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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권주일] 비인간화와 인간회복 (창 1:26, 요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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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주일을 맞아 인간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 도덕과 양심, 자유와 책임, 그리고 그 존재의 근거인 환경 등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환경과 인간, 육체와 정신의 관계들로부터 인간은 존재적 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평가 하는 것은 그 인간의 인간됨이 어떠한가를 아는 것이다. 인간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내적, 외적인 조건에 적응하여 그 자신의 삶을 꾸려 가는데 그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이란 인간의 도덕과 양심, 자유와 책임, 삶과 죽음, 등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밝히는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답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도덕적 품성, 인격, 생활태도, 사상, 신앙 등이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인간답다’라는 말은 인간이란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기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함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것은 사회 구조의 모순의 극복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고 자기만의 자기중심적인 자유를 얻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를 부정하고 배제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자유의 추구에서는 인간적인 만남이나 대화는 불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는 자타를 고립화하고 오직 타자를 착취하고 지배하고 관리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적 관계를 조성하게 된다. 여기에 성서는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데에 근원적인 죄 있음을 지적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의 말을 듣고 금단의 열매를 먹는 그 행위가 그것을 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함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후 하나님을 마주 볼 수가 없어 도망쳐 몸을 숨어 버린다. 하나님과 약속을 어긴 그 책임 소재에 대하여 뱀에게 그 책임을 전가 시킨다.

  창세기의 저자는 인간의 소외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함에 유의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 되었다(본문).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라는 의미를 갖고 하나님이 자유로운 분이신 것처럼 인간도 자유로운 존재로서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서로 의존하고 도와주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의 유한적 자유에 대하여 인간의 자유란 사랑에 근거한 공존적 인간관계에서 행사되어야 하는 한정적 자유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런데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유한한 자유를 무한한 자유로 확대하려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며 허위임을 알아야 한다. 성서의 구원은 실존적, 사회적, 궁지에서의 해방뿐만 아니라 분열되고 소외된 존재의 상호성 내지 통합의 회복과 확립을 위해 관계를 가짐도 알아야 한다. 보라 예수는 그 시대에 유대에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완전히 소외되어 아무런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세리, 병자, 죄인들과 소외 자를 찾아 사귀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르렀음을 구체적으로 이미 보여 주고 관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이러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그들에게 예수 자신의 사랑을 인식 시켰으며 그들과의 사귐은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상호성에 눈뜨게 했다.

  더구나 하나님의 무제한적 사랑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통합이 회복되고 이로서 통합이 이루어짐을 밝혀 주었다. 이것은 예수의 사랑이야 말로 모든 것을 상호관계에로 방향을 잡아주며 또한 실현케 하는 힘이요 그 중심이 됨을 몸소 보여 주었다. 그런데 흔히 우리들은 우리들을 에워싼 사회적, 가정적 환경이 어떤 원인으로 타격을 입어 안전성을 잃고 혼돈에 빠지면 우리들의 정신이나 의식은 불안에 싸이고 자기 동일성은 위기에 직면함을 안다. 성서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책임을 자각하고 살아간다는 것, 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그 근거를 분명히 하고 있음을 안다.

  오늘 신약 본문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서 시련을 당 할 것이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성서에서의 위기는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용기를 내어 위기를 스스로 극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그것이 보다 책임적인 존재 방식인 것을 알게 한다. 하나님의 모습을 입은 인간은 존중되어야 한다. 근대화 이래 서양 세계에 있어서 발전한 사회사상의 출발점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념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인간의 존엄성이 그 빛을 거의 상실한 시대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역설하고 출발한 근대의 역사가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말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자기모순이다.

