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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방을 위하여 (롬 15:1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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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정을 받는 시간일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사람은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또 우리 목회자에게는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합니다.

괜찮은 교인이야, 신실한 성도야. 믿을만한 그런 성도라는 인정은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발걸음도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저 목사님은 참 은혜가 있어. 능력도 있고, 충만해. 그런 평가는 목회자로 하여금 목회에 힘을 얻게 하는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가정에서도 인정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먼저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비교하는 것이지요. 어느 집 애는 공부를 잘 하는데, 몇 점을 받아 왔는데, 이런 비교는 아이를 사망선고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교육에 있어서 가장 잘 못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비교하는 부모입니다.

잘하는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자녀를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너는 이걸 너무 잘 하는구나. 너는 이것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애. 그리고 좋은 점을 찾아서 세워주는 것이지요. 아마 어린이들도 부모에게 인격적으로 칭찬을 받고 싶어 하지만 가장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어른들입니다.

먼저 남자들은 인정받는 일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재입니다. 남자가 남자일 수 있는, 가장일 수 있는 가장 내적인 삶의 동력은 바로 칭찬과 인정에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인정받는 남편은 생기가 넘칩니다. 활기가 있지요. 자녀들에게 있어서 인정을 받는다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아내나 자녀로부터 인정을 못 받는 남편이나 가장이 있다면 그는 삶의 의욕을 잃을 것입니다. 여러분, 겨울이 되면 수많은 노숙자들이 지하도에서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지만 그들의 전부가 홈리스는 아닙니다. 가정도 있고, 번듯한 집도 있는데 왜 집을 나오고 가정을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내로부터 자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인정받지 못하는 그 공동체에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죽을 맛이지요. 차라리 그곳에서 추위에 떨더라도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내 역시 인정 받아야 할 중요한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남편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고, 자녀로부터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성들이 40- 50대 갱년기를 겪으면서 고통당하는 것은 뭐예요? 갑자기 몸이 화끈거리고, 갑자기 몸에서 열이 나서 펄펄 끓고 후끈 거리고, 몸에서 힘은 빠지고 그런 현상과 더불어서 심리적으로 오는 공황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역할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제 남편은 남편대로 과장, 부장, 이사로 진급해서 정신없이 바쁘고 그래서 이제는 식사 한끼도 집에서 하는 일이 없습니다. 아침에도 일찍 출근해서 회사에서 아침까지 해결하니까 점심, 저녁 먹을 일이 없습니다.

그나마 아이들 학교 등교하는 거 챙겨주고, 아이들 도시락 싸주고 그런 시대에는 바빠도 할 일이 있고, 그래도 내가 있어야 아이들이 이런 보람이 있었는데 아이들도 크고, 이제는 학교 급식이 해결해 주다 보니까 도시락 싸는 일도 없고, 반찬 걱정할 일도 없고, 아이들 크고 나면 이제 12시 넘어야 들어오고, 결국 혼자서 텔레비전 보다가, 혼자서 이것저것 하다가, 어떤 사람은 홈쇼핑에 미쳐버리고, 어떤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춤바람에 미치고, 이런 저런일로 곁길로 가는 여성들이 한 둘이 아니지요.

자신에 대한 존재감을 잃어버릴 때, 4- 50대 여성들은 대단히 중요한 삶의 경계에 와 있는 것이지요. 그 경계를 어떻게 넘나드느냐에 따라서 건강하게 60,70,80대를 살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좌절과 번민과 그리고 끊임없는 우울증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은 할 일이 많아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바빠서 우울증 걸릴 틈이 없어요. 우울증 걸렸다고 그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울증 걸릴 틈이 어디 있어요? 한가해서 춤바람 날 틈이 어디 있어요? 언제나 오면 자신의 이름 석자를 불러주고, 거기에 거룩한 직분이 따라서 아무개 집사님, 아무개 권사님, 아무개 장로님 얼마나 행복해요?

