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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성장의 7가지 걸림돌 세 번째 : 상처 (창 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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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성장의 세 번째 걸림돌, 상처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가난한 신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 한 장에 몇 백 원 밖에 안 하는 학교 구내식당 식권을 사지 못해서 밥을 굶어야 하는 신학생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가 되어 목회 잘 하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식권 살 돈이 없어 나중에 꼭 갚겠다며 외상 밥을 먹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중에 그 돈을 진짜 갚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분명히 갚았겠지요.

제 친구 얘기를 좀 하지요. 이 친구도 앞서 말한 그런 가난한 신학생이었습니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일찍이 집안에서 혼자 예수 믿고 신학교까지 오게 된 친구입니다. 집안도 가난했지만 혼자 예수 믿고 신학교 왔으니 집안에서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기에 이 친구도 식권이 없어 쩔쩔매곤 했는데 저도 넉넉지 않지만 가끔 식권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 둘이서 밥을 산더미처럼 받아와 세 명이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 친구가 반찬에 감자 고구마나 옥수수가 나오면 절대 안 먹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좋아해서 반찬으로 나오면 신이 나는데 그 친구는 그 먹을 것 없는 중에도 유독 이런 반찬이 나오면 저에게 주곤 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물어보니 이런 대답을 합니다. "너는 어려서 쌀밥 먹다가 감자 고구마 옥수수는 가끔 간식으로 먹은 거잖아? 나는 어려서 쌀밥 구경도 잘 못하고 만날 감자 고구마 옥수수만 먹고 살았어." 그 친구는 아마 지금도 이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안 먹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먹는 것 하나도 어려서부터 습관과 환경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비슷한 이유로 특정한 음식을 안 먹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절대 보리밥은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 보리밥만 보면 찢어지게 가난했던 옛날이 생각나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저의 큰 형님은 어려서 할머니가 집안에서 닭을 잡으며 목을 비트는 것을 보고는 닭을 안 먹습니다. 먹는 것도 이런데 하물며 어렸을 때의 좋지 않은 환경이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나 아픔이 그 사람의 평생을 따라다니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이나 신체적인 불편이 평생 한이 되고 그것이 씻을 수 없는 열등감이 되어 평생을 지배하기도 합니다. 찰스 휫필드(Charles L. Whitfield) 교수는 이렇게 어려서 받은 영향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를 지배하는 현상을 '성인아이'라고 불렀는데 놀랍게도 80~95%의 사람들이 성장과정에서의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거나 스스로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좋은 느낌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진단합니다. 소위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성인아이'의 증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충격적인 연구결과입니다. 휫필드 교수는 성인아이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데 여러분도 한번 자신에게 이런 증상이 있는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수치심, 굴욕감, 죄책감, 비판함, 망신을 줌, 지나친 농담, 비웃음, 괴롭힘, 교묘히 조종함, 속임, 희롱, 배반함, 상처를 줌, 잔인함, 얕봄, 협박, 선심을 씀, 위협함, 벌에 대한 두려움, 못살게 굶, 통제와 제한, 위축감, 제한적인 사랑, 진지하지 못함, 불신, 무력감, 못마땅해 함, 필요나 욕구에 소홀히 함, 약속을 위반함, 거짓된 희망을 품음, 일관성의 결여, 애매한 요구를 함, 억압함, 지나친 절제, 나는 다르다는 차별감 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증상은 보통 사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증상이 너무 심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을 사는 데 별 문제가 없지만 '성인아이'라 함은 이러한 증세가 심해져서 정상적인 삶에 지장을 주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내적인 상처는 우리의 육신이나 정신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쳐서 이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엄청난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은 우리의 영적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 세 번째로 바로 이 '상처'를 다루어보겠습니다.

상처의 원인 두 가지

그러면 제일 먼저 이러한 내적 상처가 왜 생기는가?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선천적인 가정환경과 부모의 영향입니다. 어떤 기독교 상담소 소장님이 쓴 글을 인용하지요.

