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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캄캄한 이 땅에 소망의 빛을 비추자! (사 6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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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사회가 과거에 비해서 현저히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년 사이에 자살률이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는 해외 이민 신청자 수가 날로 날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이 두 가지 모두가 역대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작년만해도 한해에 8천명이 자실을 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수보다 웃도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OECD 국가 중에서 4번째로 많이 자살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외로 이민가거나 유학가는 사람이 최근 2-3년에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겠습니까?
모든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는 우리 사회가 희망을 잃어버린 때문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인들도 희망이 없다고 너무 고통스러워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젊은 청년들도 구직을 해도 잘 되지 않아 희망을 잃고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아파트값이 급상승으로 사회전체에 상대적 박탈감이 절망감으로 많은 서민들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돈을 아무리 모아도, 착실하게 일하여 돈을 모아도 이제는 내 집을 마련할 수 없고 전세 값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고 초조하게 내가 언제 직장에서 쫓겨나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이 모든 백성들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바다이야기라는 사행성 오락이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은 도박공화국이라는 불명예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사행성 오락들이 성행하는 나라가 되고, 문만 열면 장사가 잘되는 그런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까? 소수의 사람이 거기에 들락거려야지요. 왜 전국의 수천 개의 바다이야기 오락실에 수많은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겠습니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을 때 요행을 바라는 심리적 요인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착실하게 살아도 희망이 있는 사람은 그런 곳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결코 기웃거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들 때는 혹시나 하는 요행심 하나에 기대를 걸고 로또에 또 사행성 오락에, 도박에 기대를 걸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희망을 잃고 어두운 절망의 터널 속에서 의욕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를 한숨과 탄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절망감의 확산이라는 것이 이 사회의 어두운 모습입니다.

