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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축 성탄’의 의미 (사 9:2, 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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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쁘다 구주 오셨네’ 의 구주탄생의 찬송이 울려 퍼지고 있다. 정말 우리의 구주가 오심이 기쁘기만 하는가? 오늘 우리의 매번 지키는 성탄상황은 퇴폐적이고 병폐적인 그 시대와 사회유행의 관습이 되어 축하하는 성탄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목을 놓고 통곡 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2천 년간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는커녕 예수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각각 불러 한국 교회는 비대해 졌으며 물량주의와 물질만능으로 타계(他界)적 신앙으로 오르려고만 하는 기대신앙으로만 향상하고 하늘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낮고 낮은 천한 곳을 향하신 예수오심의 의미를 우리의 성탄절은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축 성탄의 의미’는 오늘의 우리의 상황에서 깊이 이해하고 고백하며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회보 2006년 12월호’에서 ‘회보 돌아보기’ 기사 가운데 1957년 호에 실린 글을 ‘회보 돌아보기’에서 본다. ‘축 성탄’의 이남규 목사의 설교는 지금부터 49년 전에 이런 사회와 교회를 향하여 그의 메시지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를 살아온 시대를 지나 한국 20세기를 살았던 주의 종의 성탄 고백에 성서 속에 들어난 예언자의 외치는 소리와 같이 그 시대의 상황을 알게 한다. 이 성탄의 메시지에는 성탄은 기쁘지만은 웬일인지 내 마음은 서글프다고 하면서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述懷)하고 있다.

  “묻노라, 한국교회여! 베들레헴의 가석(可惜)함을 아는가 모르는가! 알진데 너 어찌 조국이 주님을 거부하고 옛날의 금수강산(錦繡江山)이 금수강산(禽獸江山)으로 화하는 가석한 상태를 보고도 그렇게 울음이 없단 말인가? 유대족의 가석함을 아는가 모르는가! 알진데 너 어찌 한 민족의 해방을 기뻐하면서 해방해 주신 하나님에게서는 떠나는 가련한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눈물이 없다는 말인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가증함을 아는가 모르는가! 알진데 너 어찌 교회가 요술에 걸려 미신에 떨어지고 교권에 팔려 사랑을 버리고 교리로 무기삼아 형제를 죽이고 성경을 도구삼아 자기를 변호하는 가증한 행동을 보면서도 그렇게 의분이 없고 자기안전 제일주의로 처세술만을 농락한다는 말인가? 회개하라. 도끼는 나무뿌리에 놓였다. 돌아오라. 주님은 네게서 회개의 열매를 찾으시려고 오셨다.”고 말함에 유의하는 것이다.

  이어서 ‘묻노라, 한국교회여!’에서 의미 있는 글은 “성도들의 성탄을 보고 서글퍼 함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 땅에 성탄 축하도 벌써 칠십 유년을 거듭했고 중단된 강토와 피비린내 속에서 눈물로 축하한지도 벌써 십 유년을 거듭했건만 금년도 또 다시 눈물로 축하함이 서글프지 않는가! 아니 여기에 서글퍼할 자는 누구인가? 피투성이 된 그대로인데 회개의 눈물조차 없으니 무엇으로 예물삼아 예수께 경배할까? 성대한 의식보다 회개의 눈물을 드리자./ 기름진 제물보다 상한 심령을 드리자./ 이것이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축하의 예물이요./ 너희의 거룩하고 당연한 예법이니라.” 라는 이 기사 내용은 당시 한국교회에 보내는 세례요한의 외침임을 알게 한다.

  성탄은 인간에게 찾아온 영원한 빛의 계절로 이해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언한 요한복음의 기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이 사람들의 빛이라’ 고 해설해 주었다. 이 말은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 했다란 뜻이다. 어두움이 견디어 내지 못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성탄의 의미이다. 성탄에서 이 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들레헴의 비천한 곳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에게서 우리는 참된 빛 곧 우리의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을 알고 행하여야 한다. 성탄의 빛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빛임을 알아야 한다. 거짓된 신앙인들의 공허한 웃음거리를 폭로시켜준다. 위선과 오만과 편협과 비정으로 가득 찬 바리새파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거짓된 탈을 벗겨 주는 빛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내포하고 있는 독선, 배타, 편파, 지방색, 저속한 인간주의 등이 육신으로 오신 이 빛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성탄의 의미는 화해의 빛을 알게 한다. 죄로써 갈라놓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불신으로 갈라놓은 인간과 인간관계, 이념의 대결로 원수처럼 되어버린 민족과 민족의 관계 등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동시에 인간에게는 저주, 불행, 고통, 부패가 연쇄적으로 따른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작용함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회개에로 부르시고 사유의 은총으로 초대 하시는 그 사랑을 구체화하여 실현하는 이것이 곧 성탄의 의미이다. 성탄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아야 한다.