"나이 서른다섯 살인 김 집사는 오랫동안 열등감과 좌절감에 시달려 왔습니다. 필자가 김 집사를 만났을 때 그는 자살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외가의 도움으로 좋은 직장을 세 곳이나 들어갔었지만 한 달을 못 채우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유는 직장 상사와의 싸움 때문이었습니다. 직장 상사의 가벼운 꾸중에도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김 집사를 용납해 줄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의 과격한 분노는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걸핏하면 아내와 자녀들에게 분노를 폭발시키고 때로는 폭력까지 휘두르곤 해서 가정에 불화가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화를 조절할 수 있지만, 병적인 사람은 자신의 화에 의해 지배를 받는데 일단 화가 발동하면 그 화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김 집사가 여기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김 집사로 하여금 그렇게 발작적으로 화를 내게 하고 그로 인해 죽음까지 생각하게 하는가? 그 원인은 김 집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표를 받아오는 날이면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고 저녁을 굶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구타와 욕설은 어린 아들의 성적을 더욱 떨어뜨렸고 이를 본 아버지는 미친 듯이 아들을 괴롭혔습니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른다섯의 나이로 접어들었는데도 김 집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 주변에 혹은 교회 안에 이런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는 분 안 계십니까?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혹시 나 자신이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어렸을 때의 가정환경, 특히 부모와의 관계는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이를테면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거나 폭력에 시달린 아이들은 나중에 자기 부모와 똑같이 배우자나 자녀를 학대하고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아주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자신을 학대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를 증오하며 "나는 나중에 절대 저런 부모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건만 불행하게도 이런 아이들 중에 나중에 똑같이 자기 자녀를 학대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가 나올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성적(性的)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외도를 해서 날마다 집안이 편안할 날이 없었던 아이들은 분명히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나는 절대 저런 남편이 안 된다," "나는 절대 저런 남자에게 시집 안 간다."고 굳게 다짐하건만 나중에 그런 남편이 되거나 그런 남자에게 시집갈 확률이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둘째, 후천적 인간관계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타고난 환경이 열악하거나 부모와 가정환경이 그 사람의 일생에 끼치는 영향도 대단히 크지만 이에 못지않게 후천적으로 자라나면서 인간관계 속에서 받는 상처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를테면 자라면서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생님 한 분 잘 만나 인생의 방향을 찾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폭력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교사를 만나 '학교' 하면 무조건 몸서리를 치고 아주 나쁜 인상을 가진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결혼한 후에 자기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받는 상처도 큽니다. 부부가 살면서 어찌 서로에게 조금도 상처를 안 주고 살 수 있겠습니까마는 어떤 부부는 그러면서도 금세 서로 화해하고 서로를 보듬으면서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부부는 날마다 서로를 긁으며 삽니다. 서로 감정이 상하다보니 상대방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무시당해서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분도 보았고, 실패해서 고통당하는 자녀를 보고 더 큰 고통을 겪는 부모들, 자녀를 앞세워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그 한을 한평생 가슴속에 울분으로 안고 살아가는 부모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직장생활에서 만나는 상사나 동료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이웃들 때문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잠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 바로 교회 안의 인간관계에서 받는 상처입니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아 영적으로 방황하고 심지어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신앙을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같은 성도들끼리 상처를 주고받기도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면 몰라도 이렇게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으면 정말 실망도 크고 그래서 더욱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경험 안 해 본 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상처의 결과 세 가지

