 그냥 당하기만 해야 합니까? 80 년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이 문제는 커다란 화두였습니다. 시대를 선도하며 앞서 나가던 이들은 거의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신학생이 데모를 하는 문제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데모할 때 화염병을 사용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대학 뒷산은 화염병을 제조하고 저장하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인근 대학교에서 화염병을 가져다 쓰곤 했습니다. 화염병은 신나와 휘발유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야 던질 때 잘 터집니다. 날아갈 때 불이 꺼져도 안 되고, 미리 크게 불이 일어도 안 됩니다.

저는 데모할 때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돌멩이는 던졌을까요? 그건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신학생이 데모하는 문제는 갈등이 있습니다. 그 때는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특히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의분이 일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독재자와의 충돌로 가장 고민한 사람은 독일 신학자 본회퍼입니다. 본회퍼는 히틀러 시절에 목회를 하던 분입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독일 교회가 그런 학살을 묵인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회퍼는 신앙 얌심으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와 순종만으로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를 미치광이 운전사로 비유했습니다. 버스 운전사가 미쳐서 절벽 아래로 내리 달리고 있다면 승객들은 앉아서 죽어야 하는가? 그 미치광이 운전사를 끌어 내리고 브레이크를 대신 밟아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냐고 역설했습니다.

본회퍼는 미국의 유니온신학교 교수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미치광이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조국으로 귀국했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에 가담하다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결국 본회퍼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3 주 후 히틀러는 자살하고 독일은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본회퍼는 독일의 양심이 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남긴 ‘나를 따르라’는 책은 기독교윤리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남긴 정신을 ‘빛나는 고난’이라고 부릅니다. 온갖 종류의 억압과 차별이 있는 곳에, 전쟁을 부추기는 곳에, 싸구려 은혜를 팔아 자기 배를 불리는 종교 장사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본회퍼의 빛나는 고난은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통치자를 응징하려면 우리 잘못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3:4 말씀에 그런 독재자가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 것은 우리 죄를 벌하려고 하나님의 벌을 대신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잘못된 사회를 지적하려면 교회의 본분에 흠이 없어야 합니다. 거꾸로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다면 교회는 세상을 제압할 아무런 권위도 없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될 수 없고,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 권력에 복종하라는 것이 어용이 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입니다. 이 권한이 세상 국가의 시민권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국가가 우리의 천국 시민권을 빼앗으려고 할 때는 주님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천국증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문제가 아니면 부딪치지 말고 세상 법과 제도에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국가의 헌법보다 더 위대하고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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