  비인간화의 가장 심각한 의미는 창조자의 창조의 의도를 아는 것이다. 창조자는 인간에게 이 의도를 알게 하여 하나님의 의도대로 가게 한다. 그런데 인간들이 평생을 일관하는 생활에 창조의 의도와 목표를 잃어 그 중심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러한 삶의 목표가 없는 것이다. 목표가 있다면 돈을 모은다는 목표만 있을 뿐이며 그 돈을 무엇에 쓰겠다는 목표는 뚜렷하지 않다. 인생의 목표가 상실되고 생활의 중심이 흔들리기에 사람들의 인격은 그 틀이 잡히지 않는다. 인격의 틀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개성이 뚜렷한 자유의 주체로서의 성숙을 거두지 못했다는 뜻이며 주체성이 박약한 까닭에 매스컴과 상품광고의 최면술에 헤어 나오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그리고 중심을 잃은 생활의 허전한 공간을 메우기 위하여 사람들은 관능의 쾌락을 달린다. 이것은 이성자(理性者)로서의 특색과 자유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할 때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만물의 이치를 판단할 이성과 주체성을 상실하면 사람들은 보람과 인생의 목표와 생활의 중심을 잃게 되며 그러므로 돈과 관능의 괘락의 사이를 우왕좌왕한다. 인간의 비인간화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모습을 잃어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 인간 존엄성의 상실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남의 인격과 권익을 존중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인간이하로 대접하게 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현상은 원래 근세 서구 세계에 있어서 지배적 세력을 차지한 것이 상공인(商工人)계층에 관심을 가지며 상공인들이 옹호한 경제의 원리가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였음을 알게 한다. 서양에 있어 르네상스라는 정신 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 이었다. 이 자각은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의 물음과 그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서양의 철학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거니와 사회 철학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믿는 인권사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인권사상은 근세 이래의 사회 철학을 일관하여 지배한 기본원리이며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의 바탕이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권사상을 바탕으로 상공인들이 추구한 것은 경제적 가치이기도 한다. 하여간 인권사상과 배금사상(拜金思想)의 결합이라는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 두 가지 사상의 결합에는 모순이나 부자연함이 있을 리 없다. 왜냐하면 금전이 가치체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관능의 쾌락이 인간의 이상을 대신하는 가운데 인간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면서 인간부재의 이르는 길이 나타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연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형성되면서 아버지를 떠난 탕자문화가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편승하여 금전문화(金錢文化)의 연장으로 상품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상품을 상품처럼 생각하고 모든 사물을 그 상품 가치에 따라서 생각 한다. 심하게 인간 까지도 상품처럼 생각하는 천박한 풍조를 야기하고 말았다. 이성과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은 시대적 풍조에 따라 도시화 및 기계화의 현상에서 대도시의 생활은 조용히 자기의 인생을 음미하거나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인관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상품화하고 기계화한 도시의 문명은 매스컴을 타고 농어촌의 생활 까지도 도시의 생활양식으로 닮아 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과정 및 유통과정의 기계화 내지 자동화로 인간의 상실을 촉구하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에 더 큰 비중은 현세기에 세계 각지의 전란과 전쟁의 촉발과 문명의 산물인 핵무기 확산과 패권주의 논리들이 사회의 장기적 안정을 해치고 있음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현상은 10년 또는 20년이 걸릴 정신의 계발(啓發) 또는 문화의 선택보다도 당장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찰나주의(刹那主義)에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일관된 인생의 목표와 생활의 중심을 잃은 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대 문명 속에서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비극이 초래된 것은 비인간적 가치가 인간적 가치를 능가하므로 상실된 인간을 회복하는 일은 비인간적 가치로부터의 예속에서 벗어나 한 인격으로서의 주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현대는 불안의 시대이며 인간보다 물질에 더 가치를 두고 있는 사회에서는 물질을 한껏 소유하고 지위를 획득하는 것으로 불안감을 극복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지만 인간이 획일화, 대중화되어 가는 현대에서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주체성을 빼앗고 상실케 하는 것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여 온갖 양상으로 도전해 옴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단으로 책임 있는 응답을 보내오도록 <지금 여기에>에서 부르심으로서 자타(自他)의 주체를 확실하게 하심을 알아야 한다. 이로서 인간은 타자(他者)도 역시 주체로서 이해하고 타자의 주체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이 타자와 더불어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인간은 타자와의 인격적인 사귐이 가능한 관계에서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런 관계가 무엇 때문에 파괴되고 또한 어떻게 회복되는 가를 성서의 신앙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이 이성자로서 사유하고 자유의 주체로서 행동하는 가운데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있다. 한 마디로 인간회복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상실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모습을 찾음에 있다. 막힌 담을 헐어 하나로 되는 화해의 관계가 ‘비인간화와 인간회복’의 지름길임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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