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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이 기념하신 일 (마 2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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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는 다섯 개의 가르침 단락과 다섯 개의 이야기 단락이 교대로 진행됩니다. 가르침 단락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라는 구절과 함께 이야기 단락으로 전환됩니다. 이제 1절을 보면 “이 모든 말씀”이라 해서 모든 가르침 단락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모든 이야기 단락도 역시 끝났습니다. 남아있는 26-28장은 왕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악행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서로 엮여서 진행되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또 이 과정 가운데서 왕께서 복음과 함께 기념하게 하신 일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때는 유월절 이틀 전입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2) 유월절은 유대 월력으로 니산월 14일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해질녘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구운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은 음식을 불에 태우고 급히 출애굽 했습니다(출 12:6-10). 애굽 땅의 모든 장자와 초태생 짐승이 다 죽었지만 문설주에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逾越, Passover)이라 했습니다. 다음날인 니산월 15일부터 일주일 동안이 무교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월절 양으로 오셨습니다. 이제 이틀 후면 체포 되실 것이고, 택하신 백성들을 죄와 심판의 죽음으로부터 구출하시기 위해서 피 흘리실 것입니다. 지금의 달력을 기준으로 보면 목요일 저녁에 체포되셔서 금요일 돌아가신 것이라 이틀에 걸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루를 해지고 나서부터 다음 해질 때까지로 계산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체포되어 그 날에 돌아가신 셈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구약 성경에서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통해서 그림자처럼 미리 예고하셨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셨던 그 일의 성취과정에서 세 부류의 출연자들이 각기 다른 역할을 합니다.

첫째는 유월절 양을 도살할 역할을 하는 유대 당국자들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이며 기회를 노려서 죽이려고 모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월절과 무교절로 이어지는 큰 명절에 예수를 체포하기 원치 않았는데, 예루살렘에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는 때여서 그들을 자극하면 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4-5)

둘째는 메시아의 죽음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기념할 만한 역할을 했던 한 이름 없는 여인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6-7). 이를 본 제자들은 분개하면서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했습니다(8-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10-12)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제자들의 관심은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다만 그 관심이 지나쳐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순수한 헌신마저 낭비로 비난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로마 식민치하에서 벗어나고픈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자들은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예고의 말씀을 마음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늘 돈 없고 힘없는 서러움을 겪었던 그들의 눈에, 주님께 드려지는 여인의 헌신조차 아깝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당신님의 죽음을 예비한 일로 칭찬하셨습니다. 오직 그 여인만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예고에 마음을 기울였고, 그 분의 죽으심을 예비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13)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은 우리가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난과 억압된 삶의 조건들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왜 이처럼 여인이 행한 일을 기뻐하시며 기념하라고까지 하셨을까요? 삶의 현실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일이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임을 여인이 잘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될 죄인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광이 “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이신지, 동시에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이신지, 또한 얼마나 지혜롭고 오묘하신 분이신지, 얼마나 전능하신 분이신지 드러냅니다. 이처럼 “이 복음”은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서 참으로 영광스럽게 여김 받으시도록 하는 것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한결같이 ‘자신을 위한 주님’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더 이상 자기들을 위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 유다는 배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머지 제자들 역시 주님의 죽음 앞에서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름 없는 이 여인은 ‘주님을 위한 자신’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을 감지하고서도 평생을 모은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복음은 자주 삶의 고난과 괴로움을 해결해 주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고, 주님에 대해서도 ‘자신을 위한 주님’이라는 의식이 많습니다. 많은 찬양들도 그런 의식 속에서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연단되어 있으면, 더 이상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복음과 주님을 버리게 됩니다. 복음과 주님을 위한 헌신 역시 아까운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주님을 위한 자신’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엄두도 못 낼 헌신을 하곤 합니다. 그런 역사의 인물들은 이 여인처럼 지금도 복음과 함께 널리 기념되고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역할을 한 가룟 유다입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민란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명절 이후에 처치하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앞당겨 명절에 처형할 수 있었던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14-16)

유다는 ‘자신을 위한 주님’이라는 생각의 극단적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생각하시는 주님께 실망했습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그런 분을 믿고 의지했다는 것에 손해의식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그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대중의 눈을 피해 은밀히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기 때문에 유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은 삼십을 주었습니다. 유다가 그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우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부터 그는 대중의 눈을 피해 예수님을 넘겨줄 적절한 기회를 찾았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예수님은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체포되어 성공적으로(?) 돌아가셨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언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의 섭리하시고 경륜하시는 지혜가 드러납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명절에는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으려고 계획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가룟 유다가 적극적으로 넘겨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체포 일정을 앞당겼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유다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그 날에 넘겨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욕심을 쫓아서 넘겨주기 가장 좋은 시기를 노리고 있었고, 예수께서 제자들 중에 한명이 배반할 것을 유월절 만찬에서 예고하시자 일이 들통 난 것을 알고 서둘러 밀고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각기 자기 욕심을 따라서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였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급하게 계획을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100% 자기 판단과 자기 의지대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인간의 마음을 로봇처럼 조종하신 일이 없습니다. 인간들의 악한 생각과 계획 속에서도 전혀 방해받지 않으셨고, 인간의 선한 행위에 도움을 받으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얽히고설킨 많은 사건들 가운데서 100% 당신님의 뜻이 성취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표면적으로는 적대자들의 음모와 유다의 배반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일의 성취였습니다.

잠언 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계획도 쓰시고 선한 계획도 쓰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하신 일을 성취하시고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계획은 악한 계획대로 선한 계획은 선한 계획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 당국자들과 가룟 유다의 행위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긴 했지만, 그 일은 칭찬받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헌신한 사람은 칭찬받고 기념으로 남을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일에 헌신하는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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