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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전자 (벧전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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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64년 7월에는 당시 세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로마에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무후무한 대화재가 발생하여 로마의 절반을 태워버렸습니다. 이 대화재의 참상을 지켜보던 로마의 시민들은 도대체 이 화재가 왜 발생하였는지에 관하여 분노하였고,이 화재의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소문들이 나돌았는데, 그 가운데는 네로 황제가 도시 계획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로마가 불타는 광경을 보면서 기뻐하며 시를 읊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이에 위기에 처한 네로 황제는 자신을 향한 로마인들의 화살과 분노를 기독교인들에게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네로 황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평소에도 이 세상이 마지막에 불로써 심판을 당할 것이라고 하지 않더냐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빙자하여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애꿎은 성도들에게 혐의를 돌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로마의 시민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네로는 그의 마당에서부터 로마 거리로 나가는 길가에다가 수많은 십자가를 세워 놓고 그 십자가에 기독교인들을 매달았고 심지어 그 십자가에 달린 성도들을 불태워서 로마의 란의 밤을 밝히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네로 황제 때의 박해로부터 시작해서 325년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된 종교가 되기까지 약 250년간 초대 기독교는 역사상 유래 없는 대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베드로전서와 후서는 이런 박해의 시대를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면서 남긴 베드로 사도의 격려의 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고난 받고 있던 이방인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1의 말씀을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한다”고 하십니다. 여기 기록된 지방들은 주로 오늘날 터어키 지방에 위치한 지명들입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이방신들을 섬기면서 이방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복음을 듣고 조상 대대로 섬기던 이방신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조상들과 동족들이 섬기던 우상을 버리는 데에는 그에 따르는 심각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과거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동족들로부터 혹은 가족들이나 가문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사람으로 대우를 못 받으며, 여러 가지로 미움과 환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어떤 집안에서는 예수 믿는 일을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가족 중에 누가 안 믿으면 걱정인 그런 가정도 있지만, 그러나 또 어떤 집안에서는 예수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온갖 비난과 욕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만 생기면 “회 다니는 누구 때문이다”하고 말도 안 되는 모든 누명을 혼자 써야 하는 그런 가정도 있더라 그 말입니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람 사람은 참 좋은데 인품은 훌륭한데 단 하나 예수 믿는다는 그 사실 때문에 몹쓸 사람이 되고 열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1:6의 말씀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여” 하시는 것입니.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단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예 매를 맞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그 가문으로부터 축출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그 핍박이 너무 극심하여 자기 고향에서 떠나 지하에서 혹은 산중 토굴에서 심지어 공동묘지에서도 살게 되는 경우도 있었음을 히브리서 11장은 증거해 줍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그래서 나그네라 부를 수밖에 없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쓰여진 서신이 베드로서신입니다.

1.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서 나그네라고 했는데, 그러면 나그네 된 신자의 삶은 그저 세상에서 핍박만 받고 고난만 당하고 미움만 받고 살다가 끝마치는 그런 삶이라는 말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나그네인 우리의 삶은 그저 바보같이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적극적인 의미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이기 때문에 하늘 본향에 이르는 것 외에는 다른 보람이나 소망이 없느냐 그 말입니다.

사실 우리 성도들이 자칫하면 이런 오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저 천국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하여는 그다지 큰 의미와 비중을 두지 않는 그런 도피주의나 비관주의적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관적이고 도피적인 생각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심할수록 우리에게 더 깊이 찾아오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베드로전서2:9-12의 말씀을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난을 만나면 우리 성도가 “그래 우리는 어차피 나그네니까 그렇지”하고 신앙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사도 베드로는 나그네 된 우리 성도의 또 다른 신분과 사명에 대하여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는 나그네이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 과정이 의미가 없다거나 그저 설움과 괴로움만 당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1:3의 말씀에도 보면 우리 성도가 세상에서 나그네이지만 이런 나그네 된 성도의 삶에서 가장 현저한 특징은 찬송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은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1:1에서 너희는 나그네라고 해 놓고, 곧바로 1:3에서는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세상이 보는 관점에서는 나그네라 할 때에 설움과 괴로움이 먼저 연상이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성도의 삶에서는 오히려 찬송과 감사와 기쁨과 소망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한 그런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세상에 대하여 분명히 나그네 된 우리 성도가 어떻게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 수 있는지 나아가서는 어떻게 나그네 길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걸어 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한합니다.     

