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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성탄 트리 (마 7:15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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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실버스타인> 작품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글입니다.
한 소년의 집 근처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소년은 어린 시절 이 나무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그네를 매고 그네를 뛰기도 했습니다.
그 그늘에서 마냥 즐겁게 놀았습니다.
나무는 그에게 이 같은 놀이터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자라서 그네를 다시 타지 않게 되고
    이제는 나무 열매를 구하게 됐습니다.
    다행히도 나무는 좋은 열매를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그가 청년이 되어 집에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내 가지를 베어다가 불을 때서 더웁게 하라고 했습니다.
장년이 되었습니다.
돈을 벌어와야겠다고 나서면서 그에게 배가 필요했습니다.
나무는 말했습니다.
나의 몸통을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타고 목적지로 가라고.
그러고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멀리 떠난 소년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이 백발이 되어서 노인의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나무는 밑동만 남아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밑동에 걸터앉아 쉬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산상보훈의 두 가지 비유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 못된 나무와
    반석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예수님은 나무의 비유를 통해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라고 하십니다.
어떤 나무가 좋은 나무이겠습니까?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는데
    먼저 삼가야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1.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하여 먼저 삼가야할 일이 무엇입니까?(15절)
시골 교회에서 목회할 때 주변이 사과밭이라
    이맘때 쯤 되면 사과나무 전지를 합니다.
왜 과실나무에 전지를 합니까?                     
  더 좋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열매 맺는 나무가 되기 위해 먼저 삼가야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15절에 [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 고 합니다.
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할까요?
  바로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좁은문, 좁은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지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의 말씀에서는 그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
    또 한 가지의 장애가 있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순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해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를 넓은문, 넓은길로 들어가라고 가르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었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선지자의 말은 매우 중요하고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도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는 말은
    `거짓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는 좁은문 앞에 서서
    좁은문으로 들어가려는 성도들을 넓은문으로 가도록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여
      그들을 좆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눈에 보이는 거짓 선지자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 선지자 영이
    내 마음에도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야! 뭐 그리 좁은문 좁은길로 가려고 하느냐?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넓은문 넓은길로 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양의 옷을 입었지마는 그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라 합니다.
구약성서는 백성을 속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이리`라고 합니다.
      (겔 22:27-28, 습 3:3-4, 잠 28:13).
신약 마10:16, 요 10:1절에도
    역시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을 묘사할 때에 `이리`라는 표현을 씁니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을 `이리`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입니다.(겔 22:27, 행 20:29).
탐욕이 뭡니까? 사람에게는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욕망하고 탐욕하고 뭐가 다릅니까?
      탐욕은 법을 어기는 욕심이 탐욕인 것입니다.
바로 이리의 특성이 탐욕입니다.
어떤 날, 숲속에 토끼 한 마리가 오솔길을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이리가 나타나서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깜짝 놀란 토끼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겁을 먹은 토끼가 벌벌 떨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리는 토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의 문제를 낼 텐데 이 문제를 알아맞히면 살려주고,
    알아맞히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냈는데,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 같으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토끼가 하는 말이, `잡아먹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리는 소위 말하는 논리적 모순에 빠졌습니다.
잡아먹자니 자기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잡아먹지 않자니 배가 고프게 됐단 말이에요.
어쨌든 일단 이 말싸움에서는 토끼가 이겼습니다.
토끼는 안심을 하고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는데 이리가 토끼목을 물었습니다.
`그럼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분명히 내가 알아 맞혔는데요.`
그러니깐 그때 이리가 하는 말이
`널 잡아먹고 안 잡아먹고는 내 마음대로지.`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약속을 하고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탐욕자
    바로 내 속에도 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었다는` 는 말은
    그들이 위장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속에 들어 탐욕 누가 알겠습니까?
구약에 선지자들이 실제로 양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왕하1:8, 슥13:4)
그렇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들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가라 - 즉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2.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16절)
16절 [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거짓 선지자의 구별은 그의 열매로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는가?
베드로 사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해 주었습니다.
벧후2:1절 [ 민간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
베드로 사도는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도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후11:13-15절에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 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요즘 시대는 일명 ‘짝퉁’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너무나 진짜 같은 짝퉁 때문에 어떤 것이 진짜인지도 구분하기도 힘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에 왜 이단들이 이렇게 많으냐? 며 힐난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문제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이렇게 가짜가 많은가? 그것은 진짜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가짜를 모방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가 생기듯이 이단이 많은 이유는
  오히려 믿어야 할 진정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진짜 가자 구별하기 힘들지만
우리는 그들의 열매를 보고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의 경고의 화살은 바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적인 종교인들입니다.
