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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5) :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호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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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5 :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5-7)

I. 본문의 배경

호세아 선지자는 주전 8세기 중엽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을 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북 왕국 출신의 선지자였으나 남 왕국 유다의 시대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언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북 왕국 사람이었으나 신앙적으로는 남 왕국 유다가 중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여로보암 2세 치하의 시대로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융성하던 때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경제적인 부의 축적은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유할수록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자비를 행하는 삶 등은 망각되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매우 특별하게 예언 사역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만 선포하던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그 시대를 향한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널리 알려진 음란한 여인에게 장가를 들어 자식들을 낳았으며, 그 여자를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음란한 여인 고멜이 남편을 떠나 방탕하게 되었을 때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남편과의 평화가 깨어진 가운데 방탕한 여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신자들의 비참한 모습도 읽을 수 있습니다.

II. 하나님과 혼인한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순결한 선지자 호세아를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그 맺은 혼인 언약에 충실하여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는 수시로 남편을 배반합니다. 두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과의 혼인 언약을 끊임없이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함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땅으로 인도하시던 때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예루살렘 거민의 귀에 외쳐 말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네 소년 때의 우의와 네 결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렘 2: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자신과 혼인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사랑하며 한 가족을 이루시는 것처럼 당신의 통치를 이스라엘에 구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혼인으로 묘사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로 혼인 언약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혼인으로 묘사하셨을 때, 그 핵심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향유하고자 하는 마음과 정신의 지속적인 움직임”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관계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그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선택할 백성들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목적적(目的的)사랑’과 그리고 ‘박애적(博愛的) 사랑’입니다. 첫째로는 ‘목적적 사랑’입니다.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즐거워하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자아내고, 거기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 ‘목적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로는 ‘박애적 사랑’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없거나 충분하지 않은데도 사랑하는 주체의 사랑의 특성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경우인데, 이를 가리켜 ‘박애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혼인 언약은 동행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관계를 혼인 언약으로 묘사하신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의 약속이며 요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최대의 언약은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였습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 하나님과의 동행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임마누엘(lae( WnM'î[i)’이었습니다. 혼인 언약은 이제 서로를 아내와 남편으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겠다는 약속입니다. 인류의 첫 번째 혼인에서 이 같은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의 고백 속에 나타납니다.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창 2:23). 이것은 바로 아내와 남편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동행의 극치입니다. 육체 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합일된 가운데 이루어진 “함께 삶”이었습니다. 방탕한 아내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끊임없는 사랑은 이처럼 그녀와 함께 살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약 관계에 충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의무의 이행이 아니라 운명처럼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신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셋째로, 혼인 언약은 ‘정절(貞節)’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당신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적인 교통에 있어서 그 백성들은 하나님과만 교제 하여야 했으며, 그것은 바로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정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과 정신의 작용이 오직 한분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의 가장 결정적인 표현이 바로 신앙의 정절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요구하시고, 다른 신들과 교제하지 말도록 부르신 것은 바로 정절에 대한 요구입니다.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 5:7). 물론 구약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이 우상을 섬길 위험에 있는 신자들은 매우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으니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넷째로, 혼인 언약은 ‘헌신(獻身)’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당신에게 헌신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언약 관계 안에서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헌신하듯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여야 했습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자신의 계획으로 받아들이며, 자기를 선택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유용한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과도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며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이 구원의 언약은 곧 혼인언약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르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멀어질 것이며, 참된 사랑의 연합에서도 멀어져 갈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지라도 그것을 가혹하다고 불평하거나 원망할 수 없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외아들을 주시는 헌신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혼인 언약의 의무를 다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신 모습을 고멜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사랑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처절한 사랑으로 자신을 버리고 방탕한 길을 가는 고멜을 사랑하여야 했으니, 이는 신적인 강제력을 지닌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을 따라 하나님 앞에 혼인 언약을 지키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행음하며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음란하게 이방의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물로도 끌 수 없고, 세상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타오르는 불과 같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우리를 섬기며 사시고 죽으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것들을 섬깁니다. 특별히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모든 삶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배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끊임없이 혼인 언약으로 다시 부르십니다. 우리가 그 언약에 충실할 때에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파기할 때에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남편 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참 행복인 것입니다.

