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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그리스도인의 광야생활 (히 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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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금년의 마지막 주일이면서 또한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기에 적합한 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해 동안 우리는 저마다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성취와 좌절, 기쁜 일과 슬픈 일, 그리고 여러 가지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좌초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할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3장 말씀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이 시간, 저는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해서 “그리스도인의 광야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피차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 사건과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비교해 봅시다.

성도님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야곱의 말년에 애굽으로 내려가서 430년 동안 고센 땅에서 살았습니다. 창세기 42장 이하에 보면,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게 된 연유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줄여서 설명하면, 당시 가나안과 애굽 전역에 7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양식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7년 풍년에 양식을 저축해 두었으므로 주변 지역의 사람들이 다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다 먹었습니다. 이 때 야곱의 아들들도 애굽에 양식을 사러갔는데, 거기서 요셉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 그의 온 집안을 다 초청하였으므로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가족은 모두 70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430년 후에는 장정만 60만이 넘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긴 나머지 혹독한 노역을 시켜 기력을 쇠퇴시키고,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게 했습니다. 그 고난의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 부모가 석 달을 숨겨서 길렀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자 갈대로 상자를 만들고 그 안팎을 역청으로 칠한 후에 그 안에 모세를 누여 강가의 갈대사이에 두었습니다.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강가에 왔다가 상자 속의 아기를 발견하고 준수한 아기인지라 자기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이리하여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익혔습니다.

모세는 40세 쯤 되었을 때 고통당하는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히브리인들의 노역현장을 보러 나갔는데, 거기서 그는 애굽인 감독이 히브리인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애굽인을 쳐서 죽이고 모래에 파묻었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갔는데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그 그른 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했습니다. 모세는 일이 탄로 난 것을 알았고, 바로가 이 일로 모세를 죽이고자 찾는지라, 그 길로 미디안 광야로 도주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장인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어 40년을 지냈습니다.

드디어 모세의 나이 팔십이 되었습니다. 젊은 날 가졌던 동족을 해방시키려던 꿈은 이미 사그라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세를 불러 히브리인의 해방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손에 목자의 지팡이 하나 가지고 바로를 만나러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모세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습니다. 피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악질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그리고 열 번째 재앙은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었습니다. 바로는 재앙이 내리면 모세를 불러 ‘내가 범죄했으니 이 재앙을 물러가게 해 달라 그러면 히브리인을 풀어주겠다’고 했으나, 재앙이 물러가면 다시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죽는 재앙 앞에서는 그만 두 손을 다 들고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애굽을 떠나게 허락했습니다.