그러니 남이 아니라
내 속에도 얼마든지 위선적 짝퉁신자가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인격의 열매를 보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산상보훈 서론의 8복의 사람
갈5:22절 성령의 9가지 열매
입술의 열매 - 찬송, 마음의 열매-감사
그리고 전도의 열매
이런 열매들이 없으면서도 좋은 나무인척 하는 교인
    바로 짝퉁 교인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나무라고 자처하면서도 열매로 봐서는 좋은 나무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위선적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먼저 진리의 열매 맺기를 힘쓰며,
수많은 거짓이 가득한 시대에서 진리를 수호하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개발과정 401반 은사배치 사역에 보면 영분별 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분별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거짓 교사인지 분별하는 것  - 3가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눈빛이 달라요. - 눈빛은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2) 교만합니다. -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3) 기복주의입니다.

국민일보 2006.9.11일 자에 실린 글입니다.
“수험생 자녀를 위해 작정 기도를 시작할 때입니다.
      매일 아침, 전화벨이 울리면 목사님의 기도가 시작됩니다.”
고3 수험생을 둔 서(45) 집사는
    목사님의 수험 기도를 받을 수 있다는 반가운 정보에
    신문광고에 나와 있는 A단체의 홈페이지를 찾았습니다.
‘신청하기’를 클릭하자
‘작정기도 듣기 신청, 유료 서비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수험생 1명 신청은 3만원,
    수험생과 학부모 동시 가입은 5만4000원(10% 할인)입니다
A단체는 수험생을 위한 기도에 전국 유명 목회자 100여명을 동원하여
목회자들은 매일 한 명씩 돌아가며 수험생들을 위해, 기도 음성을 남깁니다.
서집사는 뭔가 현대판 면죄부 같은 마음이 들어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나무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어떤 나무가 되어야 합니까?(17절)
17절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 ]
여기에 좋은 나무는 <아가돈 agadon> - 선하다, 건실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못된 나무의 못됐다 - `못된 <사프론 saprov>은
    `썩은, 나쁜, 부패한`을 뜻하며, 본성에서 타락을 의미합니다.
나쁜 <포네론 ponhrov>은 `악한, 버려진, 병든`을 뜻하며,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못된 나무, 나쁜 열매는 본성이 타락하여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를 말합니다.
바로 범죄의 결과로 생겨난 가시나무와 엉겅퀴입니다.
여기에 좋은 나무는 먼저 거듭난 심령, 성령의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예수 믿고 거듭나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악한 열매 병든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을 받은 좋은 씨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생명이 없습니다.
    가짜요 모조품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전 3세기에 헬라에 피루스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2만5000명의 군인과 20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습니다.
격렬한 전쟁이 끝난 후,
피루스 왕은 승리를 얻었지만 그만 자신의 코끼리도 다 죽고
    군인들도 4분의 3이나 죽어, 남은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피루스의 승리’라고 합니다.
    패배나 진배없는 승리를 말합니다.
마치 헤비급 권투선수가 챔피언에게 도전해 판정승을 거뒀지만,
    너무 맞아서 다음날 골병이 들어 죽어버린 것과 같은 승리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피루스의 승리와 같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결국 돌아오는 것은 패배뿐입니다.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했던 승리의 전유물이 사실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바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없는 인생은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오늘 성탄주일이라 성탄트리가 떠오릅니다.
성탄 트리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탄 트리의 시작은 종교 개혁자 <루터>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성탄 트리는 에덴동산 가운데 있었던 생명나무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새의 줄기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을 기념하는 상징이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바로 그 나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탄 트리에 장식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사과와 장미와 빵 그리고 촛불이었습니다.
사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상징하고
장미는 사막에서 생명의 꽃을 피우듯이
    우리의 생명과 소망이 되어주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빵은 생명의 떡으로 오신 주님을 상징하며
촛불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성탄 트리는 온통 예수님을 나타내는 상징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탄 트리는 어떻습니까?
다분히 상업적이요 말 그대로 장식용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한다고 하면서
    다분히 이기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 성도들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진정한 성탄트리로 살아가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삶이 성탄트리로 살아가는 삶이겠습니까?
`팔레스틴 어느 산 위에 쭉 뻗은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가지를 흔들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 그루의 나무 중에 하나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이 세상에 쓰이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들보가 되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어.`
어느 날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면서 올라오더니
도끼로 자기를 찍어 끌고 내려가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또 한 나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에서 쓰임을 받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큰 기둥이 되어
    왕의 영화를 자랑하는 몸이 되고 싶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오더니 역시 도끼로 자기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러더니 마구간 옆에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짐승에게 여물을 담아주는, 볼품없는 조그마한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남아있는 한 나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크고 화려한 배가 되고 싶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오더니 도끼로 찍어서 갈릴리 바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톱으로 자르고 대패질을 해 가지고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만들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났을까요.
