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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자녀들 (눅 2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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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 머리 부분에 보면 어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다윗 왕 때의 제사장 중 한 사람이었던 사독의 이름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두가 제사장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제사장 가문에 속한 귀족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과 회당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부유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라적 사고 즉 합리주의의 경향을 띈 사람들이었고, 신앙적으로는 바리새인들과 대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죽음 이후의 삶 같은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천사나 마귀의 존재도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모세 오경에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현상유지를 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예수님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의 존재를 위험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잡고자 교묘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만한 자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참으로 교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은 그들이 믿지 않는 부활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신25:5-6에 보면 이런 법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은 이 법을 원용하여 부활신앙을 빈정댄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만일 어떤 사람의 형이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보통사람 같으면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이 질문을 던지며 노린 것은 두 가지였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세에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게 한 후 모세의 권위를 빌어 예수님을 처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계략을 다 아시고 그 두 가지 노림수를 다 무력하게 만드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사두개인들의 질문이 그들의 무지와 오해로부터 나왔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의 무지란 저 세상에서의 삶의 양상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양상과 같지 않을 것임을 모른 것입니다. 저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연속적인 면도 있지만 전혀 다른 면도 있을 것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허긴 부활이나 사후의 삶을 아예 믿지 않은 자들이었으니까 저 나라의 삶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의 삶과 저 세상에서의 삶의 차이를 설명하시기 위해 예를 들어 하신 말씀이 34-35절의 말씀 즉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스런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장가도 못 가고 시집도 못 간다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이냐 하는 생각에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 말씀이 하늘나라에서는 부부관계나 가족관계가 다 없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에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이 말씀은 결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부부관계나 가족관계가 하늘나라에서는 다 사라지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변개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관계이고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그 사이에서 태어나게 하신 자녀들인데 그 가족관계를 왜 무효로 돌리시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과 만나셨을 때에도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변함없이 유지된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답하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세의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생산하고 번성하라고 복 주신 백성이 자식이 없어 번성하지 못하고 대가 끊어지며 그 이름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식이 없어 번성하지 못하고 대가 끊어지는 것은 저주받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식 없이 죽으면 그의 형제들이 죽은 형제를 위해 형수나 제수씨로 하여금 자식을 낳게 해줄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은 죽을 죄였습니다. 이렇게 종족과 가문의 보존을 위한 결혼은 그 중요성이 대단히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죽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종족보존을 위해 시집장가가고 애 낳고 하는 일이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36절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저 세상에서의 삶이 이 세상에서의 삶과 다른 것의 첫 번째가 바로 저 세상에서는 죽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히 복된 삶이 저 세상의 삶의 첫 번째 다른 점임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말씀이 바로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하신 말씀의 본뜻이었던 것입니다.

  그 모세의 율법은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유산의 분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유산이나 재산분배 같은 물질적인 관심사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랑과 기쁨의 세상이라는 가르침이 숨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려던 사두개인들의 교묘한 질문을 무력하게 만드시며 오히려 그들의 무지와 천박한 사고를 폭로하는 도구로 역이용하신 예수님께서는 내친김에 그들의 두 번째 노림수도 그들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에 맞서는 자로 만들어보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야말로 모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한 자들로 밝혀놓으신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우리에게 써주기를 ...” 하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세의 권위를 내세워 예수님의 권위를 꺾고 그를 모세와 달리 가르치는 자로 몰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세의 말을 인용하시며 그 말 속에 사두개인들이 믿지 않는 부활과 영생의 진리가 들어있음을 지적하시고 반박하신 것입니다. 37-38절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죽은 사람의 부활에 관한 보다 분명한 구약성경의 말씀으로는 욥19:26의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한 말씀, 시16:9-11의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성도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한 말씀, 사26:19의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한 말씀, 단12:2의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라” 한 말씀 같은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 외에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모세의 말로 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말 즉 37-38절 말씀의 뜻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7절에서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했습니다.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이란 모세가 그의 장인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이끌고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타서 사라지지 아니하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가까이 나아가려 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며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는 음성을 들은 사건(출3:1-5)을 전한 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하신 말씀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이삭의 하나님이셨으며, 야곱의 하나님이셨다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산 사람만이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들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이미 죽었는데 계속 살아있으려면 부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의 요지입니다. 여기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나도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저 세상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계속 살아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38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신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또 다른 무지를 폭로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백성을 죽음으로부터 살려내시고 영원히 살게 하시려는 선하신 뜻을 갖고 계시며 그 뜻을 이루시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모르는 무지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나님은 살리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의 뜻 안에서는 살지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생이 확실히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활의 자녀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소유했고,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새 몸을 입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부활을 약속 받은 이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또한 언제나 살아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장막을 벗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장막을 벗을 뿐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무지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사랑의 권능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사는 삶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 뒤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관심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안에서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의 복락이 주어져있음을 확신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삶에 매인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에로 향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혜와 지식 앞에 머리 숙일 줄 알기를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예수님의 답변과 가르치심에 놀란 사두개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본문 40절).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공격하려 하고, 신학적으로 비판하려 하며, 정치적으로 음해하려던 모든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세상의 지혜와 지식으로도 이길 수 없는 분이심이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오직 겸손과 감사와 순종으로 그를 주로 영접하는 것이 택하심을 입은 복된 이들의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며 그의 몸 된 교회를 비방하고 무너뜨리려 해도 우리 주님은 언제나 승리하시며 우리도 그 안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음을 믿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이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하던 세력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키며 요란하고 급속하게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영의 귀가 우리 모두에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감격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맞고 그의 오심으로 크나큰 위로와 소망을 되찾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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