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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유에 누운 예수 (눅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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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무드에 보면 이런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젊고 똑똑한 학생이 율법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지난 6년의 세월동안 탈무드를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가에 대해 율법사에게 설명한 후, 자기의 실력을 테스트 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탈무드를 펴놓고 어떤 페이지에 나오는 애기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그 페이지에는 대단히 어려운 논쟁이 실려 있었는데 그 학생은 이 논쟁부분에 대해 막힘없이 확실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듣고 있던 율법사의 대답은 “너는 아직도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한 권을 선정하여 그 학생에게 가장 난해한 논쟁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 학생은 이번에도 전혀 막힘없이 실로 구슬을 꿰듯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무엇이 어떻게 씌어 있으며, 어떤 사항이 문제되고 있고, 어떤 의문이 제기되어 있으며, 이렇게 해답을 해주고 있다”고 유창하게 답변하였습니다.
그의 대답 속에는 참으로 가공할 만한 지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 청년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고명한 율법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아직도 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말을 이었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다 하여도 단지 책에서 얻은 지식만으로는 당나귀가 많은 책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당나귀는 아무리 많은 책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하여도 당나귀 자신을 위하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며 인간은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책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탈무드를 통달한 박식한 청년에게 들려주는 율법사의 말속에는 대단한 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약이 육체에 큰 유익을 준다면 책은 인간의 정신에 보약 이상의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글 속에 담겨져 있는 정신을 느끼고 이어 받았을 때의 이야기이지, 글을 외우고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 멈춘다면 그 지식은 그저 장식된 골동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책에 기록된 글을 외우고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 속에 담겨진 정신을 기억하고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방랑시인 김삿갓(병연)이 금강산을 구경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해가 지면 노숙하기도 하고 민가에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하루는 깊고 외딴 곳에 사는 가난한 노(老)부부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노부부는 정성껏 자기들의 저녁끼니를 나누어주었는데, 기껏해야 감자 몇 개였습니다.
감자 몇 개가 뭐 대단한 것입니까?
그러나 감자를 얻어먹은 김삿갓에게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감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먹어야 할 한 끼니의 양식이었지만 그것을 김삿갓에게 준 것입니다.
노부부에게 감자로 대접을 받은 김삿갓은 그 분들의 감사를 가슴 깊이 새기고 방랑의 길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감자 몇 개를 준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감자를 준 그 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휴머니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분들이 베푼 사랑, 이것이 중요합니다.

해마다 12월이 되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축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은 전혀 낮선 것이 아니며, 또한 예수님의 탄생 경위와 환경과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으며, 어떻게 죽으셨고 어떻게 부활하셨는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사건은 너무나도 유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사건만 알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셔서 사랑의 희생적인 삶을 사셨는데 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정신이 없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알고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나에게 구원의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사랑 장’이라고 불리 우는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치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저는 주일학교에 다닐 때 다 외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좋아합니다.
이 사랑 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중에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달달 외우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이 없고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장식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비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때 당시, [가이사 아구스도]가 호적 하라는 영을 내려 [요셉]과 [마리아]는 유대 베들레헴으로 호적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이미 잉태되어 있었고 해산할 날이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적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몸을 풀기 위한 장소를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급한 대로 마구간에서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어난 아기 예수를 강보로 싸서 말구유에 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셔도 부족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께서는 비천하게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구유’라고 하는 것은 말의 ‘밥그릇’을 말합니다.

말의 밥그릇에 누워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밥그릇에 담는 것은 먹을 양식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영의 양식으로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은 죽어 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인류 구원의 목적을 갖고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의 양식이셨습니다.

///// 요한복음 7:51, 53절에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에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으니라.”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5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땅에 탄생하신 우리 예수님은 영생의 참된 양식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기 위한 탄생이요, 십자가를 감당하시기 위한 탄생이며, 구원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사한 사랑입니까?
///// 빌립보서 2:6절 이하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전체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경의 역사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예수님의 그 정신은 상실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빌립보서 2: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본받고,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 대해서 낱낱이 알고 있으면 무엇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잊혀지고 오히려 마음에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만 부르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의 정신을 이어 받아야만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상이 성도들의 마음에서 파도치지 않는다면 성탄의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예수님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다면 성탄의 의미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김포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상각하며, 그분의 마음과 정신과 삶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분의 마음으로 살고, 그 분의 정신으로 이웃을 대하며, 그 분의 삶의 모습으로 나를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를 예배 한다.’는 뜻입니다.
크리스마스 =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Merry = 즐거운.  Christ = 예수 그리스도.  mas = 축제일.
Merry는 ‘즐거운’이라는 뜻이고, Christ는 예수 그리스도, mas는 ‘축제일’을 의미합니다.
즉 Merry Christmas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것을 기뻐하고 경배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하였던 동방박사들의 심정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감격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의 삶의 행적을 더듬으며, 사랑하고 희생하셨던 주님의 정신과 발자취를 따르는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 분을 구세주로 믿고 있다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품어야 할 것이며, 예수님의 희생을, 우리의 삶 가운데 실천하며, 예수님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섬기는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한 여론 조사기관에서, 성탄절을 앞두고, 15세 이하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설문 내용은, ‘성탄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입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움직이는 로봇, 컴퓨터, 게임기, 롤러 브레이드, 자전거 등등 많은 목록들이 제시되었습니다.
그 중 한 아이의 대답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어린이의 목록은 ‘어머니’였습니다.
알아보니 그 대답은 어느 고아원에 있는 아이의 것이었습니다.
그 고아원은 미국 내에서도 최고의 시설과 후원자를 갖추고 있어 아이들에게 일반 가정집 부럽지 않은 생활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시설에서 풍족한 것을 누려도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어머니가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을 그것들이 결코 대신 할 순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있어서 성탄절은, 더 많은 선물이 들어오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갈 뿐, 다른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날 일뿐입니다.

성탄의 참된 의미는, 마음을 열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데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서야 인간은 비로소 마음의 꽉 채워진 충만함과 평화를 체험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리는 꽉 찬 평화와 생명, 그것이 바로 성탄의 의미요 은혜입니다.
이 평화가 없는 성탄의 그 어떤 것도 고아에게 더해지는 공허한 분주함 들일 뿐입니다.
이번 성탄은 진정한 성탄의 의미 회복을 통해 참된 성탄의 은혜를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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