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소인 우대국 (마 18:1-7)

  • 잡초 잡초
  • 326
  • 0

첨부 1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꼭 정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열입니다. 서열은 둘 중 누가 더 높은가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본능입니다. 동물들은 영역 다툼을 통해서 먹을 것을 더 많이 확보합니다. 또 암컷을 차지해서 종족을 퍼뜨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둘이 만나면 일단 겨뤄서 우열을 가리고 봅니다. 이긴 자는 먹을 것을 먼저 차지합니다. 진 녀석은 먹다 남은 것을 취합니다. 암컷도 약한 녀석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자는 냉혹한 현실에 맞닥뜨립니다. 따돌림을 당하고 도태되어 죽습니다.

이렇게 동물의 세계에서 서열을 따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 겪게 된 것이 풍부한 자원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풍부했던 곳입니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 때문에 누구와 싸울 일이 없었습니다. 여자 때문에 겨룰 다른 남자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풍부함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결핍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땅을 경작해야 했습니다. 땅은 유감스럽게도 만만하게 열매를 주지 않았습니다. 가시덩굴과 엉겅퀴를 냈기 때문에 아담이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이것들을 걷어내야 했습니다.

경작하지 않는 땅에는 잡초가 가득합니다. 농부가 조금만 신경을 못 쓰면 잡초 때문에 농사를 망칩니다. 그런데 잡초 중에서는 먹을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잡초들은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모릅니다. 뽑아내도 또 그곳에서 무성하게 자랍니다. 뿌리 채 캐내도 어디서 씨앗이 날아드는지 또 자랍니다. 그래서 농부는 일 년 내내 이 잡초와 씨름을 합니다.

만약 잡초 중에서 양식이 될 만한 것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생명력이 강한 잡초들은 양식을 내주지 않습니다. 양식으로 쓸 곡식들은 모두 인간의 정성어린 손길이 필요합니다.

인류는 이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써왔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은 흉년으로 부족한 양식을 일거에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애써 농사를 짓는 것보다 용병을 양성해서 이웃 부족이나 나라를 쳐들어가 빼앗는 것이 쉬웠습니다. 백성들은 유능한 전쟁 전문가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왕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없을 때 왕은 백성들을 옥죄었습니다. 왕실의 풍부를 위해서 백성들은 결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고 정권이 뒤집혔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입니다.

인간은 아직도 이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산업혁명 이 후 자원이 풍부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큰 결핍에 시달립니다. 각국 간에 무역은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FTA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사실은 전쟁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10 대 경제국가 안에 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심한 결핍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느끼는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가진 자들도 만족이 없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함 때문에 목말라하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인간의 결핍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원의 풍부함에 있지 않습니다. 있는 자원을 함께 나눌 때 모든 이들이 풍족하게 누립니다. 작지만 쪼개기 시작할 때 부족함을 모릅니다. 이것은 세상 물리학 법칙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누는데도 풍부를 누리는 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이 기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남자만 오천 명이 넘게 나눠 먹게 하셨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이 넘습니다. 그래도 남아서 열 두 광주리에 모았습니다.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이었지만 나눌 때 만 명이 먹고 남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풍부함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풍부한 식사를 보여주셨습니다. 천국은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배터지게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나눠먹다가 풍부를 부리고 남기는 기적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기적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가난하지만 풍족함을 누리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모두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장차 천국에 가면 누가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가 관심거리였습니다.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아직도 모릅니다. 천국을 이 세상나라와 같은 원리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때에’ 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누가 큰 자인지 다투고 있을 때가 언제인지 고발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그 때란 바로 앞에 17:22-23에 나오는 때입니다. 그들이 갈릴리에 모일 때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예고하게 계신데 제자들은 장차 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할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서로 누가 큰지 재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제자들이 서열 싸움을 할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비장한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런 제자들이 얼마나 한심했을까요? 이런 제자들을 믿고 어찌 십자가를 질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마침 2007 년 멋진교회 일군들을 임명했습니다. 누가 무슨 자리를 차지했나? 관심이 갑니까? 누가 더 높은 자리인가 따지게 됩니까? 교회 직임은 봉사 자리입니다. 만약 임명을 받고 헌신하지 않으면 교회 전체가 동맥경화증을 앓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하려고 해도 월권이기 때문에 그리 못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임은 활발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사서 고생해야 합니다.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남 몰래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만 바라보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놓고 따지겠습니까? 아무 게는 아직 이런 자리를 차지하기 이르다고 트집을 잡겠습니까? 부족한 사람이 임명을 받은 것 같으면 뒤에서 소리 없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자리는 어떤 자리도 큰 자리는 없습니다. 모두 종이 되어 헌신 봉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큰 자리를 따집니다. 큰 자리라야 돈을 많이 받습니다. 큰 자리라야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큰 자는 돈 많은 자, 힘센 자, 권세 있는 자, 학벌 좋은 자, 가문이 좋은 자입니다. 요즘에는 잘 생긴 사람도 포함됩니다. 누가 월급을 많이 버는가? 누가 더 예쁜가? 누가 더 비싼 옷을 입었는가? 누가 더 좋은 차를 타는가? 서로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유감스럽게 제자들이 바로 그런 기준을 가지고 서로 다퉜습니다. 그리고도 해결이 되지 않아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질문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제자들 생각에 예수님은 아무래도 세상 기준으로 따질 분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천국을 기준으로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 사이에서 약간의 서열이 매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도토리 키 재기 식이라 쉽게 뒤바뀔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이를 가지고 따지거나, 제자가 된 전입 순서를 가지고 따지거나, 배운 순서대로 따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베드로가 맨 위고, 그 다음이 야고보, 요한 이런 순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나이가 제일 어립니다. 그러니 돈을 맡아 재정을 보던 가룟 유다가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좀 배운 세리 출신은 은근히 서열이 바뀌길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한심한 제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주 파격적인 방법을 쓰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로 여기는 어린아이를 세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보면 천국에서 큰 자는 어린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크다고 하셨습니다.