자,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선천적 후천적으로 받는 상처들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위에서 소개한 김 집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세 가지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첫째, 어른들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 자신에 대한 극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상처는 그 사람의 정서와 영혼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내적인 상처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 분노입니다. 상처가 깊어지면 분노를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이 분노는 가시와 공격성으로 나타납니다.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남을 찌르고 공격성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화는 날 수 있지만 이런 분들은 조금만 화가 나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공격성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언어생활로 이 분노가 나타납니다. 틈만 나면 가시 돋친 말로 다른 사람을 긁어 놓습니다. 항상 남을 비판하는 말을 즐겨 하고, 냉소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런 분이 교회나 구역에 한 사람만 있으면 온 교인들이 다 상처 받고, 온 구역식구들이 다 고통당합니다. 물론 자신도 그것을 알기에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하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에게 엄청난 분노를 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야곱이 요셉을 지나치게 편애했습니다. 그 까닭은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첩 중에 가장 사랑한 라헬이 낳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에 대한 감정이 자식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미워하는 감정 때문에 그 아내가 낳은 자식까지 미워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을 낳다가 아내가 죽었는데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것이 다 자식 때문이라며 그 아들을 미워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야곱이 열 두 아들 중 라헬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만 지나치게 편애해서 그 중에 요셉에게는 채색옷까지 지어 입힙니다(창 37:3). 형들은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이 채색옷을 볼 때마다 아마 속이 뒤집혔을 것입니다. 결국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결국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수염소의 피를 묻힌 찢긴 채색옷을 들고가 요셉이 맹수에게 찢겨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창 37:29~35). 아버지의 편애가 아들들에게 상처가 되고 그 상처는 결국 무서운 분노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분노는 요셉과 아버지, 그리고 누구보다 자기들 자신에게 큰 아픔이 됩니다. 동생을 그렇게 하고 형들인들 어디 평생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그러니 그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도 분노의 피해자가 되지만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둘째, 불신입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남을 잘 믿지 못합니다. 물론 자신도 믿지 못합니다. 이것이 열등감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남을 못 믿으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상적인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이 어렵습니다. 항상 의심하고 강박적으로 남을 확인합니다. 당연히 일을 남에게 잘 맡기지도 못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남을 못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오기도 힘듭니다. "나를 믿지 내가 누굴 믿어?" 하면서 마음 문을 잘 열지 못합니다. 또 교회를 나오더라도 정말 신앙이 깊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마음에 불신감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도 전적인 신뢰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셋째, 열등감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불신이 자신을 향할 때 열등감이 됩니다. 무엇을 해도 자신감이 없습니다. "나 같은 게 뭘 해?" 하면서 열등감을 자꾸 쌓아갑니다. 남들이 별 생각 없이 한 말에도 쉽게 상처 받고 자존심을 상해하는 예민남 예민녀가 됩니다. 남이 격려를 해줘도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며 화를 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이 열등감 때문에 지나치게 남의 눈치를 살펴서 남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가 바로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비록 애굽 궁정에서 왕자로 자랐지만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고, 애굽 사람을 죽인 후 살인자가 되어 쫓겨 다니면서 모세의 마음속에는 깊은 열등감이 자라게 되는데 바로 이 열등감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 하실 때도 계속해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나 같은 게 뭐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한다는 말입니까?"(출 3:11)라고 말하고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믿어 줄 것"이라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열등감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상처의 치유방법 세 가지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상처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고, 불신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열등감에 눌려 살게 되는데 그러면 이 상처를 도대체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상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감추려고 합니다. 애써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상처는 워낙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어서 감출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습니다. 감추어진 듯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와 남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요, 나 상처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인정하고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 349장 후렴처럼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고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1995년 <위장된 분노의 치유>(규장)라는 책이 6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최현주라는 이름의 목회자가 8년 동안 목회하면서 상습적으로 사모를 폭행하다가 치유 받은 과정을 털어놓은 자기고백서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문화권에서 목회자가 자기치부를 실명으로 드러낸 것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상습적인 폭행의 피해자였던 이선애 사모는 남편이 나쁜 사람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남편이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폭력 속에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 남편을 가해자가 아닌 불행한 과거의 피해자로 이해하면서 치유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내 놓으십시오. 아내와 남편에게, 자녀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내 놓아야 치료됩니다. 목회자에게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말 안 해도 다 아시지요?" 하지 말고 직접 고백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을 해야만 그때부터 진정한 치유는 시작됩니다.

둘째, 예수님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이해해야 치유가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분입니다. 처참하게 채찍질을 당해 온몸이 찢기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서 온 몸의 물과 피를 남김없이 쏟고 죽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들보다 많이 받았다 한들 예수님만큼 상처 받은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상처를 받았을까요? 여러분도 아시지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주님 앞에 내 상처를 다 드러내 놓으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 참 상처 많이 받았구나. 정말 아프겠구나. 지금까지 그 깊은 상처 안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 많이 했니? 그런데 나는 너보다 다 큰 상처를 받았단다. 바로 너의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 이제 다 내려놓아라. 내가 널 위해 대신 상처 받았으니 나한테 다 내려놓아라."

셋째, 나의 상처를 가지고 남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상처를 받으셨고 그 상처로 인해 내 상처를 치유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도 내 상처를 통해 오히려 남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이 자기 정체를 알고 두려워 떠는 형들 앞에서 한 말이 나옵니다. 5절을 보세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엄청난 상처를 받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그 아내에게 무고를 당합니다. 감옥 속에서도 그를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잊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 때문에 상처 받습니다. 평생 동안 남에게 상처 받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형들을 이렇게 용서합니다. 왜일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나도 예수 믿고 나한테 상처 준 사람들을 좀 용서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되지 않습니까? 요셉은 자신의 상처가, 자신의 불행이 결국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아버린 것도, 보디발의 아내가 자신을 무고한 것도 결국 하나님이 형과 가족들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게 하려는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았기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상처가 많으십니까? 나한테 상처 준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이 무조건 용서가 안 되니까요. 하지만 이것을 깨달으면 가능합니다. 내가 상처 받은 이유는 이 상처의 경험을 통해 같은 상처 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라는 뜻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혼의 아픔을 경험한 여자 분이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처음에는 분노와 불신과 열등감 때문에 신앙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차츰 주님을 만나 치유를 받고 어느새 구역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혼한 여자가 무슨 구역장이냐고 사람들이 수군댈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구역에 온 새신자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자기와 똑같이 이혼을 경험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 여인과의 만남이 시작되는데 지금까지 그 여인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 구역장이 자기와 같은 처지라는 말을 듣고 금세 마음을 열어 치유가 일어나고 주님을 영접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치료자'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상처와 불행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용서하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세상 그 누구도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의 상처를 이용해 '상처 입은 가해자'가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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