인정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 중에 기쁨 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셔서 우리 주님께서도 나를 능하게 하셔서 나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연약한 데도 불구하고 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족한 데도 불구하고 능하다고 생각하셨어요.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십니다. 별로 충성하지도 못했는데,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뺀질뺀질 한다는 단어입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1년동안 뺀질뺀질 거리고 충성의 자리와는 정반대의 자리를 걸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를 충성되이 여기시고, 능하게 여기시고, 소중하게 여기셔서 또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아마 이 말씀에 가슴이 뜨끔한 분들이 여럿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주님은 2007년에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래서 더욱 귀한 사명을 드리는 분들도 있지만, 하지만 많은 경우에 부족하지만 또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하게 여기시고, 충성되이 여기셔서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실 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로마의 있는 성도들에게 오늘 14절을 통해서 세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로마 성도들에게 첫 번째 칭찬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선함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람을 보면서 아무개는 참 선량하게 생겼어.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볼 때에 여러분의 이미지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하루에 거울을 바라보시면서 거울 속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듭니까?

저 거울 속의 저 사람 선하게 생겼어. 선량하게 생겼어. 믿을 만하게 생겼어. 그런 느낌이 드십니까? 사기꾼처럼 생겼구나. 브로커처럼 생겼구나. 그렇게 느낌이 드십니까? 다른 사람이 내게 갖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이 선량하고 선함이 있음을 내가 알고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좋게 평가를 받으면 감사한 일이예요. 기분 좋은 일이고, 우리가 더 겸손해 지는 일입니다.

며칠 전에 아버님 생신이 있어서 케잌을 사러 나갔습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케잌을 사오라고 맡길 수도 있지만, 아버님 생신인데 그래도 아들된 제가 케잌을 사는 것이 스케줄이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 차를 타고 몰고 나왔어요.

저는 빵집 그러면 고려당, 아니면 파리바게뜨, 그게 제일 좋은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부천시내를 나갔다가 쭉 보니까 분명히 빵집이긴 빵집인데, 이름이 굉장히 길어요. 영어는 아닌 것 같고, 투어스레스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빵집으로 들어갔어요.

이름이 뭐죠? 그랬더니 뚜레쥬르예요. 영어가 아니고 프랑스어니까 영어식으로 발음해서는 근처도 못 가는 거지요. 무슨 뜻입니까? 매일매일, Everyday란 뜻이예요. 매일 같이 빵을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빵이 참 보기가 좋고, 맛있게 보였어요. 케잌을 하나 선택을 해서 포장을 선택했는데, 그 주인이 포장을 하면서 저를 쳐다보면서 그래요. 목사님이시죠? 네? 목사님이신 것 같아요.

전 돌아오면서 감사했어요. 만약에 속으로 저 인간, 저 사기꾼 같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은 안하고 경계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물론 좋은 일이니까 말로 했겠지만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속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그런 이미지를 내가 다른 사람에게 풍긴다면 참 불행한 인생이지요. 그 사람은 가까이 했다가는 크게 경을 칠 사람이구나. 그런 경계심을 발휘시키는 그런 이미지라면 얼마나 힘든 거예요.

여러분들이 어디를 가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좋은 이미지를 나타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일상적으로 성도들이 쓰는 말 가운데 가장 좋은 이미지를 이렇게 말하지요. 아휴, 천사 같애. 아무개 집사님은 천사 같애. 아무개 권사님은 천사 같애.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그 말은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사람보다 못 한 거거든요. 천사는 우리 구원 받은 하나님 자녀들의 시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구원 받은 천국에서는 우리가 천사를 부리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는 우리의 일반적인 의미에서 좋은 아름다운 아주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를 말할 때 천사와 같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로마 성도들 가운데 선함이 있고, 선량함이 있고, 순수함이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 내서 칭찬하고 있어요.

두 번째로 바울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모든 지식이 차서, 그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까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다는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지난 121년동안 지나오면서 크게 두가지 공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대각성입니다. 내년이면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던 영적대각성 운동에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사실상 그 불길의 요원은 감리교 선교사 하디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어요.

1903년 당시의 한국 상황, 여러분 요즘에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착각할 때가 많아요.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 삼국시대, 더 나아가서 전의 부여시대, 뭐 이런 배경을 보면 얼마나 의상들이 화려하고, 각각 시민들의 복장과 생활상이 아주 멋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착각합니다. 삼국시대의 괜찮게 살았구나. 하지만 그거야 말로 착각이예요. 지금의 우리의 수준으로 그 당시의 것을 재연해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1903년, 우리 1885년에 제물포로 복음이 들어올 당시에 아펜셀러 선교사, 언더우드선교사가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인천을 찍고, 서울을 찍고, 대한민국의 중심적인 도시를 찍은 것을 보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어요.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야, 100년 전에 대한민국이 이런 모습이었나. 정말 기가 막히다. 요즘 드라마 보고 속으면 안 됩니다. 100년 전에 선교사님들이 인천 제물포를 찍었는데, 인천, 서울 남대문, 종로, 동대문 지역의 사진들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일반 시민들 옷 입고 다니는 모습 보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외국 선교사들이 근대화된 삶을 살다가 양변기를 쓰고, 카메라를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가지고 기겁을 하는 거지요.

