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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거꾸로 보는 세상(III) : 구유에 누운 왕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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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가상 현실인가?>
요즈음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살 때가 많습니다.
영국에서 의상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 컴퓨터의 스크린을 통해
옷의 질감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아이디어를 개발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 온라인을 통해 옷가지를 구입한 사람들 중에
약 40% 정도가 반품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인터넷 사진만 보고서는 주문했다가
실제로 옷을 받아보니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여학생은 어떻게 하면 인터넷 온라인 상에서도 옷의 질감을
그대로 느끼게 해서 반품 량을 최대한 줄여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학생이 생각해낸 기발한 아이디어는 손님들이 집안에서 컴퓨터의
마우스를 사용해서 옷감의 두께며 질감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여학생 덕분에 여러분은 집에 앉아서 순전히 컴퓨터 화면만 통해서도 사고 싶은
옷을 쭉 펼쳐볼 수도 있고 또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도 만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상의 옷 그림을 툭툭 건드려 봐서 재질이나 촉감도 테스트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사는 것과 실제로 옷을 직접 보고
만져보고 입어보고 해서 사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직접 옷가게에 가서 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렇게 라도 할 수 있다면 집안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옷의 질감을 확인한 다음 주문하는 것도 시간 절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옷을 직접 만져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을 '가상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인가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실제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대강절 네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흔히 크리스마스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기 예수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모습,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하는 모습, 등등 늘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지요.
그러나 이런 이미지들이 마치 컴퓨터의 마우스를 통해 사고 싶은 옷의 질감을
테스트하듯이 가상 현실일 뿐, 진짜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2천년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베들레헴 땅으로 되돌아 갈 수 없습니다.
만일 타임 머신을 타고 되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 아기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어떻게 실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지러운 세상, 그 정돈의 해법은?>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도 세상은 어지럽습니다.
전쟁이 그치지 않고 살인과 약탈과 고문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지진과 쓰나미와 허리케인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중세 시대 때 인류를 위협했던 흑사병이 오늘날에는 AIDS로
대치되는가 싶더니만 광우병과 조류 독감이 현대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들이 많습니다.
과거에 비할 데 없이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매년마다 천오백만 에이커의 황무지가 생겨납니다.
오늘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3이 하루 2달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10억 인구가 하루 1달러, 겨우 천원 정도의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강절이 이렇게 복잡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에게 정말 소망과 기쁨의 소식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대강절과 성탄절이 컴퓨터 마우스로 옷감을 저울질하는
것과 같은 가상 현실 그 이상의 생생한 현실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부터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그 때부터 인간의 의지가 왜곡되어 하나님께 반역하고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우리의 의지를 장악해서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선하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지만 사탄의 방해 공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 되어버렸습니다(고후 4: 4).
하나님 대신에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이 되어버렸습니다(요 12: 31).
사탄은 '살인하는 자'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습니다(요 8: 44).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히 2: 14)가 되어서
우리를 끝없이 죽음과 파멸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결국 사탄은 온 세계를 그릇된 길로 미혹하는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계 12: 9).
이렇게 사탄의 지배하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서로 물고 죽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죄악과 혼란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요 임금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 참된 임금은 버리고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님을 주신 이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사탄은 우리의 신이 아닙니다.
사탄은 우리의 아비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 신이요 참 아버지인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품안에 안겨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어둠과 죄악 속에 빠진 우리가 갈 길은 죽음과 멸망 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죽음과 멸망의 길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뒤틀리고 왜곡되어서 우리의 행위는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24)

예수님은 죄와 죽음과 절망 속에 빠진 우리를 건지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처럼 죄인이 되어 오셨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흉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롬 6: 23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우리를 죄와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건져주셨다는 진리는, 비유를 들면 이런 것이 됩니다.
저에게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너무나 황공한 손님이기에 최고로 좋은 식당으로 모시고 가
정성을 다해 가장 맛난 요리를 대접해드렸습니다. 

