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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을 회복하는 교회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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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작은 시골교회의 은퇴,위임식 및 헌당식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한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어렵게 목회를 하던 중에 교회가 수해를 만나서 사택과 교회 본당이 다 무너져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총회와 각교회의 도움을 입고 그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열심히 헌금을 하여서 결국 2층으로된 작은 교회를 예쁘게 짓게 되었습니다. 그 노목사님은 그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갖은 고생과 모든 물질도 바치고 결국 교회당을 헌당하면서 정년에 비해 조금 나이가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명예롭게 은퇴하였습니다. 그 은퇴식에 그 노목사님을 위해서 서울의 큰 교회처럼 큰 은퇴자금을 준비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두분이 머물 수 있는 집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너무도 아쉽고 쓸쓸한 은퇴식이었습니다. 그 은퇴식에 마지막으로 인사말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자그마한 체구를 이끌고 강대상에 나오신 그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한 인사는 불과 3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요지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하는 인사였습니다. 조금도 인간적인 섭섭함과 원망이 없어보였습니다. 시골교회는 큰 일꾼도 없습니다. 재정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사역을 해도 그 결과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그러나 그는 충성하였습니다. 끝까지 사역자로서 충성스러운 주님의 일꾼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국어사전에 충성이라는 말을 찾아보면 진정한 마음에 우러나오는 정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충성이란 “진정한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성경의 용어로 말을 하면 “신실하다”의 의미가 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그 마음이 진정되고 신실합니다. 그리고 그 말 행동까지도 진정하고 신실하여 믿음이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보면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충성입니다. 건강한 교회 주님이 역사하는 교회는 충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아니 현대교회는  점점 갈수록 충성스러운 사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점점 교회들이 더좋은 시설과 더좋은 프로그램과 더좋은 지식과 가르침은 많아졌는데 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부족한 것은 외적인 데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데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왜 이렇게 충성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일까요?
악한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충성을 공격하고 충성하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마치 충성하는 사람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을 덜떨어진 사람으로 여기고 공격합니다. 가령 사람들은 시골에서 평생을 충성하는 목회자는 무언가 덜떨어진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뭔가 모라자는 사람처럼 평가절하합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사람을 향해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무식하다”“로보트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반항하고 도전하고 비판하면서 충성하지 않고 이상적인 말만 앞서는 사람을 마치 덕이고 멋인양 위장합니다. 어떻게 반항이 좋은 것입니까? 어떻게 도전하고 비판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그러나 요즘 경향은 반항하고 도전하는 사람을 마치 ‘깨어있는 사람’‘의식이있는 사람’으로 그리고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개혁적인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부분을 깊이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개혁하고 도전하고 비판해야 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가령 몸에 암세포가 퍼져 잇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서 칼들 대어 수술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개혁하고 고쳐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종기가 있는데 그것을 칼을 대어서 수술하거나 약간의 피부병이 있는데 것을 수술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오히려 수술하여서 더 문제를 키울 것입니다. 때로는 그냥 나두면 낳을 수 있고 약으로도 낳을수도 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서 충성심보다 비판과 도전이 나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삶을 살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경우는 마귀의 장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하나님이시며 충성스러운 사람을 좋아합니다. 본문의 충성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시고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소원하십니다.

본문의 서머나교회는 충성된 교회로서 우리에게 좋은 도전이 됩니다.