사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화장지가 없었지요. 양변기 화장실이 없었잖아요. 제가 서울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2- 3학년 때 서울시내에서 처음으로 양변기를 설치해 놓고 얼마나 학교에서 자랑을 했는지 우리 학교는 수세식화장실이 생겼다고 맨날 아침에 올 때마다 화장지 하나씩 가져오라고, 집에서 부담이예요. 매일 아침마다 애한테 화장지 하나씩 보내는데 흰색은 구경도 못하는 거고, 누르스름하고 꺼칠꺼칠한 그 화장지, 그러나 수세식 화장실에는 그게 필요하다고 해서 그 때 들고 다녔던 생각이 나요. 70년대 일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만 해도 그냥 푸세식, 풍덩하고 떨어지지요. 그래서 지혜롭게 피해야지요. 제가 초등학교 전에 1,2,3학년 때는 푸세식도 아니예요. 짚으로 된 광에 절반 정도는 불을 떼고 난 재를 가져다가 광 속에 묻어놓고, 광에 보면 자그마한 돌멩이 두개가 올려져 있어요. 거기에 삽으로 푹 파서 조금 움푹한 곳 그게 화장실이예요. 그리고 짚단이 하나가 매달려 있어요. 밭에서 벼 베고 난 짚단 하나가 매달려 있지요. 거기서 용변을 본 후에 지푸라기 3,4개를 뽑아서 그거를 접어서 닦았습니다. 상상을 해 보세요. 남자는 조금 덜 하지요. 여성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렇게 70년 전에 살았던 분들의 삶이 그게 우리들의 삶이었습니다.

조금 지혜로운 아버지들은 쇠스랑을 뒤집어 놓고, 볏단을 쳐서 꺼칠꺼칠한 부분을 패 내고, 깨끗하고 깔끔한 볏단을 묶어서 해 놓았어요. 조금 신경 쓰는 집은 그랬어요. 서울서 누가 신문지라도 들고오는 날이면 그걸 가위로 조그맣게 잘라서 못질해서 화장실에 걸어 놓으면 얼마나 행복했는데요.

우스개말로 아이들 많은 집들은 그게 어려우니까 화장실 밖에다가 새끼줄을 쫙 매 놓으면 볼일 보고 그냥 가운데로 지나가는 거지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요. 그게 우리네 삶이었어요.

그리고 삽으로 파서 뒤에 있는 잿덩이에 던지면 풍덩하고 잿더미 속에 감춰지면 그걸로 청소 끝이었습니다. 그러던 우리들의 삶, 그런 부분들을 선교사들이 사진을 찍고, 생활하다 보니까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피곤해요.

지금은 딴 데로 가셨지만 우리 교회에서 목사가 된 분 누구인 줄 아시죠? 언젠가 서 있는데 여자 화장실에서 나와요. ‘아니 왜 거기서 나와?’ ‘목사님, 남자 화장실에는 양변기가 없어가지고’

그 때까지만 해도 남자 화장실은 양변기가 없어서 쪼그리고 앉아서 수세식이지만 양변기는 없었어요. 그 30대 젊은 목회자가 양변기가 없다고 여자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면서 이용을 하는 거예요.

제가 마음 속에 ‘아이고, 안 되겠구나.’ 그래서 관리부에 남자화장실에 양변기를 빨리 설치하십시오. 그래서 남자화장실도 양변기를 설치한 거예요. 지금 30대 그런 사람들은 양변기 없으면 여자화장실을 가더라도 거기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 삶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요.
그런 분들이 지금 70년대 이전의 이야기를 하면 정말 이해가 안 될 이야기지요. 하지만 연세가 드신 분들은 구수한 이야기입니다. 지푸라기로 닦아도 그 때가 좋았지. 선교사님들이 한국에 들어와 보니까 기가 막혀요.

