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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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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욘4:1-1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어떤 학생이 기차에서 그 유명한 요나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옆자리 한 신사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학생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후에 다시 나왔다는 그 얘기를 믿는가?” “그럼요.” “어떻게 그 터무니없는 얘기를 믿을 수 있나?” “자세한 것은 천국에 가서 요나에게 물어보지요 뭐.” 그러자 더욱 비웃듯이 묻습니다. “그 친구, 요나가 지옥에 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러자 학생이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면 되겠네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오늘 말씀은 요나에 대한 것입니다.

1. 기원 전 8세기경,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저 큰 니느웨성으로 가서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쳐라. 그 곳 주민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쳤느니라.”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니느웨에 대한 요나의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니느웨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앗수르는 아주 포학하고 잔혹한 민족이었습니다. 남의 나라를 정복한 다음, 강제로 입을 벌려 혀를 뽑는다든가, 산 채로 사지를 토막내어 장대에 꽂아 높이 매달게 하여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다든가, 성의 높은 곳에서 산 사람을 내던져 처참하게 죽도록 한다든가, 코나 귀를 잘라내어 천천히 타는 불위에 태우기도 하고, 산채로 껍질을 벗기기도 하며, 머리를 잘라 내어 누가 더 높이 쌓을 수 있는가 피라미드 경기를 시키기도 했었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앗수르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그의 가슴속에는 앗수르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차서 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생각에 앗수르는 반드시 멸망당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니느웨에 대한 원망과 증오에 불타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너는 그들에게 가서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전하라!”?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여러분 삶에 큰 상처를 주거나 재정적인 큰 손해를 입혀 파산지경에 이르게 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아니 원수같은 사람이 있다면 마음 중심으로 그 사람에게 가서 회개하고 복받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나서 강해를 저술한 제임스 보이스 목사는 요나의 불순종과 반항을 이렇게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2차 대전 때에 독일의 베를린에 사는 나치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뉴욕에 사는 한 유대인에게 임했다고 상상해 본다면 요나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홍콩으로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그를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웃기 전에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들이 영적으로 요나의 후손들이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비록 선지자일지라도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낫다는 심산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를 삼킬만한 큰 폭풍을 불게 하여 배 밑창에 숨어있던 요나를 바다에 던져지게 하시고, 미리 준비하신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켰다가 삼일 만에 니느웨 해변에 토해 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요나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저 큰 니느웨 성으로 가서 내가 전에 너에게 말한 대로 니느웨 성의 멸망을 선포하라.” 결국 요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니느웨 성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40일 후에는 그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3:1-3)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큰 배 밑창으로 기어들어가 도망치고자 했지만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끌려 니느웨 성에 보내어진 요나는 더 이상 피할 길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던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믿고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냥 뜻있는 몇몇 사람이 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왕이 조복을 입고 성 전체에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왕이 조복(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재를 뒤집어 쓴다는 것은 지은 죄악을 극도로 슬퍼하며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까지도 굵은 삼베를 걸치게 하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고 각자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악을 버려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분노를 거두셔서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으실지 누가 알겠는가!”라며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개 기도를 드렸습니다.(3:8-9)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셔서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선언하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3:10) 사실 당시 니느웨 성에는 치명적인 역병이 성 전체에 돌아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B.C. 765년과 763년에 걸쳐 연거푸 도시 전체에 번진 역병으로 이러다가 나라가 멸망하는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 가운데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이 몹시도 가난해진 것입니다. 게다가 니느웨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므로 요나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느 마을, 그 해는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마을 한 모퉁이에 세워진 지 오래되었으나 사람들이 거의 다 도시로 이주해 버린 까닭에 해마다 교인수가 줄어들고 있는 아주 작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여느 해처럼 여름 성경학교가 열렸고 십여 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특별활동 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배운 대로 전도지를 들고 각각 집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 마을에서 어리고 유난히 키가 작은 한 아이는 평소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별장 같은 으리으리한 집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집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무 인기척이 없자 망설이던 그 아이는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초점조차 없는 한 아주머니가 힘에 겨운 듯 겨우 문을 열고는 이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일이니?” “아줌마, 예수님에 대해서 아세요?” “아니, 난 관심 없다. 그만 가보렴.” “아줌마, 예수님은 저랑 아줌마를 사랑하신대요.” “글쎄 귀찮으니, 그냥 가라니까!” 그 아주머니는 귀찮은 듯이 아이에게 가라고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전도지를 문 사이에 끼워 놓고 돌아갔습니다.

