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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갈에 머물라 (수 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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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5:1-15
(1)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마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로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 행하였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치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10)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길갈에 머물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제 앞에는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돌파한 그 여세를 몰아 여리고성을 공략할 수도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요단 서편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을 말리시고 마른땅을 걷듯이 건너게 하신 일을 인하여 그들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싸움은 승기가 중요합니다.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붙여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길갈에 멈추게 합니다. 정월 10일에 요단을 건너 길갈에 진을 칩니다. 이곳에서 할례를 행하고 14일에 유월절을 행하기까지 그대로 머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체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지금이 찬스고 바로 공격하고, 바로 부흥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의 시계는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런데 바로 이 머무르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지체됨을 통해 내 안에 소원이 강렬해지고,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빚어져 가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갑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를 얻기까지 25년을 기다려야 했고,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오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인내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시간은 버린 시간인가? 아닙니다. 안으로 다져지는 시간이고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겨울 인고의 시간이 있기에 봄이 소중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길갈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머물게 하십니다. 그 첫째는 할례를 받는 일이요, 둘째는 유월절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해 신앙적 싸움의 모범을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먼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말씀 순종 없는 승리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언제든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결과만 좋다면 과정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것은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신앙의 논리에서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로 간다는 것은 옆으로, 제멋대로 간다는 뜻입니다. 모로 가면 서울에 가기 힘듭니다. 설사 모로 해서 서울로 갔다했을지라도 그것은 편법입니다. 우리가 게입니까? 모로 가게.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는 말이 있는데 예수 대로행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도를 걷기를 원하십니다. 광야에서는 적당히 살 수 있어도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적당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 편법처럼 되었던 것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할례입니다. 약속의 백성이 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 할 수 있는 법적 조건이 미비하다는 의미입니다. 호적에 입적이 되어야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이치와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할례는 먼저 해야 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 승리하는 것,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합니다. 설사 그 일에 좋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 일을 합니다. 결과를 예측하고 일을 하려 한다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하고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자연히 뒤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승리하는 것과 말씀 순종하는 것은 양자가 서로 배치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서울로 가는 가장 보편적이며 빠른 길은 정도로 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항상 승리의 비결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모세가 명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9)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하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미루었던 말씀 순종하는 일을 지체지 말고 행해야 합니다.

할례를 행하라

그래서 첫 번째 행한 일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단지 광야 행로중이라 받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불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할례의 중요성을 간과했거나 바쁘거나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미룬 결과입니다. 처음 할례가 제정될 때의 모습이 창세기 17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와 너의 후손 사이에 언약을 세워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에게 이 가나안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했습니다. 할례는 약속의 땅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 들어선 지금 지체치 말고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은 장소가 전략적으로 좋지 않은 곳입니다.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할례를 받았다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지금은 요단을 건넜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이 요단 강이 뒤로 몰아쳐 흐르며 가로막고 있습니다. 마치 배수의 진처럼 막다른 곳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되어 있지만 고대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취제도 없고 소독 개념도 없습니다. 수술도구도 변변치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날카로운 부싯돌을 사용했다고 전합니다. 한 번 할례수술을 받게 되면 거의 일주일 동안 전투력이 무력화됩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를 모욕한 세겜 족속의 왕자가 디나와의 결혼을 요청합니다. 이때 야곱의 아들들이 할례 받지 못한 족속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여 세겜 족속으로 할례를 받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면 이들이 할례를 받고 3일에 고통이 극에 달할 때쯤 야곱의 아들들이 칼을 들고 이들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고 전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동일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위기입니다. 40대 이하의 가장 힘을 쓸 수 있는 군사들의 전투력이 무력화되어 있을 때 가나안 족속들이 쳐들어오면 이스라엘은 힘도 쓰지 못하고 패망할 것입니다. 이는 전투를 앞두고 있는 군사들에게는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수들의 목전에서 할례를 행하게 만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쉬운 일은 시험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시험이고 이 테스트를 통과할 때 우리 신앙이 자랍니다. 이스라엘은 이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 했습니다. 말씀 그대로 모든 백성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설사 가나안 족속이 쳐들어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홍해 앞까지 쫓아온 애굽 군사들을 물리치셨던 것처럼 저들을 물리치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번제할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해놓고 계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는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러니 시험을 당할 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능히 견딜만한 것이고, 정 견디지 못할 시험이라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치 아기가 처음 걷기 시작할 때 넘어질 것처럼 불안하지만 아기는 안심해도 됩니다. 엄마의 손이 행여 넘어질까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려는 순간 재빨리 팔을 붙잡아 줍니다.