III. 혼인 언약의 파괴

신령한 선지자 호세아의 음탕한 아내 고멜은 혼인 언약을 파기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혼인 언약을 파기한 고멜의 비참한 결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혼인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품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 밖에서 찾는 행복에 대한 모든 기대는 너를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훌륭한 남편인 호세아 선지자를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돌며 이 혼인 언약을 파기하게 된 고멜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결말은 또 어떤 것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5-7).

A. 육욕을 따라 살아감

첫째로, 혼인 언약을 파괴한 동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음란한 여인 고멜이 선지자와의 혼인 언약을 파기한 것은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다른 대상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호 2:5). 보십시오. 그녀는 아마도 선지자의 가정을 꾸려나가며 가난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보다는 풍족한 물질생활을 더 원하였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영적이며 정신적인 것 보다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관심사는 자신의 영혼과 정신이 아니라 육체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보다 더 유족한 삶, 여유로운 환경, 넉넉한 물질적 생활에 마음이 빼앗겼습니다. 고멜이 말하고 있는 이러한 묘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숭배하였던 동기를 반영해 주는 또 다른 묘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서서 가장 광범위하게 섬겼던 것은 바알 종교였습니다. 이 바알 종교는 농경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종교였습니다.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위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비를 적기(適期)에 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이것을 통해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강수량이 많지 않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제때에 비가 오는 것은 풍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이른 비는 파종을 위하여 내리는 비이고, 늦은 비는 마지막 결실을 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욜 2:23). 특별히 이 바알 종교는 그 제의(祭儀) 속에 성적인 제의행위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산위에 있는 바알 신당 곁에는 많은 신전 창녀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러 올라간 사람들은 제물과 함께 신전 창녀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써 바알을 자극할 수 있었고, 이러한 자극을 통해 바알은 비를 내리고 농사를 풍요롭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강력한 유혹이 되었습니다. 농경사회의 번영을 이루기 위해 제사를 드릴뿐 아니라 그 제사 속에서 육욕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매력은 매우 큰 힘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농사의 번영을 위해 바알 종교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후에는 그와 함께 육욕을 만족시키는 것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고멜은 바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남편과의 혼인언약을 파기하고 다른 남자들을 섬겼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고멜이 찾아간 곳이 바로 이러한 신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적으로 봉사한 대가로 약간의 물질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고멜에게 그런 물건들을 건네줄 사람들의 손에 있는 것들도 하나님이 제때에 비를 내려 주셨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호 2:8).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그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당신에게 속한 모든 좋은 것들을 우리를 위해 선물로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매우 인색하신 분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실 수 없는 무능한 분이거나 모든 것을 주시기를 아까워하시는 인색한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모든 것들을 얻는 대신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얻게 되는 모든 좋은 것들도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찌 그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신앙을 버리고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죄에 대한 사랑이 가져다 준 속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도록 하나님과 혼인하였고,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기다리는 모든 신자들을 신랑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처녀로 비유하였으니, 이는 곧 계시록에서 말한바 하나님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 이상의 행복을 얻기 위해 신앙을 버리는 일을 성공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B. 그 길을 막으심

둘째로, 육욕(肉慾)을 따라 살아간 결과입니다. 고멜이 처음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 방탕한 길을 갔을 때, 그 마음에 있는 소원은 그러한 행동을 통하여 물질의 복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의지하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공급받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것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신실한 사랑을 버리고 방탕한 길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가장 좋은 것을 잃어버린 것이었으며, 그것을 버리고 얻을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사실 무가치한 것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같이 어리석게 행하였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큰 능력으로 구원해 내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누가 그들을 그 큰 능력으로 구원하셔서 광야로 이끄셨습니까? 결핍과 시련으로 가득 찬 광야의 길에서 다함없는 능력과 은혜로 그 길로 보호하고 인도하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들에게 심지 않은 포도원과 짓지 않은 집을 주신 분이 누구셨습니까? 바로 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육욕을 따라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호 2:6). 여기서 ‘가시’와 ‘담’은 고난과 역경을 의미합니다.