본문에 소개되는 교회 서머나교회가 위치한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위치한 소아시아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입니다. 서머나도시는 무역의 중심지였기에 부유하고  번창한 도시였으며 로마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기에 로마 중앙정부로부터 큰  배려를 받았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황제를 숭배하는 데 그 어느도시보다  앞장섰던 대표적인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예수님이 이들을 사단의  무리라 하실 정도로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존건의 상황속에 있던 서머나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 박해와 악조건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충성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책망은 하지 않고 칭찬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 교회를 향하여 과거에 충성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을 실천하기를 소원하십니다.오늘 주님은 우리 교회들이 서머나교회가 갖았던 그 충성스러움을 회복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1. 충성을 회복하려면 주님의 충성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여기 주님께서 교회에 나타나실 때 보면 교회의 상황에 걸맞는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핍박의 교회입니다. 고난과 죽음의 상황에서 충성하는 교회에 가장 필요한 위로의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님을 볼때 주님은 처음도 되지만 나중도 되십니다. 주님은 나중이되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죽음을 이시기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처음이요 나중이 되시고 창조주도 되시고 부활하심으로 심판주도 되시는 중심의 사역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반대와 환난에 직면하고 죽음에 직면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좇아야 할 삶은 믿음의 주요 신실하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충성된 분이십니다. 그 주님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충성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면 처음도 충성되셨지만 나중도 충성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바라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목표가 되라는 것입니다. 공부에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공부에 충성합니다. 운동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운동에 충성합니다. 믿음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믿음에 충성합니다. 교회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 교회에 충성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표가 자꾸 흔들리는 데 문제가 잇습니다.
왜 처음에는 충성되다가 나중에 가면 배신합니가?
가롯유다 왜 주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배신하엿습니까? 결국 욕심이 들어와서 돈에 마음이 멀어져서 목표를 빼앗겼습니다. 성경의 데마와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눈이 멀어져서 결국 주님에게서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때로 충성에 이탈되는 사람들의 또 하나의 잘못된 목표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님보다는 목표가 환경,사람을 바라볼때 그 환경을 바라볼때 나를 바라볼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됩니까? 낙망이 되고 염려가 되고  다른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래서 충성되기보다 배신합니다. 떠나가고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충성되었다가 나중에 보면 충성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충성되셨습니다. 그 충성된 주님이 이제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충성된 주님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우리 주님과 같이 충성된 삶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2. 충성을 회복하려면 고난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9절에 보니까 "궁핍과  환란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이 편지를 받은 시점은 그 환란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황제는 기독교 핍박에 있어서 네로와 쌍벽을 이루던 바로 도미티안 황제였습니다.  그는 선왕 네로가 세운 기독교 말살정책을  확대해서 조직적으로 진행시켰을 뿐만아니라 한술 더떠서 자기를 신격화시켜 로마 식민지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자기를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습니
다. 그런데 이 숭배정책에 제일 먼저 정면으로 부딪친 자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투옥당하거나 화형당하거나 짐승에게 던져 지거나 톱으로 켜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극한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신앙탄압이 그들의 경제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사회적  진출이 막혔고 매매가 금지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관리들의 묵인하에 반대자들이 기독교인의 재산을 공공연하게 약탈해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이러한 사정때문에 너무나 어렵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신앙을 가졌던 교회라면, 책망은 없었고 칭찬만 있었던 교회라면,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켰던 교회라면, 그렇게 진실한 교회와 성도라면  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극한  환란과 궁핍가운데 내버려 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만사가 형통해야지 왜 어려움 옵니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볼 때  무어라 하겠습니까? 그렇게 의리없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필요없다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러한 의문에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시거나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들이 환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환란을 당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 아신다는 말은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과 가난의 삶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감사한 것은 "10일 동안" 이라는  짧은 기간동안만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10일이란 그들이 넘어지지 아니하고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할 때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맘대로 죄짓고 살다가 어려움을 만난다면 그런대로 이해하겠는데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대도 온갖 근심과 걱정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할때 아무 일도 없고 모든 것이 평안한 것이 최고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잇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런 도전도 없엇다는 일일수 있습니다. 대개 보면 전도하다보면 핍박도 받는 것이고 헌신하다보면 어려움도 겪는 것이요 사역하다보면 오해와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어려움을 당하여도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인데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  환란이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려움 있을 때마다 이는 잠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그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그 환란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 질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충성하면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환란을 허락하시는 것만으로 그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경만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그 환란중에 함께 거하시며  환란을 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위로의 말씀이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극렬한 환란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위로가 바로 9절 말씀입니다.  9절 말씀에서 목적어를 빼면 "내가 아노라" 는 뜻이 됩니다. "내가" 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처음이요  나중되신 예수님이 아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아십니다”
한번 따라 해보십시다. ‘주님이 나를 아십니다“.서로 한번 고백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아십니다.”환난 속에서 고난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때로 힘들고 외롭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나중과 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각을 갖고 주님께 의식을 두고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가 결국 깨닫는 것은 어떤 사람이 충성합니까?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은 주님의 관점을 갖을때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을 갖을때 충성하는 것입니다.주님의 인정 주님의 생각을 구하는 사람이 충성하게 될 줄 믿습니다.