드디어 식사가 끝난 뒤 음식값을 치르려고 계산대 앞에 섰는데
아뿔싸,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지갑이 없습니다.
일원 한푼도 없는데다가 크레딧 카드마저 없습니다.
귀한 손님 앞에서 쩔쩔 매며 진땀을 흘리는데 그 손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김목사,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낼게!" 하면서 값을 치릅니다!
내가 지불해야 할 돈을 그 귀한 손님이 대신 계산해 줄 때
제가 얼마나 미안하고 고맙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셔서 죄인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 자신이
마땅히 치러야 할 죄의 삯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치러주신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주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주신 것이지요!
이런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어주시기를 원해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분입니까?
그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신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과 희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셔야 합니까?
이 세상이 죄와 죽음으로 가득차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상처 때문에 피 흘리며 괴로워합니다.
어느 곳에서도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없고 온전한 치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오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직접 계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신 날입니다!

이제 본문 7절 말씀을 보세요.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기 '구유'라는 말을 주목해 보세요.
구유는 짐승들의 밥통을 말합니다.
흔히 여물통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우주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구중궁궐의 황금 침대나
아름다운 요람 위에 눕지 않으시고 짐승들의 밥통,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왕, 이것이 성탄의 신비요 역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일부러 예수님을 구유에 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유에 누우신 왕은 죄인과 함께 계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사랑의 결정판입니다!

우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 아기 예수님을 올바로 영접하기 위하여
세상을 거꾸로 봐야 한다는 주제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품을 떠나 죄와 죽음과 절망 한가운데 빠진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만왕의 왕,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물통, 구유에 눕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부귀와 권세를 한 손에 쥔 왕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짐승들의 먹이통, 구유에 누운 어리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과는 다릅니다.
영광이 아니라 수치입니다!
부귀가 아니라 가난입니다!
권세가 아니라 겸손입니다!
강함이 아니라 약함입니다!
힘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영광과 부귀와 권세와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수치를 당하고 가난해지고 겸손해지고 사랑할 때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될 것입니다!

<대강절 막바지에 떠올리는 마스시타의 일대기>
이제 제가 신문에서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 한 토막을 말씀드리고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흔히 '경영의 신'으로 불렸던 고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에 얽힌 일화입니다.

이 마쓰시타 전기 창업주는 자기가 대기업가로 대성한 비결이
하나님께서 주신 3가지 은혜 덕분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몹시 가난해서 어릴 때부터 구두닦이, 신문팔이를 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태어났을 때부터 몸이 매우 약해 항상 운동에 힘써 왔으며,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스승으로 여기고
열심히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첫째는 가난 때문이며, 둘째는 몸이 약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초등학교도
못 다녔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 때문에 대성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 때문에 오히려 더 크게 될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마쓰시타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9살 때 초등학교를 중퇴해야 했으며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며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1년 중에 절만은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약골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역경을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잘 이겨냈을 때 95세까지 장수했으며
그의 회사 내셔널과 파나소닉은 종업원 13만 명의 세계 20위의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마쓰시타 회장은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지난 1천년 간 일본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인으로 뽑혔습니다.

마쓰시타가 인간을 존중하는 기업 경영을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는 타인 존중, 인재양성, 겸손, 등 인간존중 경영의 실천적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의 대공황이 일본열도에까지 불어닥쳐 1929년 한 계열사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 때 35세 된 젊은 기업주 마쓰시타는 전 직원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이제부터 근무를 반나절로 줄인다. 매주 이틀은 휴무다. 생산도 반으로 감축하겠다."
이 말을 들은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 이제 드디어 해고와 임금 삭감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마쓰시타 사장은 월급 전액지급을 약속했습니다.
그 때 감격한 종업원들은 가족들까지 휴일도 잊은 채 판매에 나섰습니다.
결국 두 달만에 공장이 정상으로 돌아선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마쓰시타는 직원들에게 고객이 "무엇을 만드는 회사인가?"라고 물으면
"마쓰시타 전기는 인간을 만드는 회사입니다만, 전기제품도 만듭니다."라고
말하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제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말이지요.

마쓰시타가 직원들에게 수시로 강조한 교훈이 있습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있다면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하는 것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를 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면서 긍정적인 사고를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듣는 참 훈훈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부하들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항상 배우려고 하는 겸손한 자세,
어쩌면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역경을 축복으로 바꾼 일대기 역시 예수님의 일생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이와 같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이웃을 이롭게 하는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섬기고 낮추는 겸손과 사랑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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