1. 가시를 두심

첫째로, 가시로 그들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는 고난 혹은 고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욕을 좇아 하나님을 버리는 삶을 살았을 때에, 처음에는 그 길이 순조로운 것 같았으나 육욕을 만족시킨 그 기쁨들이 결국은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성경에서 선택된 백성들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이 가시는 하나님의 징계나 혹은 그로 말미암는 고난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살아갈 때, 그것은 끊임없는 고통과 징계의 채찍을 불러 옵니다. 육욕의 만족을 얻으려다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언약관계를 파기하고 하나님보다 이방의 신들을 더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가는 길을 순조롭게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상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들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파기된 언약 관계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언약 관계로 다시 부르시기 위해 그들의 길에 가시를 두십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혼인 언약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그 기쁨과 즐거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고 육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런 징계는 그들을 다시 언약 관계로 불러들이시는 하나님의 성심스러운 화목에로의 초청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욕을 따라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달려가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길에 가시를 놓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보복(報復)의 마음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당신과의 관계 속으로 부르시는 애절한 사랑인 것입니다.

여기서 ‘가시’는 특별히 하나님을 떠난 자의 내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내적 고통은 하나님을 떠난 자의 내면의 세계에서 가시와 같이 그의 마음에 평안을 앗아가고, 양심을 찌르며, 영혼에 고통을 줍니다. 그의 환경이 아직 역경을 만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의 마음과 내면의 세계는 큰 고통과 처절한 찔림 속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혼인 언약을 파기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에 대한 언약 백성들의 경험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하는 그들의 영혼의 상태를 정확히 반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양심과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만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기 때문에 자신의 죄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올바르게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마음과 영혼이 질서를 잃어버림으로써 과도한 율법의 정죄와 양심의 송사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있을지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언약 백성들의 마음과 영혼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평화로운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지 마십시오. 그 은총과 사랑 안에서 사는 것으로 영혼의 즐거움을 삼으십시오.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 안에서 누리는 행복을 최상의 것으로 여기십시오. 또 다른 종류의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모든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길입니다.

2. 담을 쌓으심

둘째로, 하나님과의 혼인 언약을 파기한 자들 앞에 담을 쌓으십니다. 이는 역경을 의미합니다. 가시가 내면의 고통을 의미한다면, 이 담은 하나님을 떠난 자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환경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역경 가운데 두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삶에 관심이 없으신 분인 것처럼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유인 양 즐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신다면 그들은 더 멀리 하나님을 떠나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적절히 막으시고, 더 이상 불순종의 죄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지를 꺾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사는 것은 고도의 영적 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중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적인 순종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어지럽히는 모든 사물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비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육욕을 따라 세상으로 달려가는 신자들에게는 이미 그러한 세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셔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여주셔도 보지 못하니, 이는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하는 그들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그들의 환경에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사물들의 질서를 바꾸어 놓으시고, 그러한 변화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이 모든 변화 뒤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읽어내는 일은 고도의 정신 작용과 영혼의 움직임이 필요하지만, 변화되는 사물들의 질서를 통해 자기의 뜻이 좌절되는 것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읽는 것은 그보다는 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은 은혜에 잠긴 내면의 세계로 읽어내지만, 사물들의 변화는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도 일단은 감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혼인 언약을 파기하고 평화를 버릴 때, 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해 역경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세상의 길로 나아간 신자들이 당하는 급격하고도 커다란 고난은 그들을 당신과의 평화로 돌이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렬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언약 백성들이 그 관계 속에서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이러한 고난과 역경의 길에서 고통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대들이 당하는 고난의 깊이는 그대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사신 바 된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결코 포기할 수 없으십니다. 포기할 수 없는 그 사랑이 이러한 역경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한 삶을 원합니다. 고통과 역경 속에서 방황하며 괴로움을 당하기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존재에 가장 합당한 일을 행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이러한 소원을 가로막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불순종과 죄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세상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을지라도 우리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 은혜로 다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을 곤란 속에 빠뜨린 이 역경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IV.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언약을 지키며 살아갈 때에도 충분히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언약을 파기하고 불순종할 때에 더 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는 인간의 무모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 관계를 의지를 가지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총이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비의 마음에 비유합니다. 자비심과 사랑으로 가득 찬 그 아비의 마음으로 당신의 자녀들과 맺은 관계를 운명처럼 생각하시며, 그 관계에 충실하시는 변함없는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기하고, 그 평화를 깨뜨린 사람들을 위한 구원 방법이 됩니다.