환난중에서 누가 그 맡은 자리에서 교회에 충성합니까?
어떤 경우에 주님의 일을 할때 우리에게 돌아올 결과가 이럴 수 있습니다.주님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엿는데 오히려 욕을 받고 오히려 비난받고 고난이 있을 수 잇습니다.
그렇게 환난과 비난과 사람으로 인하여 고난이 찾아오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배후에는 잘못된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충성하고 주님 앞에 자기를 드립니다.
바울은 고전 4장 3절에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왜 바울이 사람들의 판단과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까? 
지금 바울이 일을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임명해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택해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바울은 임명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도 나를 판단치 않는다”라고 합니다. “오직 나를 판단하실 분은 주님 밖에는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전 4장 2절 “맡은 자들에게 구하는 것은 충성”이라고 합니다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충성은 해석입니다. 충성은 바른 해석 바른 생각 바른 생각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바른 해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은 주님의 판단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나의 생각 나의 이익 나의 소견을 앞세워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바로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지 주님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충성스러운 사역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한결같은 모습은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교회을 향한 주님의 생각 주님의 뜻 주님의 소원대로 자기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너가 하나님이 되라’ ‘너가 우상이 되라’는 유혹과 시험을 받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때 3가지의 유혹을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면서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물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구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내게 절하라“고 하는 요구를 받았을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그 유혹의 말에 속지 않았습니다. 오직 부르신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명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헛된 세상의 인정과 사람들의 인정을 구할 때 우리는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귀와 사람들의 입과 사람들의 판단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조금 싫은 소리를 들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조금 비난을 들었다고 그것으로 위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된 교회로 우리 모두가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죽도록 충성하기까지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환난과 훼방과 궁핍중의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이 의미는 환난이 있고 핍박이 있고 훼방이 있지만 끝까지 충성하라는 의미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충성하다가 환난 핍박 훼방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충성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낙심하여 충성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충성할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충성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상을 약속하기보다는 하늘의 상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어느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아프리카에 수많은 열정과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충격에 부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선교사는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 보낸 슬픔에 비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이런 큰 시련을 주실까? 나에게 이 선교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선교를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모든 짐을 싸서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탔습니다. 마침 그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을 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온 수많은 사람들이 선착장에 나와 있었습니다.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붉은 주단이 깔리고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대통령이 선착장을 빠져나가자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멈추고 사람들도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는 홀로 고독하게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휴가를 갔다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큰 환영을 받는데, 선교를 하다가 두 아들과 부인을 잃고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구나?’ 그리고는 고독감과 실패감으로 정신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는 군악대의 나팔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직접 너를 맞이할 것이다.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 길을 깔고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내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이 음성을 들은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그 동안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했던 죄를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의 충성을 위해서 회복해야 할 것은 죽음 건너편을 바라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주님께 충성하고 이길 수있었던 이유는 바로 죽음 그 너머의 약속된 교회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특별히 주님이 약속하시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11절에는 이기는 자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천국의 약속입니다.
현실의 땅의 있는 교회들이 이 땅에서 끝까지 충성하고 승리하기 위해서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천국신앙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교회는 천국신앙을 지나치게 강조하여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문제는 천국신앙을 너무 강조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이땅의 하나님의 나라 실현에 너무 관심을 갖다보니 결국 주님의 진정한 상보다는 이땅에서 이루어지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너무 집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땅에서 우리 신앙이 쉽게 약해지고 타협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천국에 대한 약속의 소망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주님이 주시는 상급에 대한 소망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면 그 소망의 영광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삶에 그 소망을 향해 충성하게 됩니다. 그 천국의 소망을 붙잡고 끝까지 주님깨 충성하고 주님의 교회에 충성하면서 신앙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고 주님 앞에 갔을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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