전도를 해도 안 됩니다. 술만 먹었다 하면 그냥 곤드레 만드레가 되고, 돈만 조금 벌면 첩을 얻어 가지고, 사랑방이 뭐예요? 첩을 놓고 사는 데가 사랑방 아니예요. 돈만 생기면 첩을 얻고,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도대체 이 조선 민족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디 선교사 마음 속에 그런 마음이 생겼어요. 아무리 전도해도,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변하지 않아요. 조선 민족은 망할 민족이다. 희망이 없구나. 그런 마음이 자꾸만 생기고, 더구나 조선 민족들이 싫어지고, 미워지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1903년 한 작은 기도모임에서 의례적으로 기도모임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그 날 그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야, 하디야, 여기 조선이 선교가 안 된다고, 원산의 시민들이 예수를 안 믿고 다 망할 짓만 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문제가 조선 사람들, 원산 사람들에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문제는 그 조선 사람들, 무식하고 가난한 조선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너에게 있는 것 같은데, 하디 선교사에게 성령께서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문제지, 저 조선 사람이 문제가 아니다.

그 날 하디 선교사는 무릎을 꿇고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내가 여러분 앞에 회개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미국 사람으로 현대화된 삶을 살았던 그런 경우를 가졌던 사람으로, 여러분들을 업신여기고, 여러분들을 무시하고, 여러분들은 도대체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여러분 앞에 공개하고 회개합니다.

그렇게 하늘 같이 떠 받들었던 선교사님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 생각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선교사님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반발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부족하고 잘못된 생각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했어요. 그 자리에 모여있던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회개운동이 그 기도운동에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리고 원산에서 평양으로 영적대각성의 불길이 이어져서 1907년의 평양의 1월달 사경 성회 때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요. 그 불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개성으로 서울로 저 목포까지 한반도가 영적 대각성, 회개운동이 일어났어요.

그러면서 그들이 무슨 목표를 가졌냐 하면 회개하고 나서 뜨거운 마음이 생기고 나니까 영혼이 불쌍해 지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1만명 구령운동, 영혼을 구원하는 운동을 했는데 그 당시의 한국교인이 몇 십만이 되지 않은 아주 작은 숫자의 그 때는 그야말로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로 작은 종교였는데, 무려 1만명의 성도들을, 1만명의 영혼들을 주께로 돌아오는 열매로 거둔 줄로 믿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내가 회개하고, 내 영이 주 앞에 맑아지지 않으면 영혼구원의 마음이 주어지지가 않아요. 집사가 되도, 전도할 마음이 안 생기고, 권사가 되도 전도할 마음이 안 나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내 영이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래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교회를 나와도 내게 도움이 되고, 내게 편리해야 교회를 나오는 거지. 내가 좀 불편하고, 내가 좀 손해보면 화내고 짜증내고 소리 지르고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디에도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의 심령에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생기겠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순종할 때 큰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내년이면 그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참 뜻 깊은 해에 한국교회는 이렇게 영적대각성운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1980년 이후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평신도를 깨우는 운동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화 훈련입니다. 교회마다 베델성서대학, 크로스웨이, 트리니티, 성경공부운동이 붐을 이루었습니다.

평신도를 깨웁시다. 잠자는 평신도를 깨웁시다. 말씀을 가르치십시다. 전국적으로 평신도를 깨우는 운동이 일어났어요. 이제는 평신도들 정말 성경 많이 알고, 정말 세미나 많이 듣고, 많이 참석해서 평신도들의 내적인, 신앙적인 지식들이 충만해 졌어요.

바울사도는 칭찬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함을 내가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거지요. 교회가 무엇인지 알아가고,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가고, 헌신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봉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분이 어떤 것인지 하나 하나 알아가는 기쁨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바울사도는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합니다. 서로 세워주는 그런 아름다운 분위기가 있다는 말이예요. 연약한 부분도 있지만, 약점도 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장점을 보고, 그들 가운데 좋은 점을 서로 채워주고, 그런 세움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로마의 극심한 핍박, 황제를 섬기는 황제우상 속에서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여러분 교회 오시면서 날씨가 추웠지요? 안 추우셨어요? 딱 차 타고 나오려고 하다가 ‘아휴, 왜 이렇게 추워?’ 도로 들어갈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집에 다시 들어가서 텔레비전 보는 분도 있을 거예요. 아휴, 추운데 다음 주에 가지 뭐. 감사해요. 정말 아침에 7시 나오는데 춥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얼른 전화를 했어요. ‘여보, 당신과 아이들 나올 때 든든히 입고 나와요. 나와 보니까 엄청 춥습디다.’ 추운데 추위에도 무릅쓰고 나오셨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 더구나 1부에 임마누엘은 8시까지 나와야 되요. 1시간 전에 나와서 연습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런데 추위를 무릅쓰고 사명을 감당하느라고 일찍 나온 거 감사하지만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나오신 거 아니잖아요. 나 오늘 평안의교회, 죽기를 작정하고 간다. 그렇게 마음 먹고 오신 분들 없잖아요.