첫째는 세상에 대하여는 나그네이지만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신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신분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2. 먼저 오늘 읽은 본문 2:9-10을 보시면 우리 성도는 근본적으로 변화가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알지 못하는 그런 큰 변화가 우리 성도에게는 일어난 것입니다.

1) 그래서 10절을 보시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라고 하십니다. 여기 보면 “전에는” 이라 하시고 그 다음은 “이제는”이라고 하셔서 이전과 지금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전에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가정이 예수 믿은 지 이제 한 30년 남짓 되어 가는데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이유가 너무 집안에 우환(憂患)이 많아서 굿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굿 해본들 소용이 없으니까 “이것 걷어치우고 교회당이나 한 번 가보자.” 해서 저희 어머니와 누나들이 나가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변화가 되었지 않습니까? 전에는 호흡도 없는 죽은 우상들을 섬기고 신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도 못하면서 하늘을 보고 소원을 빌고 땅을 향하여 복을 빌며 굿이나 하고 점이나 치고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창조주가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인 줄 알고 그 단정함과 평강 중에 하나님만 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 울산에 오래 사신 분들은 아마 방어진 용왕이나 장생포의 용왕을 섬기던 분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사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 말입니다.     

2) 또 계속 보면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랬습니다. 여기 긍휼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만약 당신의 거룩한 법대로 우리를 다루시면 우리 중에 누가 살아남을 자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누가 하나님의 두려우신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폐부를 아시고 우리의 마음까지 감찰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공의로 우리를 갚으시면 누가 영원한 멸망의 자리를 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징벌 받아야 할 저와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고 안아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죄악대로 다 갚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변화 된 결과입니다.

제가 Y교회에서 사역할 때 일입니다. 10여년 가까이 남묘호랑게교에 열심히 다니던 어떤 60대 아주머니 한 분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와서 등록을 했습니다. 사연인즉 가장 자기에게 효도를 잘 하는 딸이 서울 사랑의교회 집사인데,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화를 해서 “엄마 남묘호랑게교 가면 안 되고 교회 가서 예수 믿고 나와 같이 천국가야 됩니다.”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귀가 따갑게 들은 딸의 말대로 그냥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찾아왔다고 하시면서 등록을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호박을 넝쿨 채 갖다 주셨습니다. 주일이 지나고 저랑 교구 맡은 여전도사님과 교구 권사님, 구역장 이렇게 다섯 사람이 심방을 갔습니다. 초신자니까 다시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드리고 나오려는데 이 분이 자기는 집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다고 하면서 밥을 사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새가족 심방이어서 일부러 점심 다 먹고 오후에 갔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내로 그냥은 못 간다고 그러시더니 저희더러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서 방에 들어가서 봉투를 하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여전도사님에게 주면서 하는 말씀이 “밥은 먹었으니 되었고, 대신 이것 가지고 목사님 설교 준비할 때 담배 피우며 깊이 생각하시게 담배 한 벌 대신 사 주이소”그러시는 겁니다. 그 순간 아무리 안 웃으려고 애를 써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온 집안이 완전히 뒤집혀 버렸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심방 왔다고 담배 사서 피우라 하시던 분이 지금은 세례도 받고 얼마나 열심히 신나게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 임하기 때문에 일단 예수를 믿으면 변화되게 됩니다. 달라집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삶과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과 인격을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 성도들이 세상 사람보다 못한 것 아니냐 하는 안타까운 비판이 교회 안팎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우리 성도들이 어디가 나아도 훨씬 낫습니다. 어디가 달라도 분명히 다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놓고 이전과 오늘을 비교해도 혹은 세상 사람들과 우리 성도들을 놓고 1:1로 비교해도 예수를 믿는 우리 성도가 나은 것이고 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3. 이렇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 성도에게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러면 변화되어진 우리의 신분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9절을 보면 우리의 변화된 신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네 가지 신분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신분을 우리 성도들이 늘 마음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받은 신분, 가령 우리의 주민등록번호와 국적 같은 것은 영원히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가면 당신의 생년월일이 언제냐고 묻지 않습니다. 국적이나 고향이 어디냐 따져서 차별하지도 않고 어느 학교 출신이냐고도 안 묻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주민등록도 말소되고 국적도 의미를 잃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네 가지 신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 된 이 네 가지 신분은 영원히 말소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네 가지 신분은 우리가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고이고이 간직하고 살아야 소중한 기업입니다.