무엇으로 치유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사회를 무엇으로 살릴 수가 있으며 어떻게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유명한 사회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호모에스페란스’, 즉 희망의 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인간은 갈대와 같이 약해보여도 희망 하나만 있으면, 다른 것 다 잃어버려도 희망있는 사람은 넉넉하게 이겨나가고, 승리의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있는 환자도 나도 고침받을 수 있고 건강해 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때 치료의 효과가 놀랍게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잭 캔필드라는 사람이 쓴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전립선 압을 치료하는 아주 친한 친구사이인 의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와 나는 거의 같은 의사를 치료하는데 똑 같은 약을 사용하여 환자에게 주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치료하는 환자는 22%밖에 치료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당신이 맡은 환자는 어떻게 76%의 치료효과가 나타나는가?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네”라고 했을 때 높은 치료효과를 나타내는 의사가 말했습니다. “나도 자네가 처방하는 그대로 환자에게 처방하고 똑같은 약을 주고 있네. 그런데 자네는 아마 틀림없이 이약을 환자들에게 줄 때 ‘이 약은 어제도 먹은 에포라는 약입니다’라고 했을 거네. 하지만 나는 통계상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환자들일지라도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바꾸어서 약을 주네. ‘여기 당신의 희망이 있습니다. 이 약을 열심히 먹으세요. 그러면 당신도 희망이 있습니다.’” 약을 준 것이 아니라 뭘 줬어요.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사의 환자는 76%의 치유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아플 때는 기도 많이 하세요. 좋은 의사 만나게 기도하기 바랍니다. 좋은 의사 만나면 아주 달라집니다. 우리가 병이라는, 죽음의 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병을 이깁니다. 희망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또한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큰 실패와 시련을 경험하더라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 실패를 기꺼이 극복하고 그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 가서 성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강철왕 엔드류 카네기가 젊은 시절에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가운데 어느 시장의 집무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벽에는 낡은 그림 하나가 걸려 있었습니다. 썰물로 물이 다 빠져나간 바닷가 모래위에 낡은 배 하나가 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글귀 하나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글귀는 “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그 의미를 세기면서 쳐다보고 있을 때 그 시장님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스물여덟살 청년시절에 거듭실패하고 절망가운데 있을 때 사무실에 있는 저 그림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고 새힘을 얻게 되었네. 희망을 가지게 되었지. 왜냐하면 썰물때처럼 다 내곁을 떠나가지만 언젠가는 밀물처럼 내게로 다 올것이다는 희망을 가졌지. 그래서 오늘의 내가 시장이 될 수 잇었네.” 카네기도 그 그림을 보고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철왕이 되었고 미국을 움직이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를 좌절하게하고 절망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밀려오지만 우리 속에 희망이 있을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유태인으로 스위스의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그 무시무시한 나치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서 자유의 몸이 되었고, 나중에는 세계를 다니며 희망을 전하는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거의 다가 죽어나가는, 600만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문과 무서운 형별, 비인간적인 학대속에서도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 나도 살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나를 그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게 만들었다. 희망이 나를 견디게 만들고 이겨내게 만들었다.” 그는 이 말을 통하여 낙심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희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10,26사태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김계원비서실장입니다. 그 분이 재판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항소를 해서 재심을 해서 결과가 나왔는데 무기징역이었습니다. 그 부인이 집사였는데 가족들이 마지막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하노라’고 했을 때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기징역이라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희망 때문에, 무기징역이라는 이 말 한마디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온 가족들이 박수를 쳤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희망만 있으면, 희망이 그 속에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그 사람은 반드시 이겨내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희망을 잃을 채 절망의 먹구름이 사회를 뒤덮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들에게 희망의 밝은 빛을 비춰줄 수 있겠습니까?
정부가 희망이 되겠습니까? 재벌이 희망의 빛을 비춰줄 수 있습니까? 지도자가 한 마디 하면 집값이 더 올라갑니다. 이 사회 백성들은 더 좌절감을 빠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까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하고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성도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일어나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일어나 빛을 발하자.” 이 어두운 세상, 캄캄한 세상, 이 속에 빛을 비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이런 어두움이 이 사회를 뒤덮을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서 절망의 어둠에 빛을 던져서 희망을 심어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성도의 사명은 소망의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절망이 만민을 가리 울 때 세상에 희망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교회와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모습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사에서 여러분을 볼 때, 가정에서도 여러분을 볼 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도 수능시험을 쳤습니다. 기대보다 10점. 20점. 50점. 100점이 실수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이 때 믿음의 아버지가, 믿음의 어머니가 절망한 자녀의 가슴에 희망을 밝혀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닫자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절망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모든 희망을 거두어 가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마다 여러분을 통하여 희망을 얻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세요. “주여! 내가 살아가는 사람의 공동체 안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에게,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나를 통하여 희망을 주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뜨거운 기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밝게 드러납니다. 절망이 클수록 그리스도인의 빛은 더욱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으로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연탄길”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소중한 희망이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삼층벽돌집이 있는데 일층에는 화가가 화실을 운영하고 있고, 삼층에는 얼마전에 한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가 들락날락하면서 보니까 삼층의 아주머니는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쪽 눈을 감고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화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비오는 날 화실에 삼층 아주머니가 들어왔습니다. 그 때 자세히 보니까 등에 업고 있는 아이의 눈이 하나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눈이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얼마후 그 아주머니가 아기의 사진을 내어놓으며 “화가 선생님, 우리 아이의 사진을 잘 그려주세요.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일그러진 한쪽 눈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주세요.” 얼마 후에 화가는 그림을 그려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 아주머니가 화가를 자기집으로 초청했습니다. 화가가 그 집에 갔더니 거실 한쪽 벽에 자신이 그려준 그림이 걸려있었습니다. 아기가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환하게 웃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때 그 엄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아기가 조금만 더 크면 내 눈을 아기에게 이식시켜 줄 겁니다. 그러면 우리 아기는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겠지요. 제가 지금 한쪽 눈을 감고 생활하는 것은 얼마후에 내 아이에게 눈을 주고 난 뒤에 내가 그 한쪽 눈만 가지고 익숙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지금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화가는 굉장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여인이 한 쪽 눈을 감고 다닌 이유를 알게 되었고, 또 엄마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아기의 희망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기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희망을 주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과연 누구에게 희망을 주었습니까?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우리는 절망으로 가득한 캄캄한 세상에 희망을 빛을 비춰줘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절망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빛을 발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보고 빛을 발하라고 했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빛을 비출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비출 빛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오늘 말씀은 말씀합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스스로 비출 빛이 없습니다. 우리가 비출 빛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빛인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번 1-2절을 보겠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여호와의 영광,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임했으므로 그 빛을 반사하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 속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통해서 이제는 절망을 거둬버리고 빛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빛 가운데로 나오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죄악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 죽어 멸망할 사람들에게 영생의 희망을, 구원의 소망을 주신 분이고, 죄악으로 타락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희망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위해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산 소망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산 소망,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죽음이 눈앞에 닥쳐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다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살아가실 때도 그 시대의 소외된 사람, 정말 사회주변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꺼이 친구로 만나주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면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예수만 만나면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38년된 병자, “나를 들어 물에 던져넣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자기 절망과 어둠속에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도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희망의 미래를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소경된 자를 보게 하시고, 앉은 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시대에 희망을 잃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은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사61:1-3)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아무리 절망의 상황, 아무리 캄캄한 상황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만 만나면, 그리스도가 내 심령에 오시면 나는 그 시간부터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그 때 웃음을 찾고 여유를 찾습니다.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심령에 믿고 소유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빛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단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사람 되지 마십시오. 얼굴모습 하나도 남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고,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빛입니다. 희망의 빛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인 것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이 뭡니까? 복된 소식, 희망의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이요, 희망의 빛이라는 얘기입니다.