A. 평화를 잃은 비참함

첫째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은 인간의 비참함입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호 2:7).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번영을 위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지막 고백이었습니다. 바알 신은 그들에게 번영을 약속하였으나 실제로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가시와 막힌 담이었습니다. 많이 고통을 받았으나 그 형편은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극도의 결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던 때가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진 때였고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비참함은 물질의 부족이나 환경의 어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다른 것을 소유한들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리 행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그들을 속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혼인 언약을 파기하고 번영과 축복을 준다는 바알 신에게로 가면 참으로 값진 것을 얻을 수 있고, 또 성공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을 당신과의 언약 관계로 부르심으로써 복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은 막연해 보였고, 물질적 번영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바알의 초청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혼인 언약을 파기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신자들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복음의 모든 축복들과 그 언약 관계 안에서 약속된 모든 번영과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막연해 보이고, 육욕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붙잡는 것들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매일 주님을 경험하며, 그 자비와 사랑 안에서 그분의 신실하심을 맛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는 것을 따라 살기보다는 느끼는 것에 따라 살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에게 고통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가장 큰 악과 고통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지난 날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았을 때에 경험하던 그 많은 영혼의 고통과 마음의 아픔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평화를 희생하고 우리가 얻으려고 하였던 것들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은 세상에 속한 자원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세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자가 외적으로 번영할 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벤 풀이 마름과 같이 그들의 모든 것은 쇠약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영혼은 그 올바른 강함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그 언약 안에서 사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그것을 지극한 행복으로 여기며 사십시오.

B. 하나님께로 돌아감

둘째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과의 평화를 파괴하고, 불행과 비참함 가운데 빠지게 된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린 당신의 자녀들이 회개하는 것 없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러한 진실한 참회의 과정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떨어내시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쇄신시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신앙을 버렸지만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그리하십니다. 영혼 안에 밀려오는 역경들, 그 치열한 고통과 시련의 과정을 통하여 이 세상이 얼마나 자신을 교묘히 속여 왔는지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또한 자신은 그 속임 앞에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평화를 하찮게 여기고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을 위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기꺼이 파괴하였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불순종했던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다시금 그 언약 관계로 돌아오게 하시며,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충성되게 살도록 만드십니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신을 더럽힌 배우자를 다시 받아들여줄 리가 없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그들을 순결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남편으로서 사랑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일을 위해서는 인간이 돌이키는 것만이 남은 것입니다. 모든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모든 선한 행동은 그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큰 불행 없이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과의 뜨거운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기를 기뻐하시며, 또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혼인 언약을 결코 깨뜨리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당신을 믿게 하시며, 어떠한 죄와 불순종 가운데서라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분의 품 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보십시오. 이 방탕한 여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본 남편은 한 때 만족할 수 없는 결핍투성이었으며, 불만족과 고통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행복도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결핍 속에서 사는 것만도 못한 흉악한 기근이 그의 삶을 덮쳤습니다. 그는 그 고난 속에서 자기를 사랑해 주던 남편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따뜻한 사랑과 우의(友誼)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누구도 강요하는 사람 없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기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고멜은 끊임없이 방탕한 길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그녀의 이 고백이 거짓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잡아끄는 바알의 유혹과 육욕을 좇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타락-징계-회복의 반복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한번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도 필요하긴 하나, 끊임없이 그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그 평화를 잃어버린 삶은 무엇으로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지키기 위해 여러분들이 행하여야 하는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 의무들에 복 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 속에서 살아가는 것 외에 인간에게 또 어떤 행복이 있겠습니까?

V. 결론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고 싶어 하는 모든 복의 원천이시며, 모든 가치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삶은 무가치한 삶이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은 채 얻게 되는 모든 행복은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의 평화를 지키기를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혼인한 사이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언약 관계에 충실하며 사십시오. 세상을 이길 모든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옵니다.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 안에 세상을 이길 모든 힘과 자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언약 관계에 충실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평화를 충실한 언약 관계 안에서 지키는 사람들과 교통하십니다. 그리고 그 교통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다른 곳에서도 이것을 얻을 수 있다고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잠시 이 세상에 있는 번영을 줄지 모르지만 하늘에 속한 것은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고멜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본 남편에레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그러므로 저는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속히 그분과의 혼인 언약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주시는 호세아와 같은 남편이십니다. 그는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절절한 사랑으로 당신을 떠난 음녀와 같은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새로운 교제, 새로운 삶, 끊어지지 않는 은혜의 자원들을 가지고 우리들을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또한 저는 말합니다. 이러한 평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부합니다. 그 평화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언약 관계에 충성하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그분께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는 행복 속에서 사십시오. 이것이 인간의 참된 복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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