이 로마교회, 모이는 시간, 시간이 다 죽기를 작정하고 오신 분들이예요. 샬롬! 마라나타! 그들은 두가지를 인사했습니다. 샬롬, 평안했어요? 거기서 나오는 평안은 어젯밤에 평안했어요?가 아니라 이번 주일은 다 멀쩡했는데, 다음 주에 보니까 아무개 집사님이 귀가 하나 없어요. 아무개 집사님 팔이 하나 없어요. 아무개 집사님 눈이 하나 빠졌어요.

웬일이예요? 내가 지난 주에 로마군인에게 끌려가서 눈이 하나 빠졌어요. 팔이 하나 짤렸어요. 이런 극심한 핍박의 현장 속에서 그들이 모이면 샬롬!, 지난 밤 평안 하셨어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불타는 사모함이 있습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교회를 온다고 하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예요. 자기의 삶을 인생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교회 오는 이들이 어영부영하고 가겠습니까? 옆에 있는 성도를 대할 때 그냥 간단하게 대하겠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그들은 알아요. 내가 여러분들을 보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서로 세우고, 서로 격려하는 분위기가 있음을 듣고 감사합니다.

전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늘 이 로마교회에 아름다운 장점들이 평안의 공동체 장점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운데 선함이 있어요. 예수의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선하고 선량한지, 여러분들을 만날 때마다 어쩌면 얼굴이 그래요. 평안의교회 다니면 그런가요?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야 되겠지요.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되어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날마다 자라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능히 권하는 자임을 바울 사도가 확신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는 아름다운 세움의 공동체가 평안의교회요, 서로서로가 돌보아 주는 돌봄의 공동체가 평안의공동체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공동체가 되고나면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의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를 이렇게 인정해 주시고, 세워 주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선량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우리들을 이끌어 주셨을 때 우리로 하여금 일꾼 삼으셨어요. 바울의 고백처럼 충성되지도 못한데, 능하지도 못한데 능하게 여기고, 충성되이 여겨서 나로 일꾼되이 삼으셨어요. 그렇게 일꾼을 삼으셔서 뭐 하시겠느냐? 도대체 왜 나로 하여금 일꾼을 삼으셨느냐?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흘리신 이후에 이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잖아요. 저한테 기도부탁 안 하시잖아요. 목사님, 저 이런 이런 기도 있는데 대신 기도해 주세요. 카톨릭 신부처럼 대신 기도 안 해 주잖아요. 여러분들이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직고 하는 거예요.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여러분들이 어떤 자리에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제사장의 사명을 주셨다고 하면 제사장은 뭐 하는 것입니까? 제사장은 제사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뭐가 있어야 되요? 제물이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어요.

우리가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는데, 제물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제물을 무엇으로 주님이 원하시는지 아십니까?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해 동안 여러분들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고,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명을 주셨는데, 그 제사의 제물이 있어야 할 터인데, 주님은 우리에게 그 제물이 이방인의 제물을 원하셨고, 이방인의 생명을, 이방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제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전도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우리 직분 맡은 제사장이 해야할 몫입니다. 이방인의 영혼, 불신자의 영혼, 우리의 이웃들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주께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제사장으로써 이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충성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혀 관심도 없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제사장으로 삼으셨는데, 이방인의 제물을 드리기는커녕 우리 자신도 겨우 내 신앙, 내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기도 어려운 그런 연약함에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년에 또 우리를 부르셨어요. 충성되지도 못했는데, 충성되이 여기셨어요. 우리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목사로 주님에게 우리를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 결국은 이방인을 위하여 이방의 영혼을 위하여 열방을 위하여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명 2007년에 잘 감당할 수 있는 평안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이방인을 구원할 제사장의 직분을 주셔서, 주님 앞에 그 영혼을, 구원의 기쁨을, 구원의 감격을 주님께 전해드릴 수 있는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감당한 이들을 더욱 붙잡아 주시고, 감당치 못했으나 주님을 향한 부끄러움이 있고, 주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이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셔서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함께 하실 줄 믿사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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