그 어떤 가난한 자도, 그 어떤 실패한 자도, 그 어떤 죽을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자라도 예수를 만나면, 예수의 복음이 그 속에 들어가면 지금까지는 병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며, 고통과 탄식속에 있었을지라도 하늘 나라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미 죽음의 문제를 극복한 것입니다. 산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사회가 복이 있다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많은 지도자들 중에서 총칼로 나라를 빼앗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특별히 링컨같은 사람은 절망과 시련의 구렁텅이를 수없이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성공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지금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링컨이 살았던 켄터키의 오두막집으로 갑니다. 왜냐?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링컨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는지 아십시오. 20대부터 시작해서 1860년 대통령이 되기까지 하원의원, 주의회 위원, 상원위원, 부통령 선거 등에서 얼마나 많이 낙선했는지 모릅니다.
1831년에 사업에 실패했고, 1년 뒤 1832년에 그는 주 의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했고, 1833년 다시 사업에 실패해 17년간 빚을 갚느라고 고생했고, 그리고 1834년 간신히 주 의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2년 뒤 1836년 그는 신경쇠약증 환자가 됩니다. 그리고 1838년 하원의장에 낙선했고, 1843년 국회의원에 낙선했고, 1846년 간신히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지만 1848년 또 다시 국회의원에 낙선했고, 1855년 상원의원에 낙선했고, 1856년 부통령에 낙선했지만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후일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걸은 길은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주 미끄러져 길바닥에 넘어지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괜찮아, 길이 약간 미끄럽긴 해도 낭떠러지는 아니잖아.”
왜 끝이라고 생각하고 탄식하십니까? 하나님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링컨의 손을 붙들고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주셨습니다. 그 링컨은 백악관에 들어가서도 백악관을 기도실로 바꾼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통령이, 장관이, 국회의원이, 시련을 통과하면서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이렇게 살아가십시오”라고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가르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이 절망한자, 실망한 자, 실패한 자, 병든자에게 유일한 희망이요, 복음이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것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희망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 우리가 붙들면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내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고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는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빛을 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교회의 사명입니다.

한 가지 중요한 얘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냥 예수 믿지 마세요. 사명 깨닫지 못하고 그냥 내 집안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런 천박한 사람되지 마세요. 장래 복이 없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저는 아주 천박하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시시껄렁한 그리스도인되지 마세요.
120년 전만해도, 이나라 조선 말년 고종이 치리할 때 쇄국정책으로 이 나라는 정말 어두웠습니다.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쇄국으로 외국의 모든 것에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너무 가난했습니다. 고작 120년 전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1885년에 공식적으로 선교사님이 들어오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 나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부흥과 발전을 경험했습니다. 금년에는 3천억불의 수출을 달성한다고 합니다. 1964년도에 1억불 달성했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했는데 고작 40여년만에 삼천배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십여년전부터 교회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경제는 성장하는 것 같은데 십여년전부터 지속적으로 서민의 삶에는 어두운 그림이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절망감은 확산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좌절에 빠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시들어지고, 교회가 부흥을 멈추고, 교회가 약해지면서 이 나라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명으로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 나라, 이 사회가, 이 백성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꿈이 있는 나라 희망의 나라로 새로워지려면 교회가 살아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회복되고 부흥이 일어나서 이 땅에 새로운 예수 운동이 일어나야 될 줄로 믿으시기기를 축원합니다.

따라합시다.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예수 운동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가슴으로 소리치세요. 이 소리가 우리 가슴속에서 터져나와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와야 합니다. “주여! 이 절망의 땅에, 이 절망의 먹구름이 예수 그리스도 소망의 운동을 통하여 걷혀지게 하옵소서.” 누가 할 겁니까?
한국 교회의 천만성도가 일어나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을 전하고, 소망의 복음으로 빛을 발하게 될 때 이 땅의 절망의 먹구름은 걷혀지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 축복의 나라로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회복합시다.

우리가 소망의 빛을 비출 때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2006년도 알곡추수의 주제는 “희망과 회복의 축제”입니다. 소원을 가지고 외치세요. ‘주여 나를 통해서 이 땅에 희망을 주시고, 절망으로 쓰러져가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한 달 동안 뜨겁게 기도하세요. “내가 희망의 빛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나를 만남으로 희망을 가지게 하옵소서. 절망의 가정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따라합시다. “일어나자. 빛을 발하자.”
뜨거운 소원이 되십시오. 그래서 이제 한달 동안 이 해가 지나가기 전에 절망의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으로 생명의 소망을 주고 회복시키는 많은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히 맺혀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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