모든 부모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자기 자녀를 처음 학교에 보낼 때나 처음 혼자 힘으로 밖으로 내보낼 때의 두려움입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시골이고 거리도 안심이 되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부모나 어른들의 보호 아래 둡니다. 그러나 평생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 갈 때쯤이면 혼자 스스로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습니다. 처음 학교에 보낼 때 얼마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릅니다. 제대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처음에는 학교까지 동행하지만 조금씩 혼자 갈 수 있는 거리를 확대합니다. 저희 동네는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육교를 건너야 하는데 신학기가 되면 그곳에 부모들이 잔뜩 몰려 있습니다. 육교까지만 아이를 데려다 주고 이후부터는 혼자 가게 하는데, 자기 자녀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학교로 잘 가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는 엄마 아빠들이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지나면 아예 집에서부터 혼자 가도록 하지만 그것으로 부모가 손을 전혀 놓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 몰래 지켜봅니다. 아이가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지켜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데 이 이유는 우리로 강인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주고 뒷짐만 지고 계시는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초조하게 지켜보시다 우리가 정말 위험에 순간이라 생각하면 손을 내밀어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안심해도 좋습니다.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십니다.

이런 담대한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니까 가나안 족속들이 이 좋은 기회를 노리고 쳐들어올 엄두조차 못 냅니다. 이들이 할례를 행하기를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9절에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곳 이름을 ‘구르다’는 의미의 ‘길갈’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수치는 가난하거나 비참하게 사는 것이 수치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 수치입니다. 언약의 백성이 언약의 싸인을 몸에 지니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랑스럽게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갈6:17)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흔적은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다 맞은 상처자국들을 말합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흔적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의 향기가 나야합니다. 향기가 나지 않는 것이 수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그들의 몸에 할례를 행함으로써 애굽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만방에 선언함으로써 수치를 굴러가게 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라

두 번째 순종해야 될 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민족 해방절입니다. 그런데 보면 이 중요한 절기가 지금껏 단 두 번 밖에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은 출애굽할 때였습니다. 출애굽할 때는 의식이라기보다 역사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고 유월절은 그 사건과 거기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재현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두 번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1년 동안 거주한 후에 그랬습니다. 광야 40년 기간에는 전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다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서자마자 40년만에 처음으로 유월절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지낸 유월절은 이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다시 유월절이 지켜지기까지는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할 때까지 무려 6백여 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열왕기 23장에서는 요시야 왕이 다시 유월절을 지키던 감회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이 뭇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 왕 십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왕상23:21-23) 요시야 왕 18년은 BC 620년 경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선지 약 6백년 후입니다.

사람이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말씀보다 당장 자기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좇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수치스럽지 않으며, 말씀대로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길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깨닫기까지는 수많은 세월과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단번에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정말 축복받는 길이라고 인정하고 따르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여러분 한시라도 빨리 예수를 따르는 이 은혜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유월절을 지키며 그 땅 소산을 먹자 광야에서 먹던 만나가 그쳤다고 12절 말씀은 전합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먹여주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는 이제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곡식을 기르고 그 곡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는 신앙의 후퇴인가? 아닙니다. 자기 손으로 지은 것을 먹는 신앙이야말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어린 아이들이나 부모의 손으로  떠먹여 주는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커서는 자기 손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고하여 먹을 것을 벌어 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먹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도 해가 갈수록 성숙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처럼 누가 떠먹여 주어야 하는 때는 빨리 탈피하여야 합니다. 일일이 누가 체크하고 점검해야 하고 사람 눈치 보며 하는 신앙의 단계는 지나야 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할 일을 찾아가야 합니다. 만나 신앙은 자기 한 사람만 배부른 신앙입니다. 만나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곡식을 거둘 때는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먹일 것까지도 책임지고 먹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숙하다는 것은 신앙의 발전이지 퇴보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회 식구들이 만나 신앙으로 근근히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곡식으로 100배의 열매를 거두어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눈을 들어 보니