본문 2 절부터 읽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2-4>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작으냐를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나 못 들어가나를 따지셨습니다. 천국은 크고 작음을 따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기준입니다.

어린아이는 큰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작은 자의 대명사입니다. 어린아이는 연약합니다. 어른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철저히 어른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린아이의 최대의 장점입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첫째,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겸손합니다. 놀면서 졸병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받아들입니다. 놀다가 힘센 아이에게 장난감을 뺏기면 어찌합니까? 달려들어도 힘에 부치면 그냥 웁니다. 우는 게 아이들 무기입니다. 어른들은 울면 진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우는 게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이들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제 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이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만 믿고 매달리면 꼭 들어주십니다.

둘째, 어린아이를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은 기꺼이 받아들여 대접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주님은 그 영접을 당신이 받는 것으로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5 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만약 예수님을 대접할 기회가 있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마을을 지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꿈도 꾸지 못할 일이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집에 모셔서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그 일이 너무도 가슴 벅찬 일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 나와 지난 과오를 회개했습니다. 자기 재산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내놓았습니다. 매정하게 모은 돈은 네 배를 쳐서 갚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삭개오처럼 주님을 직접 대접할 기회가 있다면 제 2 의 삭개오, 제 3 의 삭개오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대접할 기회를 누구에게나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2 말씀에도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소자란 어린아이처럼 사회에서 연약한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 장애인, 병든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약자들을 섬길 기회를 얻으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천국 백성의 정신입니다.

셋째, 어린아이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영접의 반대말은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은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7 절에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했습니다.

실족케 하는 것은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흉보는 것입니다. 흉이 보이면 남 보기 전에 덮어 주세요. 업신여김은 놀리는 것입니다. 약점을 잡아서 놀리지 마세요. 특히 신체적 약점을 잡아 놀리는 것은 아주 치사한 행동입니다. 업신여김은 따돌리는 것입니다. 따돌림은 정신적 살인과 같습니다. 그 상처는 평생 지워지지 않습니다. 업신여김은 편견을 가지고 쳐다보는 것입니다. 자기는 얼마나 잘 났습니까? 뭐가 그리 높다고 남을 깔볼 수 있습니까?

소자를 실족케 하면 죗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화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돌덩이를 목에 달고 물에 던져지는 것은 큰 형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실족시킨 죄를 묻는 것보다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소자를 업신여기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업신여김은 소극적으로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실족케 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죄를 짓도록 유혹, 자극,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악마적인 죄입니다. 이런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겠지요?

여러분!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어린아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이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십시다. 혹시라도 저들을 업신여기지 맙시다. 어린아이들 만나면 저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고 여기십시오. 천국이 눈앞에 보일 것입니다. (황금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