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으라 (눅 9:23-27)

  • 잡초 잡초
  • 405
  • 0

첨부 1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꽤 많다고 느꼈던 달력의 장수들이 벌써 단 한 장을 남기고 덩그마니 매달려 있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올 한해를 생각해 볼 때 몇 날 남지 않음을 봅니다.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 봅니다.
감사, 은혜, 기쁨 혹은 사랑, 믿음, 기대, 간구, 나눔, 일어섬, 달려감 등등의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오게 됐음을 감사히 여깁니다.

오늘은 특별히 성찬식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을 이루시고 그 가운데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라” 그리고 잔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피라” 말씀하시고 영원히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먹고 마시며 이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우리 예수님의 아름다운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성찬의 예식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 중에 특별히 <23절>의 말씀가지고 성찬을 앞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을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성찬을 앞두고 우리 마음에 가지게 되는 생각은 주님을 따라 가려거든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내 계획과 내 모든 의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 뒤에 감추는 것입니다. 항상 내 계획과 생각에 앞서 주님의 생각과 계획과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이루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물론 내 생각을 포기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잔을 원치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수용하셨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실 때 도저히 자신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국 순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기 자신의 누추함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체험하고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원하는 심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 계획과 생각과 평가를 뒤로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계획과 모든 것이 달라져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계획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요셉은 마음에 원하는 일과는 전혀 다르게 생활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믿고 인도하심을 믿고 기대하였기에 그의 삶의 있는 정황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엉뚱하게 그는 그릿 시냇가에서 오랜 기간 동안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떡이나 먹고 사르밧 과부여인의 식객으로 얹혀서 사는 곤고한 생활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였기에 그는 마음에 일어나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었기에 주어지는 생각입니다. 내 모든 것이 드러나지 않고 나는 십자가 뒤에 숨으니 내 생각과 내 모습은 없고 주님의 모습과 주님의 생각과 행동만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라는 자연인 보다는 주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삶이 우리들에게 앞서 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그 백성을 높이십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 베드로의 출신성분이 어땠는지, 교육적 배경이 어땠는지, 그가 어떤 품성을 갖고 있는지 그것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아닙니다.
그가 주님께 어떤 교육과 훈련을 받았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성품의 모든 면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었을까 라는 것이 우리의 주요 관심 대상입니다. 어떻게 베드로와 같은 미천한 사람이 우리 주님께 쓰임을 받았고 그는 성경을 쓰는 기자로서 사용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 부인되어지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쓰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내 모든 생각,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기쁨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이 옳아, 어떤 것이 틀렸어, 어떤 것이 좋은 것이야, 어떤 것이 나쁜 것이야, 어떤 것은 기뻐, 슬퍼, 라는 것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이것은 좋고 나뻐. 이 기준으로 볼 때 이것은 슬프고 기뻐.
그런데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의 삶을, 주님의 뜻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와 같은 모든 평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으면 나 자신이 부인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될 수 있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 중에 기도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나를 드러내지 않아도 기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화로움을 받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기쁠 수 있습니다. 자녀의 이름으로 헌신하는 분들도 있고 부모님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신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녀나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이 나타나지 않아도 내 자녀가, 내 부모가, 아름다운 이름으로 영화롭게 된다면 그것이 기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내 이름나지 않아도, 내 이름 평가받지 않아도, 내가 칭찬받지 않아도 주님이 칭찬받고, 주님이 이름 높아지고, 주님이 영화롭게 된다면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탁월한 능력이 있으면서도 진정한 겸손을 이룰 수 있는 것, 나 자신을 부인함으로 이루어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인정받고 이름 떨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 마음은 평안하고 기뻐지게 됩니다. 사람이 명성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 없어지면 남에게 머리 숙이고 굽실거리지 않고 싫은 소리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떳떳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의 세계로 접어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습니다. 내 몫의 사명과 의무입니다. 과연 내 십자가는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져야 될 십자가는 결국 내가 하기는 싫지만 내가 해야만 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을 통해서 가장 큰 일을 이루고 영화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십자가를 져야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내 생활 속에 각양의 모습으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스러운 것 같아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사람 죽이는 기계였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거기에다 사람을 못 박아서 죽이는 기구였어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만약에 예수님을 칼로 목을 베어 이 세상에서 죽게 했다면 사람들은 목에다 시퍼런 칼을 매달고 다닐 것입니다. 아마 작두로 세상 사람들을 죽이는 시대에 예수님이 사형을 당하셨다면 우리는 목에다 작두를 매달고 다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아주 혐오스럽고 진저리나고 아주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더럽게 못 박혀 죽으시면서 그것을 가장 영화롭고 이 세상 그 누구나 흠모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가장 더러운 것을 가장 깨끗하게 만들었고, 가장 추악한 것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었고, 가장 진저리 치는 것을 가장 흠모하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있는 곳에는 가장 슬픈 것도 기쁜 것이 되고, 가장 눈물 나는 것도 웃을 수 있는 것이 되며, 가장 암흑의 깜깜한 지경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으로 말미암아 그곳이 가장 밝고 기쁜 곳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제 한 주간 후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우리가 지키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나셨어요.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나셨다는 것입니다.
마구간이 뭡니까? 소나 말들이 살고 있는 냄새나는 곳이란 말입니다.
말구유는 뭡니까? 소나 말들이 음식을 먹는 여물이 있는 냄새나는 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마구간하면 그런 생각이 듭니까?
구유하면 그런 생각이 듭니까?
예수님이 그곳에서 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아주 낭만적인 것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구간이나 말구유를 그릴 때 사람들이 그것을 아주 혐오스럽고 더럽게 그리는 사람은 없어요. 다 거기에 반짝반짝 빛이 나고 환한 광채가 나는 것으로 그립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은 어떠한 혐오스럽고 추악한 곳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바뀌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 어느 곳에 가든지 우리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빛나고 아름답고 향기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쁜 곳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곳은 반드시 그와 같은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졌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주님의 은혜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졌다면 그곳엔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그 가운데 비춰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의 사명은 우리에게 부담과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통하여 가장 역겨운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로 바뀌었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노동이나 형벌이 아니라 우리에게 운동과 같은 기쁨과 감사의 즐거움입니다.