이렇게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자 바로 이어지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13절 말씀대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놓으니까?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을 때 누가 제일 신났을까요? 저는 여호수아라고 생각합니다. 리더가 되는 것은 힘이 듭니다. 온 민족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 앞에 있는 저 강고한 성 여리고를 돌파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호수아 앞에 칼을 빼어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서 있습니다. 그 군대 장관은 여호수아에게 그 곳은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이 먼지와 같은 존재임을, 신분상으로는 노예와 같은 존재임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옛날 중근동에서 주인된 자들은 신을 신었고, 노예들은 대부분 신을 벗고 지냈습니다. 이를 증거하듯 14절에 여호수아는 군대장관에게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하고 여호수아가 자기는 종일뿐이라고 밝히며 엎드려 절합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곧 하나님의 명령을 대행하여 싸우는 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사령관은 이제 여호수아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여리고성 함락 작전을 짜고 명령하는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여리고성을 다만 돌라는 전략은 총사령관이시 하나님의 작전계획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정복 전쟁을 이끌어 가는 분이 하나님이시듯 우리 인생에 당한 문제들과 싸우시는 분은 다름 아닌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 전투의 총사령관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싸움이 힘든 이유는 졸병주제에 자기가 마치 사령관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들이 걱정해야 될 것을 걱정한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능력도 위치도 안 되면서 나라 걱정을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 앞에 주어진 일만 열심히 감당하면 됩니다. 모든 전략을 짜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 싸움에서 부담감을 갖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사령관이 되셔서 앞서가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고상하고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세상적인 진로나 그 어떤 문제에서든 주님께서는 개입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관심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족하거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단순히 영적인 일에서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적인 일에서 더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 대장되신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부담감을 갖는 이유는 이 예수님과 그의 군대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처럼 동일하게 여호와의 군대를 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야곱입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삼촌 라반의 집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오는 순간 하나님의 군대를 봅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창32:1-2) 야곱의 길을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가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형 에서를 두려워합니다. 형 에서가 400인을 이끌고 오는데 마치 자기를 죽이려고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은 항상 자기가 인생을 책임지려하니 힘듭니다. 그래서 자기 술수를 쓰고 뇌물공세를 폅니다. 처음에는 짐승 떼를 두 떼로 나눕니다. 한쪽을 치면 다른 쪽은 달아난다는 계획입니다. 다음에는 짐승 떼를 세 떼로 나누어 연속되는 선물공세를 펼칩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들로도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얍복 강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다, 환도뼈가 꺾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후에야 그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립니다. 그러자 바로 이어지는 33장에서 형 에서와 화해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 눈이 열려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앞에 계신 것을 본다면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 모든 주도권을 넘겨드리면 부담 없는 싸움을 하면서도 승리하는 인생들이 됩니다. 사람들은 계획이나 광고, 출판, 캠페인, 전략 등을 말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건물도, 멋진 플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우리 심령에서 살아날 때 우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 이치도 그렇습니다. 맛으로 유명한 집은 그곳이 어디든 사람들이 찾아갑니다. 건물이 아무리 허름해도 미어터질 정도이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맛이 본질입니다. 맛에 비하면 거리나 주차사정, 건물 같은 조건들은 부차적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목말라하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곳이든 갑니다. 건물이나 프로그램은 부차적입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해야 될 것은 우리 안에 예수가 살아 있느냐 예수가 보이느냐 입니다. 그러면 부흥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승리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서가시는 대장 예수님이 보인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어떤 산과 골짝이든 돌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힘든 것은 이런 내적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순종해야 될 말씀은 무엇입니까? 당장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가 보일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이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모두 이 승리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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