1) 먼저 우리 성도를 향하여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 부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회에서 가정에서 동료들로부터 애매한 고난을 받고 소외당하는 그 초대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너희가 지금 비록 핍박받는 처지에 있지만 그러나 당신들이 서 있는 그 자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혹은 그저 우연히 당신들이 지금 그런 형편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도가 서 있는 그 모든 삶의 자리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며 하나님이 또한 거기 함께 하시는 그런 복된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저 우연히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울산 땅에 그리고 영적으로는 교회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신 바 되고 택하신 바 되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바가 되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져가며 그래서 나의 삶 전체가 의미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인생이 된 줄을 알아라.”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 하는 그런 정도에서 우리 인생의 값을 치지만,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허망해지고 무의미해져 버리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일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택하심과 거룩하신 뜻 가운데서 영원히 복된 존재로 삼아 놓았다 하시는 말씀이 “택하신 족속”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2) 나아가 두 번째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십니다.

여기 왕 같다는 것은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맡은 사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은 왕과 같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인정받는 존재로 삼아 놓으셨습니다. 악한 마귀의 손아귀 안에 사로잡힌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비록 우리 성도가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동안 근심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신분의 본 모습은 왕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국적이 이 땅에 있지 않아서 아직은 우리의 왕과 같은 신분이 온전히 그 영광을 숨김없이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 성도의 신분은 왕과 같은 존귀한 신분인 것입니다.

이렇게 왕과 같이 고귀한 신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귀한 사명, 곧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배같이 여김 받는 왕 같은 신분이기에 세상에서 쓸모없는 일 하며 살 수 없고 보배로운 사명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바로 제자장의 사명인 것이다.

제사장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화목과 사죄를 위한 제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 백성들을 대신하여 긍휼을 구하는 직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 흠도 없이 온전하고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세상과 멸망 받을 영혼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고귀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지금 핍박으로 흩어진 나그네된 성도들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을 핍박하는 그들을 같이 핍박하고 저주하고 미워하지 마시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제사장으로 기도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신분이며 복된 사명인지 모릅니다. 전에는 죄로 인해 죽었어야할 미천한 인생이었는데 이제 온 세상을 위하여 존귀하신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며 하나님께 신령한 은혜와 축복을 받아 그 축복을 우리 가정에도 전달하고 우리 사회에 흐르게 하며 우리 직장에도 임하게 하고 나아가 민족과 세계 열방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흘러 보내는 복의 근원이 되는 왕 같은 제사장인 것입니다.

3) 그 다음 “거룩한 나라”라 했습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세상과는 무엇인가가 다르게 구별이 되어졌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구별 되었습니까? 세상 사람은 세끼 밥 먹는데 우리는 한끼 먹어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구별 되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눈이 둘인데 우리는 하나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존재로 구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거룩히 구별된다는 것은 이런 외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구별됨은 사고방식의 구별입니다. 정신의 구별입니다. 가치관의 구별입니다. 인생의 보람과 의미가 세상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처세술을 좇아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찌하면 나의 이름을 더 빛나게 하고 잘 먹고 잘 살아볼까 하는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대로 주인 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하겠다하는 바로 거기에 삶의 보람과 의미를 찾습니다.