한편, 장자가 죽임을 당하던 그 날 저녁에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집집마다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대문에 바르고 집안에 머물렀으며, 하나님의 사자가 이 피를 보고 히브리인들의 집을 넘어갔으므로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기념한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바로의 허락이 떨어지자 히브리인들은 그 날로 모세의 영도 아래 애굽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불기둥 구름기둥의 호위를 받으면서 행진하다 보니 어느덧 홍해 가에 이르렀습니다. 애굽의 국경 수비대가 보니, 히브리인들이 길을 잃고 광야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지라 이 사실을 바로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히브리인들을 놓아 보낸 것이 분하던 차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마음이 변해서,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와 마병을 동원해서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사람들이 가까이 미친 것을 보고는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또 모세를 향하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서 그 사이로 이스라엘 자손을 무사히 건너게 하셨고, 뒤따라 들어온 애굽의 마병들을 홍해에 수장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을 완전히 탈출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만 남았습니다. 시나이 반도는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기 때문에 오아시스를 제외하고는 물을 구할 수 없고, 누런 흙과 돌멩이로 덮인 거친 벌판과 산들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소수의 베드윈 족이 양이나 염소, 낙타 등을 치면서 살아갑니다 마는, 이스라엘 자손처럼 큰 민족이 한꺼번에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우선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매일 아침에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해가 뜨겁고 밤이면 추운 곳이지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차양을 쳐서 햇빛을 가려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광야는 이스라엘 자손의 영구적인 거주지가 아니라 잠시 거쳐 가는 곳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종 되었던 처지에서 해방된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애굽은 죄악 세상을 말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우리는 마귀의 종으로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행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죽임 당한 어린양들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자손이 홍해를 건넘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악 세상과 결별한 것입니다. 선민이 두 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는 종살이했으나 출애굽한 후에는 자유인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늘 기억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적 자유를 끝까지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비교해 봅시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당시 선민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지중해를 끼고 해변 길로 가는 것으로서 걸어서 보름 정도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 길을 택하지 않았는데, 이는 호전적인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대신 선민은 남쪽으로 홍해를 끼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 길은 전자보다는 멀지만, 넉넉잡아서 한 달 보름이면 가나안에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민이 가나안 접경까지 가는데 일 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것은 시내산 아래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들고 인구조사 등을 하는데 시일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은 난생처음 광야생활을 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출애굽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나자 가지고 나온 곡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양식이 떨어졌으면 조용히 그 사실을 모세에게 알리면 되었을 텐데, 이스라엘 자손은 불평부터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으며, 선민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기까지 계속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는 사람과 짐승이 마실 물을 구하는 것도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한번은 르비딤이란 곳에 머물렀는데,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세를 찾아와서 다투었습니다.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며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광야생활이 어려운 것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모세를 원망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에 광야에서 영구히 살아야 한다면 몰라도, 선민에게 광야는 한갓 지나가는 곳에 불과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가나안 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광야생활의 어려움은 기꺼이 감수할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뿐 아니라, 광야의 어려움을 견딜만한 좋은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선  농사를 짓지 않고서도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물을 구하기 어려운 광야에서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항상 그들을 호위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선민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모든 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어느 나라의 법도 하나님의 율법처럼 공의롭고 인정스러운 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뿐 입니까? 모세와 같이 지혜롭고 희생적이고 사명감이 투철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자손처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불편을 겪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양보하고 포기해야 할 것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개중에는 떠나온 애굽을 동경하고 광야생활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했던 이스라엘 자손처럼 세상 즐거움을 동경하고 신앙생활을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과 구별된 삶의 원칙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원칙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날 사단의 종살이 하던 때를 동경하는 것이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원망, 불평하던 자들도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때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해 나가는 동안 점점 그 감격이 식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언제부턴가 종살이에서 해방된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현실의 어려움만 바라보고 원망, 불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이스라엘 자손의 일을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순례의 길을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즐기던 것들을 동경하면 안 됩니다. 세상 것을 동경하면, 신령한 만나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교회가면 언제 들어도 똑같은 말만 한다고 싫증을 냅니다. 따분하게 예배만 드리지 말고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한번 먹고 마시고 즐겨보자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지나치게 믿지 말자고 합니다. 봉사를 해도 체면치레를 할 정도만 하면 됐지, 무슨 사명감을 갖고 할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자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산 아래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비를 받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시내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아론에게 몰려와서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론은 그만 위협적인 분위기에 굴복해서 백성들이 가져온 금고리와 금팔찌 등을 녹여서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하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습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보고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오늘날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물신(物神)을 섬깁니다. 황금을 신으로 섬깁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그들의 마음은 물신숭배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한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골 3:5).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일 세대 중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같이 경고합니다.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도 자만하고 방심하면 시험에 들어서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불순종의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기어코 영원한 가나안인 천성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해 봅시다.

히브리서 3장은, 이스라엘 자손의 영도자 모세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해서 말씀합니다. 구약성경의 인물 가운데서 모세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전 생애를 히브리 민족을 위해 바쳤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광야생활 40년 동안 선민을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종살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자기 목숨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함께 하시면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도 위대한 인물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더욱 위대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 보니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또 모세는 지음 받은 존재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시므로 더욱 위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거역하고 그가 전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고 말았다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고서야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광야에서 죽은 자들도 모세를 따라서 애굽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목격했으며, 홍해가 갈라지는 광경을 보았고, 바닷물이 좌우에 벽처럼 서 있는 그 사이를 걸어서 건넜던 자들입니다. 만나를 먹었고,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를 받았으며, 시내산이 화염에 불타는 가운데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목격했던 자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금송아지를 숭배하였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으며, 자주 하나님의 종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 근처까지는 갔으나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모세를 불순종한 것은 곧 그를 세우신 하나님을 불순종한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영도자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라 함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받는 도리를 전해 준 분이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이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보혈로써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셨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구약의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짐승의 피가 사람의 죄를 없이하지 못하므로 구약시대의 속죄 제사로는 완전한 속죄를 이룰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드리신 속죄 제사는 단 한 번에 온 인류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믿는 우리에게 권고하기를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나이 많아 세상을 하직할 날이 가까움을 알고는 이스라엘 자손을 불러 마지막 당부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당부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37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님이 공회에 모인 자들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고 하면서 모세가 말한 그 선지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모세는 불순종하기를 잘하는 백성들에게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불순종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말을 불순종한 자들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불순종한 자들은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자손이 거쳤던 광야보다 더 어려움이 많은 곳입니다. 먹고 사는 어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지켜나가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입니다. 그 고통은 사람들의 상태가 너무나 악화되어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딤후 3:).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온갖 유혹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세속화된 신자들에 의해서 세속이 교회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할 대비책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출애굽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죄악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옛 생활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앙생활이 이스라엘 자손의 광야생활과 같음을 알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섬기느라 당하는 불편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믿음의 사도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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