  막힌 담을 헐고 따뜻한 화해의 행동을 가져야 한다. 분열, 대립, 갈등, 적개심의 어두움이 우리와 우리 사회, 교회를 덥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실은 어두움을 밝히시는 화해의 빛임을 아는 것이다. 또한 성탄의 의미는 성탄의 빛은 온 인류에게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의 빛임을 알아야 한다. 어두움은 절망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또 다른 전쟁을 예상하는 불안이 현대인에게 서려있다. 그러나 성탄은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약속하는 희망을 안겨 준다.

  그러므로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성탄을 맞아 전쟁이 휴전하는 예는 그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의 소산(所産)이다. 이러한 의미의 소산을 위하여 예수는 그의 삶이 인간의 십자가의 처형으로 감수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적 실존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역사에 온다고 하면 정치적인 판단은 위협이 되는 것이다. 즉 경제적 불균형을 바로 잡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입장을 유지하려면 개혁하고 변화하여 발전의 구도로 갈 때 언제나 정치적인 색깔로 취급하려는 의도를 정치사에서 흔히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됐다는 데에 이론이 있을 까닭이 없다. 또한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명예한 일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문제는 예수가 정말 유대독립운동을 했느냐 하는 것에 문제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성서적으로 그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가 폭력으로 로마에 대항하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로마정부는 오해했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돕기 위해 저들의 입이 되어 주고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의미를 보여 주려다가 권력자의 눈에 거슬려 투옥되고 그 사회가 정죄하여 모든 권리를 박탈한 죄인들이나 투옥 자들을 의로운 자로 영접하고 눌린 저들을 해방하려 왔다고 선언한 고백을 ‘성탄의 의미’를 헤아려 보게 된다.

  지금 세계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오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모습이 죄로 어두움에 처한 인간구원을 위해 인간회복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인간해방의 외침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아지고 다양해지며 거세어진 것이 현실의 사실로 되었다. 기성 종교의 구세운동(救世運動), 여성해방운동,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 각 분야의 인간해방론이 나오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현대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구와 인식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따름으로써 비로소 자유로 와지고 참된 삶에 이른다는 확신을 성탄의 의미에서 알아야 한다.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예수가 오셨을 때 상황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당시의 상황은 처절 하였다. 외향 상으로는 로마정부가 세계를 평정하여 태평성대(太平盛大)를 이룩한 것 같이 보였다. 이러한 판단은 당시 제국주의자였던 로마 정치인들의 패권주의의 판단의식임을 알아야 한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동, 서의 문화, 경제, 교통의 교차점이며 국내외적 상황은 불안하고 부조리에 처절하기 그지없었던 정치적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 국내적으로 계층 간의 갈등과 분열은 심각했다. 경제적 수탈도 극심했다. 하향적 사회이동이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국외적 상황은 형식적으로는 로마의 식민지로 정착되어 있어 극렬한 민족 해방운동이 일어나 로마 군관계자들에게는 긴장 관계가 끊임없이 계속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이때 민족해방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오심을 잃게 되었음도 알게 한다. 이러한 성탄의 상황을 살피면서 지금도 예수를 잃은 많은 신앙인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음을 알게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탄을 맞을 때마다 예수가 결코 역사적 공백지대나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진공지대(眞空地帶)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세속역사(世俗歷史) 한 가운데서, 특별히 처절하고 부조리한 역사와 상황 속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해 인식하고 ‘축 성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는 예수교인과 기독교인은 많은데 ‘예수의 사람’들과 ‘그리스도 사람’들은 부재(不在)라는 어느 사회 인사의 말이 성탄일에만 생각나게 한다. 축하의 축제도 좋지만 예수의 삶이 태어나는 ‘예수사람’ 탄생이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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