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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로 나갑시다 (마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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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월이 되면, 다들 몹시 바쁩니다. 계모임에서, 동창회에서, 직장 팀에서, 망년회니 송년회니 갖는다고 식당들마다 붐빕니다.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 송년회를 한다고.
12월은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며 준비하는 달입니다. 그러려면, 바쁜 일상에서 물러나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꾸로 돌아갑니다. 모여서 송년회를 하여야 정리가 된다고, 바쁘게 움직여야 뭔가 일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수첩의 12월 달력을 보십시오. 얼마나 약속이 빼곡하게 잡혀 있습니까?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생각하며 바쁘게 매일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들에게 내놓을 게 있으려면 좀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상사들에게 좀 더 인정받고 좀 더 승진해야 합니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려면 돈을 좀 더 벌어야 합니다.’
좀 더, 좀 더, 좀 더....
이렇게 살다보니, 항상 바쁩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바쁜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왜 나쁘냐고요?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도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사람입니다.
둘째는, 자기 욕심을 따라 앞만 향해 열심히 달려 가다보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붙여주신 가족과 이웃을 돌볼 여유조차 없기에 나쁜 사람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한1:9-11)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입니다. 어둠에 가득찬 사랑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자유의 빛을 밝히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어둠에 갇힌 세상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요한3:19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어둠의 자식들처럼 세속적인 가치인 돈, 승진, 출세, 성공의 강박관념에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살아가는 나,
이것을 사회적 자아라고 합니다. 이런 사회적 자아는 거짓된 자아입니다.
거짓된 자아 때문에 얼마나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진정한 자아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의 원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진 나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완벽하게 드러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거짓된 자기에서 진정한 자기를 찾아나서는 여행, 이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 잃어버린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것, 이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이 사회를 난파선에 비유했습니다. 저마다 나무조각 하나 붙잡고 살려고 아우성치는 사회, 주위에 기진맥진해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이고, 나도 점점 지쳐만 갑니다. 살려고 몸부림치지만, 기력은 점점 쇠해갑니다. 난파선에 그냥 이대로 있으면 재난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헤엄쳐 육지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면 우리 인생의 배는 뒤집혀지고 맙니다.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뛰쳐나와야 합니다.

우리 사회라는 난파선에서 헤엄쳐나오는 것,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세례요한처럼 광야로 나가는 것입니다.
난파선에서 헤엄쳐 나와 안전한 육지에 다다른 사람,
세상에서 나와 광야로 들어간 사람,
거기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되고, 새 힘을 얻은 사람,
그들만이 난파선에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러 갈 수 있습니다.

2. 그럼,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세례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아들입니다. 제사장이 될 사람입니다.
그는 성전에서, 제사장의 가운을 입고, 제사를 집례할 사람입니다.
성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 광야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제사장의 가운을 입어야 할 사람이 약대 털옷을 입었습니다.
제사장의 음식을 먹어야 할 사람이 메뚜기와 석청(야생꿀)을 먹었습니다.

당시 타락한 성전문화에 대한 저항입니다.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비둘기를 매매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타락한 성전체제에서 더 이상 제사장 노릇을 할 필요와 의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속화된 성전에서 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광야로 나갔습니다.

광야는 조용합니다. 바람소리, 간혹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 외에는.
광야는 외로운 곳, 고독한 곳입니다. 시뻘건 모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묵상하기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거짓된 자아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분 안에 있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때, 우리는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립니다.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 이것을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새로운 피조물” 이 되었다고 합니다.
틸리히는 이것을 <새로운 존재 New Being>라고 합니다.
새로운 존재의 근본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던 비참한 창녀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였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거짓된 자아를 청산하였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진정한 자아, 새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 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때,
헝클어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있는 새벽기도회는 조용한 시간에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물어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조용한 새벽기도회의 시간,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 있는 고독한 시간, 이 시간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헨리 나웬은 고독을 <변화의 용광로>라고 했습니다.
주님 앞에 홀로 있는 고독을 통하여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3. 광야로 나가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후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 이것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시험한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이것은 높아지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테스트한 것입니다.
모든 왕국을 주겠다는 시험, 이것은 힘, 권력에 대한 욕심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왜 이런 욕심이 생깁니까?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 가지고 싶은 데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욕심이 있습니다.
이런 욕심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갉아먹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욕심에 자신의 정체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자신의 정체성을 두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욕심에 우리를 정체성을 두지 맙시다.
“나는 그런 욕망에 찌들려 살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길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욕심을 다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미래의 계획을 내려놓으십시오.
물질에 대한 욕심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건강에 대한 염려까지 내려놓으십시오.
사업에 대한 불안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우리의 경험과 지식까지도 주님께 내려놓으십시오.
명예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조차도 내려놓으십시오.

광야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기대할 뿐입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햇빛을 가려주셔야 합니다.
바삭 마른 대지에는 주님께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셔야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광야의 은혜입니다.
주님 앞에 다 내려놓으면, 주님의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4. 광야로 나가는 길, 이 길은 회개의 길입니다.
세례요한은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로 나왔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한에게 나왔는데 요한은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인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생활하는 우리들에게도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청산교회에 적을 두고 있다고 구원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 자신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기 위하여 광야로 나갑시다.
조용한 곳, 조용한 시간에 주님을 만납시다.
혹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꼭같이 아직도 난파선에서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헤엄쳐 나와야 합니다. 광야로 나가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날마다 새벽에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로 나가 주님께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읍시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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