마지막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되 ‘날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한순간 내 믿음이 최고조에 올라갔을 때, 아니면 내가 감격했을 때, 내가 성령 충만 했을 때만이 아니라, 내가 성령 충만치 못하고 정말 내가 아주 저조할 때, 내가 저 바닥에 믿음이 내려가 있을 때, 내 마음이 위축되고 내가 무엇인가 쫒기는 마음이 있을 때도 우리는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지속해야 합니다. 끈기를 가지고 우리는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선별적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날마다 지속적으로 그 일을 우리는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 때 다시 우리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며, 낮아졌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소생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날마다 주의 십자가를 짊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과 십자가를 지는 수고는 가까웠던 다른 여건 속에서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라는 것은 어떤 여건 속에서도 입니다. 맑은 날 뿐 아니라 비오는 날도, 눈 오는 날도, 슬픈 날도, 기쁜 날도, 눈물 흘려야 하는 날도 우리는 날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쫒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는 각양의 어려움에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지경에도 날마다 기쁨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자기부인, 말씀과 질서에 절대복종,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 헌신하고 잊어버리자, 언제나 우리는 말씀드립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말씀과 질서에 복종하지 않으면 우리마음에는 늘 인간적인 생각으로 우리는 혼돈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든지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사람이 되고, 우리는 가장 가엾은 사람이 되니 힘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헌신하고 잊어버리니 우리는 새로운 헌신을 또 추구하고 더 큰 헌신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헌신한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의 추억에 집착하여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와 같은 정지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과 질서에 절대 복종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씩씩하며, 헌신하고 잊어버리고 새로운 헌신의 지경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가지고 지고 주를 쫒는 사람입니다.
오늘 주님이 오신 성탄을 앞두고 아름다운 성찬의 예식을 가질 때, 우리 마음에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주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쫒는 성도들로서의 삶의 새로운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