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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안에 오신 주님(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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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아침입니다. 성탄인사를 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나님의 은총이 이 성탄에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탄은 기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쁨과 소망 그리고 사랑과 생명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어느 분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며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색종이를 오려서 우리 집 유리창에 별을 달듯이 오늘은 우리 마음의 창마다 당신의 이름을 별처럼 걸어 놓고 당신이 오신 기쁨을 노래합니다.

멀고도 험한 길

주님이 이 땅에 큰 기쁨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의 길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동방에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멀고 험한 길을 달려오셨습니다. 춥고도 어려운 길, 외롭고도 쓸쓸한 길, 두렵고도 지리한 길을 따라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아무 이름도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18절을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한 시골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오셨습니다. 왕이 오실 때에는 수많은 군중 가운데 오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초라한 처녀를 통해서 오셨습니다. 머리는 샴푸가 없어서 부스스하고, 얼굴은 화장품도 제대로 없어서 검불그스레 하며, 몸은 시골 처녀라 맵시라는 것을 몰라서 늘씬하지도 않고, 옷도 그냥 양털을 깎아 만든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시골처녀의 몸에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수많은 갈등을 한 사람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의심이 되기도 하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오늘 성경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불의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욕하지도 못하고, 동네방네에 소문을 내지도 못하고 오죽 했으면 조용히 마리아와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겠습니까? 요셉의 아픔을 이해합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자 모든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마리아와 관계를 끊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공회에 마리아를 고발하여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고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결혼하기 전에 임신을 하면 돌에 맞아 죽던지 그 공동체에서 쫓겨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너무나 오랜 기다림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은 창세기 때부터 예언이 되어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나 예수님은 노아 시대에도 오지 않으시고, 아브라함 시대에도 오지 않으시고, 다윗시대에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였을 때에도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지 400년이 지난 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엄청난 세월의 기다림 속에 사람들은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요? 죄에 빠진 인간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기다렸을까요? 가난과 질병과 혼동 속에서 방황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메시야를 사모했을까요?

"이사야는 메시야를 사모하며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62:10-12)

이사야는 메시야가 어서 오시도록 성문에 나가서 기다리며 메시야가 오시도록 대로를 만들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이사야 시대에 오지 않으시고 몇 백 년이 지난 후 시골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기쁨은 낮은 데에 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오셨을까요? 왜 이렇게 누추하게, 당혹스럽게 그리고 오래 세월 지난 후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의 세계가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기쁨과 참 생명과 참 희망이 이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낮고 누추한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말씀하실 때 맨 처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 한 자에게 천국이 있고, 그 삶이 겸손하고 낮은 자에게 하늘의 보화가 쌓인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겸손의 세계입니다. 낮은 세계입니다. 순종의 세계요 섬김의 세계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왜 세상에 평화가 없는 줄 아십니까? 세상이 너무나 교만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세상이 언제나 시끄럽고 소란하고 난리입니다.

교만은 몇 가지 커다란 해악을 줍니다. 첫째가 조급성입니다. 황우석 박사의 사건이 그런 사건입니다. 왜 꼭 2005년도 논문을 조작해야했을까요? 왜 천천히 그 좋은 연구를 발전시키면 안되었을까요? 조급성 아닙니까? 남보다 더 우월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조작하고 이것이 모두 교만 때문입니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교만입니다.

둘째가 분노함입니다. 분노함은 자존감에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 분노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 분노는 모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파괴시킵니다. 이 분노는 교만 때문입니다.

셋째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남을 비난합니다. 남을 비웃습니다. 항상 비교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잘하면 괜한 열등감에 빠지고 자기보다 못하면 우월감에 빠져서 상대방을 괴롭힙니다. 사람은 교만하면 비교하고 남의 흠을 잡아냅니다. 90%를 잘하고 10%를 못하면 그 못한 10%를 잡아내어서 마구 괴롭힙니다.

넷째가 하나님과 멀어짐입니다. 교만함은 하나님이 제일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멋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토양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시골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오셨고, 시골 총각 요셉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왜 이기려고만 하시지요? 왜 높아지려고만 하시지요? 왜 양보하면 안 됩니까? 왜! 다른 사람을 좀 인정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까? 왜 한번 정도 져주면 안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기쁨의 나라는 겸손함에서 얻는 기쁨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은 높고 교만한 것으로는 도저히 맛볼 수 없고, 얻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희망도 독한 사람, 비판하는 사람은 도저히 얻을 수 없고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생각해서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맛볼 수 없고 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겸손함과 따뜻함, 섬김과 온유함, 낮아짐과 순종함 이 사람들만 누리는 큰 기쁨입니다.

조용히 순종할 때 찾아오는 위대한 능력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이제 순종하기로 합니다. 24-25절입니다.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것에 두려워하고 있을 때 천사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요셉아 두려워 말라. 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일이다.

이 천사의 말에 요셉은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갈등을 다 씻어버리고 조용히 순종합니다. 마리아를 정성껏 보살핍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모든 준비를 경건하게 합니다.

기도로 준비했을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하루에 세 번식 기도했을 지도 모릅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했을 지도 모릅니다.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놓고 간절히 사모하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성탄절은 즐거운 시간입니다. 기쁨의 환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다는 기쁨의 시간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쁨이면서 동시에 순종의 시간입니다. 즐거움이면서 동시에 믿음의 시간입니다. 찬양이면서 동시에 돌이킴의 순간입니다. 나눔이면서 동시에 용서의 시간입니다. 만남이며 동시에 세상에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던지는 시간입니다.

이 해인 수녀가 성탄을 맞이하여 성탄의 기쁨이란 시를 지었습니다. 감상해보십시오.

조그만 예수 아기가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성탄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입니다.
그분의 생일은 우리의 생일입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다시 겸손하라고
다시 사랑하라고
천사들이 노래하며
삶의 무게에 지친
우리의 어깨 위에
날개 하나 달아줍니다.
이제는 우리의 이름을
기쁨으로 바꾸라며

희망으로 바꾸라면서
노엘 노엘 노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제 우리에게는 할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잃어버렸던 온갖 것들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교만이 물러가고 겸손이 찾아왔습니다. 죽음이 물러가고 영생이 찾아왔습니다. 슬픔이 물러가고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절망이 물러가고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병이 물러가고 건강함이 찾아왔습니다.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물러가고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놀라게 해드릴 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기쁨을 주고, 희망을 주고, 겸손함을 주고,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 기쁨을 맛보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교만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지 맙시다. 조급함으로도 하지 맙시다. 오직 성령의 뜻으로 합시다.

이 성탄에 예수님이 주신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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