이처럼 인생관,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게 구별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은 세상 사람과 똑같지만 같은 직장에서 같이 일을 하고 같은 밥 먹고 같은 옷 입고 같은 집에서 살지만 그 속에 품고 사는 생각과 기쁨과 보람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 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소유라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도 자기 소유의 물건이나 사람은 소중하게 여겨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기업을 결단코 다른 누구에게 양보하거나 빼앗기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에 우리 하나님께서 결단코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우리의 인생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보존하시며 지키시며 축복하시며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0:29에 보면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에 우리 하나님이 만유보다 크신 권능의 손으로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4. 이렇게 우리 성도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정말로 놀랍고 엄청난 신분을 획득했습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신분으로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9 하반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보면 하나님이 고귀한 신분을 받은 성도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어두운 죄악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내어 기이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하나님의 선전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소망하십니다. 죄악으로 타락하고 허무해진 인생들을 향하여 여전히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여전히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된 성도들의 사명인 것입니다.

기업체들은 자기들의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서 광고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조사에 보니까 우리나라 몇몇 대기업들은 1년에 한 가지 상품을 팔기 위해 약 2,000억이 넘는 광고비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양한 광고 전략과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정말로 광고에 혼신을 다 기울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썩을 것을 얻기 위해서도 이같이 열과 성을 다하여 자기들의 상품을 선전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더 기이하신 빛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선전할 수 있습니까? 자기들도 하나님 계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잘 선전해 보라고 아우성치는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선전해야 합니까? 아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저들의 눈에 딱 보여주면 좋겠는데 그것은 2가지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신데 그런 분을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자면 우리 인생은 최소한 하나님이 만든 만물보다 더 커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이 얼마나 작은 존재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래알보다 작은 인생입니다. 그러니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번째는 온전한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죄 사함 받지 못한 인생이 쳐다보면 그 즉시로 죽게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은 휘발유통 매고 용광로에 뛰어드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유보다 크시고 기이한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선전하는 전략은 무엇입니까?

1) 오늘 11-12절에 보면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부정적으로 하지 말라는 형식의 말씀으로 “너희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성도의 신분이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우리에게는 악한 육신의 소욕이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에게 악한 육체의 정욕이 없습니까? 미워하고 다투며 성내고 질투하고 시기하며 탐욕을 품는 것과 같은 악한 정욕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왜 있습니까?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의 고귀한 신분을 우리 능력으로 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능력과 자격과 선행으로 얻었다면 지금은 온전한 사람이겠는데, 그러나 오직 은혜로 이 신분을 얻었기 때문에 아직 우리 속에는 육신의 정욕이 많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우리 속에 기회만 있으면 되살아나려고 하는 악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줄을 알아야 빛 가운데 계신 거룩한 하나님의 선전자로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목사님의 책에서 자기 교회 수 천 명의 성도들을 목양하는 것보다 가장 목양하기 힘든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고백하는 말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제가 깊이 공감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고 정말로 은혜로 목사가 되었지, 왜 그렇게도 제 자신이 잘 변화되지 않고 성숙해지지 않는지, 왜 그렇게 마음은 좁은지, 왜 그렇게 믿음은 적은지, 왜 그렇게 사랑이 없는지, 왜 그렇게 쉽게 마음이 허망해지는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저를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연약한 우리이기에 우리는 정말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성령의 은혜와 감화로 변화되고 성숙하기를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지 않고 오직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야만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덕을 선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는 12절 초두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라”고 하십니다.

부정적으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긍정적으로는 착한 행실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선한 행실을 가져야하느냐면 12절 하반절에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여기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합니까? 악행 한다고 우리를 비방하던 그 입술들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못살게 굴고 괴롭히고 비난하던 그 입술들이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선한 행실을 가져 우리를 기이하신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로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이제 결실의 계절 가을에 우리는 생사나 축제를 준비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하나님의 선전자”가 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이번 생사나 축제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 우리 성도들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을 선전하고 인자한 말로 하나님을 선전하고 저들의 영혼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느끼게 함으로 하나님을 선전하고 우리가 작정한 태신자들을 가슴에 품고 남은 기간 동안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선전하고 또 필요하다면 사랑이 담긴 작은 선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선전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남은 35일 동안 우리가 믿지 않는 우리 가족들과 이웃들과 직장 동료들과 기타 모든 지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선전함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빛 생명의 빛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 울산 땅에 두루 비추어지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권재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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