며칠 후 그 교회의 예배에 한 여인이 참석하였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오시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 여인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어떤 한 아이의 전도를 받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박으로 재산을 날려 버리고 빚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막 자살하려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두 번씩이나 누르는 통에 문을 열었고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 아이가 돌아간 후 문에 끼워진 전도지를 읽었는데, 나의 예전 생활도, 자살하려고 했던 생각도 모두 큰 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도요. 그 아이가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어마어마한 별장에 살고 있지만 전 재산을 도박으로 날리고 자살지경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가난해진 가운데 한 어린아이의 전도지가 지난날의 죄악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전한 한 마디 “아줌마, 예수님은 저랑 아줌마를 사랑하신대요.”라는 그 한 마디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여인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2. 니느웨 성이 아무리 악독한 죄악이 가득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이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그러나 니느웨 성의 회개와 구원은 요나에게 있어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달리 요나는 니느웨 성이 회개하므로 멸망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고 분통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요나는 머리(지식)로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시자 화가 난 것입니다. 심사가 뒤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라며 극단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성낼 만한 이유라도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성 밖으로 나가 나뭇잎을 엮어 그늘막을 세우고 그 아래 앉아 뒤틀린 심사로 과연 하나님께서 정말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으시는지를 보고자 했습니다. 해가 들어 그늘막 나뭇잎이 시들자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자라게 하여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뙤약볕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박 넝쿨로 인해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벌레들로 하여금 박 넝쿨을 씹게 하여 그늘이 지지 않게 하시고, 해가 뜨자 뜨거운 동풍을 불어 태양 열기에 쓰러질 지경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또 불만을 터뜨리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겠나이다.”며 성질을 부립니다. 이같은 요나의 행태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박 넝쿨에 대하여 화낼 만한 이유가 있느냐?” 요나는 “예, 있습니다. 내가 죽고 싶을 정도로 화낼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며 잔뜩 화를 부립니다. 이러한 요나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났다가 그 다음 날 아침에 말라 죽은 그 박 넝쿨도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하물며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12만 명이 넘고 수많은 가축도 있는 이 큰 니느웨성을 내가 불쌍히 여기는 것이 옳지 않느냐?”시며 메마른 요나의 가슴에 사랑을 호소합니다.

사실 니느웨 성은 나훔서3:1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의 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니느웨 성이 사기와 강탈 등으로 무죄한 자의 피가 밤낮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잔인하고 악독한 니느웨 사람들을 당연히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데, 하나님께서 왜 그러한 니느웨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는가가 요나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악독한 죄악으로 가득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의 편협한 사랑,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메마른 요나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소위 <박 넝쿨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나야! 이 박 넝쿨 네가 심었니?” ‘아니요’ “네가 배양했느냐? 네가 길렀느냐?” ‘아니요’ “그래 맞았어. 이것은 네가 심은 것도 아니고, 네가 기른 것도 아니고, 사실은 내가 심고 내가 기른 거야. 그리고 이 박 넝쿨이 얼마나 가더냐?” ‘글쎄요! 뭐 하루밖에 안가던데요.’ “맞았어! 네가 하루살이 목숨같은 이 박 넝쿨을 그렇게 아꼈는데, 이 니느웨 성에 살고 있는 12만 명의 영혼들을 아껴 볼 수는 없더냐?” 다시 말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12만 명의 생명을 박 넝쿨 하나만큼 귀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겨 사랑할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너희 민족의 원수일지라도 그들의 생명이 박 넝쿨 하나만 못하냐는 것입니다.