마구간의 구유에 와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아기가 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 아기를     
받아 누이는 침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어느 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바닷가에 나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로 올라오시더니 바닷가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천국복음, 영광스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하루아침에 그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강단이 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의 형틀이 된 그 나무가
어떤 청년이 와서 자기 위에 눕힘을 당하고 못질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전 인류의 죄를 담당하고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쏟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에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화이다.
이 우화는 미 상원의 원목이었던 <비숍>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우화이다.
여기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잘 모를 때 젊은 기분에 한참 자신 만만할 때
`나는 예루살렘의 대들보가 되리라.
나는 예루살렘 왕궁의 기둥처럼 살 것이다.
나는 오대양을 누비는 화려한 배가 되리라.` 하며
아름다운 꿈들을 나름대로 다 가지고 인생을 출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대부분 자기 꿈보다는 좀 못하게 인생을 살다가 갑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10년, 20년을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처럼 살 수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마구간의 구유처럼 평범하게 살수도 있고,
    원치 않는 십자가 형틀의 도구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저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말구유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눕히는 침대로,
비린내 나는 고깃배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십자가 형틀과 같은 끔찍한 존재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단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트리 같은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나무의 비유를 통해
    산상보훈의 결론의 교훈을 하실까요?
4. 예수님은 왜 나무의 비유를 통해 교훈하실까요?(18절)
나무는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영어로 tree라고 하는데, 진리라는 true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만큼 나무는 참되며, 유익을 주고, 깨우침을 줍니다.
농사를 짓거나 화초나 과목을 길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무보다 정직한 것은 없습니다.
저도 화분에 과목을 몇 년 째 기르다 보니 조금 알겠더라고요.
한 해는 목양실 화단에 별로 가꾸지 아니했는데
      살구나무 꽃이 만발을 했습니다.
야~! 올해는 살구를 신물이 나도록 맛보겠다 싶어요.
그런데 조경하시는 집사님이 보시더니
[ 목사님, 이 살구나무 죽을 때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 해요.
그러니 생각나는 글이 있어요.
서울에 남산에 소나무가 작은 솔방울을 그렇게 많이 맺는 일,
그리고 가로수 은행나무가 작은 열매를 그렇게 많이 맺는 일.
이게 공해 때문에 제 명대로 못살겠다 싶으니
    자손이라도 빨리 퍼드리고 가야 되겠다 해서
    죽을 힘 다하여 열매를 맺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참 정직합니다.
1)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같이
  사과나무 사과 열리고 배나무에 배 열리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
  거듭난 성령의 사람 되어야 성령의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2) 가꾸는 데로 거둔다는 원칙입니다.
  시126:5-6절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 
유태영 박사이야기입니다.
유 박사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그는, 구두닦이부터 시작하여, 
신문 배달을 하면서, 야간으로 고등학교와 대학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공부하던 그는,
어느 날 쓰레기통에서 밥 덩어리를  보고 그것을 주워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형편에서도, 그는 유학 갈  꿈을 가졌습니다.
주께서 도와주시면 그 꿈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꿈을 현실로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유 박사는, 그 때의 일기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그 일기에는, 쓰레기통에서 밥을 주어먹으면서도, 
        주님께 감사한다는 글로 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세상을 원망할 법도 한데,
그는 주께서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덴마크와 이스라엘까지 가서,                   
            그 나라 국비 장학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드디어 대학 교수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유태영 박사는, 일찌감치 진리를  한 가지 터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진리가 머슴의 아들이라는 악조건을 극복할 수가 있었고,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 진리가 무엇인냐?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가꾸는 대로 거둡니다.
좋은 나무로 가꾸는 마음의 정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까?
5. 우리의 신앙생활에 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까?(19-20절)
19절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 처럼 짐승 취급을 하거나
    심지어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드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땔감은 이방인이 아니라
    열매 맺지 못한 나무라는 것 기억하셔야 합니다.
문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나쁜 나무 이면서도 좋은 나무인체 하는 것입니다.
마3:8- 에
[ 그러므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 우리라 ]
<존 번연>은
심판의 날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열매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너는 믿었느냐? 는 질문이 아니라
      너는 실천했느냐? ` 는 질문을 들을 것이다.
20절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합니다.
그들이 아니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삶을 통해 예수님을 나타내는 성탄 트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남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행복한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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