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금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때 (눅 1:46-55)

  • 잡초 잡초
  • 393
  • 0

첨부 1


오늘 하나님의 전에 발걸음을 하신 여러분,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도움도 중요하고 나라의 도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잘 믿던 못 믿던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짧은 저의 목회 경험에서 깨달은 것은, 진실한 믿음은 틀림없이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이 그 날이요, 이 시간이 그 시간인 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때에, 행복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여건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특정한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행복하게 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언어 구사능력이 대단히 긍정적이고 밝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환경, 좋은 여건, 좋은 재물을 주어도 언어 구사능력이 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비참해.  나는 병들었어.  나는 한심해.  나는 사람을 잘못 만났어."
이런 말투가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일평생 행복하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현실을 만듭니다.  아주 아름다운 말, 좋은 말을 자주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환경이 펼쳐집니다.  그런 사람 주위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짜증스럽고 공격적이고 불행하고 이런 도전적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런 싸움질만 모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리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모입니다.  그 물에 그 물이라고, 부정적이고 시험 잘 들고 공격적인 사람들은 꼭 그런 사람들하고만 친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당장 이 시간에 내가 바꾸어야 할 것은 내 환경이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말투를 바꾸어야 합니다.  최근에 나온 의학계에서 발표된 보고에 의하면, 좋은 언어를 자주 쓰는 사람은 병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파괴적인 언어를 자주 쓰는 사람은 자주 병이 든다고 합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의 5년 동안의 언어생활을 보면 대단히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심한 언어를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투가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의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짤라낼 것은 짤라내어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이 시간 내 말투에 성령의 간섭하심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여, 내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이여, 내 입술이 거듭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운동 습관이 육체를 만듭니다.  음식 습관이 건강을 만듭니다.  언어 습관이 그 사람의 행복과 불행을 만듭니다.  여러분, 행복해서 웃습니까?  웃다보면 행복해집니까?  웃다가보면 행복해지는 겁니다.  언어 습관이 행복을 만드는 겁니다.  언어는 현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는 놀랍게도 현실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냥 무심코 내뱉은 말이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변의 사람을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유머도 개발해야 합니다.  좋은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 훈련도 해야 합니다.

자고로 말 주변머리가 있어야 합니다.  말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은 사람도 잃고, 재물도 잃습니다.  어떤 정상에 올라간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보면, 그 사람들이 그런 위치에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언어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나를 만듭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에 붙잡혀서, 은혜에 붙잡혀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모순되고 부정적인 언어로부터 탈출하시기 바랍니다.  주변 모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한바탕 떠들어보고 싶은 그런 시각과 언어의 태도로부터 주님의 능력으로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교회에 나오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나의 이 더러운 말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신 겁니다.  내가 던진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아름다운 말을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함께 봉독한 본문은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워지는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고 불렀던 기쁨의 노래입니다.  이 찬양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본문 50절에서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리고 54절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여기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긍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비참함의 상태 속에 그 상태를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긍휼하고 비슷한 단어는 은혜입니다.  아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보다는 사실 긍휼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도가 진한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나타낼 때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긍휼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비참한 상태나 비참한 인생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경은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무엇보다도 긍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냥 긍휼의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소개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긍휼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우리는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  본문에서 마리아의 노래를 살펴보면, 마리아가 느끼고 있었던 자화상이 한 두 가지 인상적인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선 48절에 보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라면서 '비천한 계집종'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본문 50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를 특별히 경험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비천한 어린 소녀입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단어가 영어 번역에 보면, 아주 낮은 신분 상태를 나타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단어 속에 열등감이 배어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 마을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었던 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도 예수님을 혐오하는 단어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골 나사렛에서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든 어린 소녀, "주님 나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 단어 속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이 소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소녀라고 했습니다.  지금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이것은 스캔들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봉건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크다란 스캔들이었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스캔들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그 당시 어린 소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 그 소녀를 죽여도 그 사회는 무관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려움이 컸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내가 당해야 할 수모?  사람들에게 받아야 할 손가락질?  그 혐오와 수많은 비방의 말들?  그리고 어쩌면 목숨까지 잃어야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소녀가 겪고 있었던 엄청난 두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이러한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소녀에게 다가오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장을 보면,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 있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여인에게 찾아와서 한 첫 마디가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네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니고 부끄러워할 사건도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야.  너는 구세주 메시아를 낳을 꺼야.