한국의 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철 홍수가 났습니다. 개울을 지나가다가 그 동네 아주 인색한 부자 하나가 물속에 빠졌습니다. 부자가 사람 살리라고 소리치자 용감한 청년 하나가 뛰어 들어가 구출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에게 참 감사하다며 사례금으로 20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보게 된 동네 사람들이 “저 놈 죽여라, 저 부자 놈 죽여라! 제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겨우 20전을 내다니! 저런 놈을 그냥 죽이라!” 며 죽일 듯이 난리였습니다.

그때 동네에서 존경받는 한 선비가 그냥 놔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왜 놔주라고 그러냐?”며 안된다고 야단입니다. 선비는 “여러분! 정말 인간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맞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맞다’고 하자, 선비는 “이 사람은 그 귀중한 자기 목숨을 구했는데 20전을 냈습니다. 그건 자기 목숨 값이 20전 밖에 안된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20전을 돌려주고 이렇게 소리쳐 보냅시다. ‘20전 짜리야! 잘가라!’, ‘20전 짜리야! 잘가라!’ ” 그 부자는 스스로 자기 생명의 가치를 20전짜리로 만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우리 이웃의 생명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 이웃이 아무리 니느웨 성 백성같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이웃을 자신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벌써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을 향해서 진노하고 심판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설,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사랑하십니다. 만약 내가 지구상에 살고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나 하나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무는 더할 나위없이 소중한 분이심을 깨닫고 박 넝쿨 하나를 아끼듯이 아껴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 가슴이 채워지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중국의 첫 선교사이고, 중국의 선교의 문을 여셨던 분입니다. 그 분이 선교사업 하던 중에 고국에 돌아가서 동역자, 후배 선교사들을 좀 많이 모집해 오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지망생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면접을 해서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선발하게 되는데 그 때에 이렇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중국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한 사람은 “중국의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제가 구원하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하고, 또 다른 사람은 “중국을 변화시키고 문명의 세계로 인도해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가 꼭 있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세 번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선교사로 가려고 합니까?”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려고 합니다.” 테일러가 말하기를 “그거 참 좋은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이런 동기만을 가지고는 못 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지망생 하나가 되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당신은 왜 선교사가 되셨습니까?” 그 때에 허드슨 테일러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중국 사람을 사랑하거든요. 오로지 사랑 때문에.” 고전 13:3절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와 전도, 사랑이 없는 기도와 선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자신이 기르지도 않은 박 넝쿨 하나를 아끼면서 어찌 그 소중한 사람의 생명 하나를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끼는 것을 나도 아끼고,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 마음에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이웃을 사랑으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의 소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 구원을 위해 니느웨 성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는 요나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속 마음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 성의 구원을 위해 요나를 선택하시고 그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털끝만큼도 니느웨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오히려 니느웨 성의 멸망을 학수고대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 요나를 파송했습니다. 예상대로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쳤습니다. 이를 대비해 하나님께서는 미리 폭풍을 준비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강제 연행하다시피 니느웨 성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죽기보다 싫지만 “40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며 하나님 말씀을 억지로 전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 성이 40일이 지나 멸망하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 보다는 기한이 되어 니느웨 성이 멸망당하기를 고대하면서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왕을 비롯해 성 전체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금식을 선포하고 회개하여 멸망에서 구원받게 되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죽여 달라며 발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를 다시 한번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을 준비하시고, 박 넝쿨을 씹는 벌레를 준비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서, 박 넝쿨 하나를 아끼는 그 마음으로 니느웨 성의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12만 명의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며 물으십니다. 니느웨 성의 회개와 구원은 요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40일이 지나면 멸망당하리라.”는 말씀 선포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설사 예수 전하는 성도 여러분의 마음이 요나같을지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가서 전하시면 됩니다. 명령에 순종하여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 이름에 능력이 나타나고 그 말씀에 성령이 역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전3:6-8)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하나님 말씀의 씨를 뿌리고 물을 줄지라도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구원의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갈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찾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분들을 위한 잠언을 보겠습니다.

(잠25:21-22)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22)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문에서 구걸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말씀에 그 앉은뱅이가 곧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울산 도성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100만 명이 넘는데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 사랑의 마음과 소원을 가슴에 담고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여 니느웨 성과 같은 울산을 구원하는 성도 여러분과 평강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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