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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를 창조한 믿음 (요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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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요한복음 5:8-9)

  저는 한 행사모임에서 제가 교회학교 교사로 가르쳤던 어린이가 목사님이 되어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할 때에 개구쟁이 어린이였습니다. 그 어린이의 어머니는 오랜 병환으로 누워있고 아버지는 농사일을 위해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습니다. 부모의 충분한 돌봄이 없이 가난하고 불행하게 성장했던 그 어린이가 목사님이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어린이 때의 얼굴을 회상하며 함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께는 그 때의 어린이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실력 있고 훌륭한 목사님의 자질을 갖춘 의젓한 목사님의 모습만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변화된 모습은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느냐는 것은 내일의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환경이 불행하다거나 어렵다는 것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곳에서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느냐’와 ‘없느냐’ 인 것입니다. 변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삶에 위기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인 변화를 창조하는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북쪽에 ‘양의 문’이라는 문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오늘날 ‘성 스데반 문’으로 불리어지고도 있습니다. 그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이 못은 신비롭고 기이한 곳으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이 못은 간헐천과 같이 가끔 바닥으로부터 물이 솟아올라오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누가 우연히 이 못에 들어갔다가 병을 고쳤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이곳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베다스다’로 불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지 물이 동하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 그렇게 하는 것이고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사람이 고침을 받는다는 전설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행각 다섯이 지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이곳에 38년 된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38년이란 긴 세월의 불행한 삶에서 변화를 창조하는 삶을 만들었습니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38년 된 환자가 변화를 창조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희망을 붙들고 놓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 환자는 38년의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병에서 고침 받아야 한다는 희망을 잃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병이 나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베데스다 못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지 않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에게 예수님은 찾아 주셔서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로고 데라피(logoderaphy)’ 개념을 창안해 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으로 마음을 치료하는 심리치료이론입니다. 삶의 의미인 가치관을 바로 심어주는데서 인간의 병든 마음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유대인인 그가 나치 수용소 생활 가운데서 발견한 이론입니다.

  수용소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빵 한 조각에 사로잡혀 있는 비참한 자신을 발견한 프랭클린은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을 통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정신과 의사이며, 이곳은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인간을 연구할 수 있는 특별실험실이다. 여기서 나는 공포로 인한 압박 가운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배울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그 경험과 지식을 나의 환자들에게 적용시켜 보리라” 

  프랭클린은 그 때부터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수용소의 비참한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건강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젊고 건강한 사람이 죽는가 하면 늙고 약한 여자가 끈질기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고 살펴보았습니다. 프랭클린은, 인간의 생존에 대한 저력은 프로이드가 말한 성 충동도 아니고, 아들러가 말한 힘으로부터도 아니고 ‘삶의 의미’를 바로 찾는 데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특히 프랭클린에 의하면, 수용소의 꽁꽁 얼어붙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죽지 않고 생존하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가지고 그 의미에 희망을 두고 살며 그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인간에게 희망을 심어주면 죽지 않고 그 환경을 변화시키는 창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을 향하여 희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새로운 삶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말한 것입니다. 절망한다는 것, 그것은 내 안에 깃 든 신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비밀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변화의 삶을 창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은 희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도 희망을 붙들고 놓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그에게 예수님은 찾아주셔서 그의 희망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희망을 가진 믿음은 그의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38년 된 환자는 희망을 붙들고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끝가지 인내했습니다. 38년의 세월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예수님의󰡒네가 낫고자 원하느냐?󰡓는 질문에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물이 동할 때마다 잘 움직이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애써서 연못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다른 환자들이 먼저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되풀이하여 반복했는지를 “내가 가는 동안 이미 다른 환자들이 먼저 들어갔나이다.” 는 그의 말 가운데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38년 된 환자는 실망하지 아니하고 인내했습니다. 거듭해서, 다시, 또 다시 계속해서, 끊임없이 연못에 들어갔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반드시 나을 것이라며 인내하였던 그는 38년의 질병에서 새로운 건강을 창조하는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인내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변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함을 표현할 때 꿀벌을 실례로 듭니다. 그러나 오히려 꿀벌에게서 부지런함보다 더한 인내를 보게 됩니다. 벌은 1파운드의 꿀을 얻기 위하여 5만 6천 개의 클로버 꽃을 찾아야 합니다. 각 꽃에는 60개의 꽃 관이 있기 때문에 1파운드의 꿀을 위하여 3백 36만 번 꽃 관에 주둥이를 들이밀어야 합니다. 꿀 한 숟가락을 생산하기 위하여 이 작은 벌은 꽃을 찾아 4천 2백 회의 여행을 합니다. 그들은 매일 열 번의 여행을 하는데 한번 나가면 평균 20분 동안 날며 4백 개의 꽃을 찾습니다. 꿀벌은 가까운 곳에서 꽃을 찾지 못할 때, 꽃을 찾아 약13km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꿀벌은 살아있는 동안 지구 둘레의 세배만큼의 거리를 난다고 합니다. 꿀벌은 꿀을 얻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꿀벌의 이런 인내는 이 땅에 꿀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끝까지 인내함으로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럼으로 자식 없는 환경에서 그의 후손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하는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무자식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는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저자는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4)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모함으로 죄수가 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이런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지혜로움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찾아주셔서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위하여,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인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는 인생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기회가 되도록 했습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회와 예수님의 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를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인내할 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곳에 예수님이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희망과 인내는 변화를 창조하게 하는 환경일 뿐입니다. 변화를 만드시는 주체는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계셔야하고 그 분이 말씀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찾아가서 만나주시면서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병자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연못에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말함으로 낫고자 하는 분명한 갈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낫기를 구하는 간절함 자체입니다. 우리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을 듣고 대답해야 합니다. 불행한 환경을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반드시 변화를 창조 하겠다’는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때에 그는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변화를 창조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몫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나아만은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분노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저가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문둥병이 발생한 그 자리)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열왕기하 5:11-12)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 번 몸을 씻을 때에 그의 문둥병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인간의 책임을 다할 때에 변화를 창조한 것입니다. 

  고난의 과정은 예수님을 특별한 관계 속에 만날 기회인 것입니다. 38년 된 환자는 38년의 고난이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의 기회가 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기회가 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환자에게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심으로 변화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변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변화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나타난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하는데서 나타난 변화입니다.

  38년 된 환자는 고난의 과정을 예수님만남의 기회가 되도록 했습니다. 내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어려움을 예수님 만남의 기회가 되도록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삶의 과정이 고달프고 힘듭니까? 예수님을 만나냐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할 때에 일어나야 합니다. ‘네 자리를 들라!’고 할 때에 자리를 들어야 합니다. ‘걸어가라!’ 고 하실 때에 걸어가야 합니다. 일어나라고 하시는 데도 일어나지 않고, 네 자리를 들라는 데도 들지 않고, 걸어가라는 데도 걸어가지 않으니까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에 ‘예’ 하는 순종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변화를 창조하는 축복 자가 되십시오. 변화를 창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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