나 같은 계집종을 주께서 찾아오시고 나를 쓰시겠다.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다가오시고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리고 이것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사건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마리아는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여러분,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히브리 말로는 "엘 라훔"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엘 라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런데 "라훔"이라는 단어는 본래 "렉켐"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말은 어머니의 자궁, 혹은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것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는 어머니의 깊은 가슴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금 외로워하고 두려워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던 이 어린 소녀, 그리고 비참함을 느끼면서 열등감 속에 빠져있었던 이 소녀, 그러나 하나님이 다가오시면서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의 긍휼을 부어주는 순간, 이 소녀의 열등감은 아마도 눈처럼 녹아 내리면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은 여인이야"

열등감을 넘어서서, 두려움을 넘어서서 일어서게 된 이 여인의 심정을 생각 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긍휼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여러분에게나 저에게 긍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겪고 있는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생존의 무한 경쟁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껴야 하는 나의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나만이 가지고 있는, 남편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는 나만이 붙들고 있는 나의 외로움과 나의 두려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두려움이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겪고있는 열등감이 무엇이든지간에 "너는 은혜를 받은 자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리아에게 찾아오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도 다가오셔서 당신의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얼마만큼 달라질까요?  따라서 마리아에게 부어주셨던 하나님의 긍휼을 사랑하는 여러분께서도 힘써 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의 출발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제가 어떻게 예수 믿으셨습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까?  여러분의 당당한 구도의 결론이었습니까?
돌아보면, 어쩌다 믿은 겁니다.  또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었습니까?

우리 부모가 믿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은혜가 아닙니까?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내가 예수를 믿었을까?  내가 하나님을 알았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내 삶을 만들어 가는 이 놀라운 삶이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이 모두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 놀라운 강조점은 그 앞서서 더 강조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을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그렇습니다.  성경은 은혜에 앞서서 먼저 강조한 것이 긍휼이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믿으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구원받은 이 구원의 사건이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다음에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구원받았으니까?  당당하게, 진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거룩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 앞에 "예, 그렇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줄 알면서도,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렸는지 ….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

그런데 아직도 살고있는 이유, 그리고 또다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까지 올 수가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닌가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날 자기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길을 되돌아보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그 말을 하나님의 긍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착오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건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속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바로 그분, 아기 예수로 오셨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33년 동안 삶을 사시면서 사람들을 만날 때에 제일 많이 가졌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주변의 사람을 볼 때마다 느꼈던 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자주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실 때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혹은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민망히,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영어로는 "같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좌절, 우리의 낙심, 우리의 절망을 같이 느껴주시고 아파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바로 그 분,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가 흘러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와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내 가정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내 사업과 직장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 교회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구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세인과 세리 두 사람이 동시에 성전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받아 주셨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가져 왔습니까?

여러분은 바리새인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토색질하고 강도질하고 간음하는 저 세리와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저는요 십일조 잘하고, 헌금 잘하고, 주일 성수하고요, 저는 모태 신앙이고요, 만세 전부터 택정함을 입었고요"

주님은 그것을 기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자기 과시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들어야 할 가치가 있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어놓을 것이 없었던 세리, 그래서 세리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는 오직 한 단어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세리를 받아주시는 바로 그 순간 세리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세리처럼 겸손하십시오.  나는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고백했던 마리아처럼 철저하게 낮아지십시오.  교만한 자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주의 손길을 사모하는 심령에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주여 내게 긍휼 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열등감 많았던 한 소녀, 두려움 많았던 한 소녀.  그러나 이 소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던 바로 그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님인 것을 기쁨으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 비천한 여인, 두려움 많은 어린 소녀, 그러나 이 소녀 곁에 다가오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 순간 열등감은 깨끗이 사라지고 "아! 하나님이 나도 쓰신다,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  그 순간 마리아는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동일하신 주의 긍휼을 체험하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