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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구하시는 것을 드렸습니까? (미 6: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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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8절을 다시 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한 절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에서 말라기에 이르기까지 십여 명의 예언자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나훔, 하바국, 이런 사람들을 후기 예언자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자기의 예언을 문서로 남겼기 때문에 문서 예언자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본격적인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후기예언자들 가운데 예언활동을 일찍 시작한 예언자가 넷이 있습니다.
시대 순으로 말하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입니다.
이들은 기원전 8세기,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기 전에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라고도 합니다.

그 가운데 아모스는 정의를 강조했습니다.
아모스는 5장 1절 상반절에서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라고 외쳤고, 5장 24절에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외쳤습니다.

호세아는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호세아는 14장 4절에서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들에게서 떠났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이사야서 7장 9절 하반절의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66장으로 된 이사야서의 요절입니다.

미가는 6장 8절에서 이 셋을  다  종합하고 있습니다.

6장 8절을 다시 봅니다.
중간 부분의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아모스의 정의입니다.

그 다음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호세아의 사랑입니다.
그 다음,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한다면 겸손과 순종, 합하여 이사야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미가서 6장 8절을 기원전 8세기 예언의 종합이라고도 하고 기원전 8세기 예언의 정점이라고도 합니다.

8절은 주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정의, 사랑, 믿음 이 셋입니다.

오늘은 2006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 올해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구하시는 공의와 사랑과 믿음을  드리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공의와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 하나씩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설교 준비를 할 때 평상시라면 공의에 대해서 설교할 때 신학사전에서 공의 항목을 찾고, 성구 사전에서 공의라는 말이 나오는 성구들을 찾고, 예화사전에서 공의에 대한 예화들을 찾고, 이렇게 해서 기도와 묵상으로 비빕니다.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말씀을 드립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상식적인 설교가 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공의를 드려야합니다.

어떤 성도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셨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도 사람들을 얼마든지 용서하고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이 질문을 받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눅 23:44).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외면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시는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셨습니까?
공의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처벌해야 하는데 처벌하지 않고 그대로 용서하면 그것은 공의가 살지 않은 사랑입니다.
결격사유가 큰 사랑입니다. 그것은 월권이요, 불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 있는 공의에 대한 말씀들은 빛을 잃습니다.
공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는 벌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대속(代贖)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속, 대신 죄를 속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사랑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공의의 교훈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세로 막대기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세로 막대기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 예화는 7, 8년 전에 한 두 번 사용한 일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수지 옆에 있는 성남시가 예전에는 광주대단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곳에는 청계천 옆에 판자집을 짓고 살다가 철거당한 사람들이 옮겨와서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연세대학을 졸업한 최규성이라는 목사님이 거기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실업학교를 세워 가르쳤습니다.
학교건물을 지었는데 무허가 건축물을 세웠다고 고발을 당했습니다.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가 벌금 20만 원을 언도했습니다.
그 때 중학교 교사 봉급이 4만 원쯤 할 때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많은 벌금을 어떻게 내나?’ 걱정하면서 법원을 나서는데 법원 서기가 따라와서 ‘목사님, 재판장님이 판사실에 좀 들렸다 가시랍니다.’ 전해 주었습니다.
벌금형을 언도한 판사에 대해 원망스러운 마음이 있어서 가기 싫었지만 오라는데 안 갈 수도 없어서 판사실을 찾아갔습니다.  벌금을 언도한 판사가 기다리다가 정중한 태도로 앉으시라고 하더니 책상서랍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서 주더랍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그 안에 20만 원이 들어 있으니 그것으로 벌금 내고 가십시오. 목사님이 법을 어기셨지만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는 벌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벌금형을 언도했고, 목사님이 하시는 좋은 일에 저도 힘을 보태고 싶어서 급히 이 돈을 마련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더랍니다.
이 판사가 사실은 벌금형을 언도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가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공의도 살리고 사랑도 살리고 싶어서 이런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모임이 있습니다. 이름이 연목회(延牧會)입니다.
회원이 4천 명이 넘습니다. 신과대학만이 아니고 일반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분들을 포함한 숫자입니다.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름이 고목회(高牧會)입니다.
회원이 400명이 좀 넘습니다.
얼마 전까지 매년 새 학기가 되면 고목회와 연목회가 공동으로 두 학교 신입생들을 위한 집회를 했습니다.
5, 6년 전에 동대문 옆에 있는 중앙성결교회에서 이 집회를 했습니다.
그 때 두 학교 졸업생 가운데 신앙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신입생들에게 간증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쪽에서는 손범수 아나운서가 나왔습니다.
고려대학교를 대표해서 신앙으로 성공한 사람은 우리 교회 교인이 나왔습니다.
누가 나왔을 것 같습니까?
김효정 자매, 고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사법고시에 도전, 합격해서 검사가 된 분입니다.
김동필 장로님․송신자 권사님 따님, 지금 춘천지검에서 근무하고 있지요.
그 때는 사법연수원생이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간증을 아주 잘 했습니다.
그날 제가 차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미금역 주변에 그때는 공터가 많아서 거기에 차를 주차해 놓고 전철로 갔습니다.
집회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마침 아까 그 이야기 주인인 최규성 목사님이 차를 가지고 왔기에 ‘목사님 우리 둘 좀 미금역까지 태워 주세요.’ 해서 그 목사님 차로 왔습니다.
오면서 이 분이 바로 그 목사님이라고 하고, 그 목사님에게 그 이야기 다시 한 번 직접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사처럼 공의도 살리고 사랑도 살리는 법조인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불의하다고 나도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만이라도, 나만이라도 공의롭기 위해서 힘써야합니다.
그것이 이 사회를 버티고 있는 버팀목이 됩니다.
성도들까지도 공의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그리고 사회가 무너집니다.

정의 예언자 아모스가 왜 사람들에게, 특히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아모스 때, 여로보암 2세라는 임금 때였는데 사회 전체에 불의한 일이 많았습니다.
상도덕, 성윤리가 타락했고 빈부격차가 심했습니다.
아모스는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고하게 정의를 외쳤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잠언서 21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오늘 말씀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공의를 드리기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사랑을 드려야합니다.

사랑이라는 말, 우리가 참 많이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중심교훈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도 사랑이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517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 뜻을 생각하면서 하십니까?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감동을 느끼십니까?
사랑을 주제로 한 설교에서 은혜를 받습니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편지를 끝낼 때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몇 월 며칠, 아무개 배(拜)’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배는 ‘세배’라고 할 때의 배입니다.  ‘엎드려 절합니다’ 하는 뜻입니다.
선생님 한 분은 편지를 읽다가 끝이 ‘아무개 배’ 이렇게 되어 있으면 자기도 엎드려 편지에 대해 절했다고 합니다.
‘아무개 재배(再拜)’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배는 ‘두 번 절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편지 끝에 ‘재배’라고  되어 있으면 이 선생님은 두 번 절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물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편지를 보낸 사람이 비록 내 앞에 있지 않지만 엎드려 절한다는데 내가 어떻게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있느냐?’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이 선생님이 ‘배’자라는 말에 대해서 느끼는 정도의
외경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하실 때 우리는 ’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무척, 무척 사랑한단다.’ 하면 ‘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을 무척, 무척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공의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합니다만 사실은 사랑하나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이야기인데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에베소에서 목회하는데 나이가 많아졌습니다.
설교를 할 때도 의자에 앉아서 했습니다.
제자들이 의자 째 들고 나와서 강대상에 모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한 마디 했습니다. 
한참 있다가 다시 “제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한 마디 했습니다.
그것이 설교의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이 ‘사도님, 오늘은 다른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하면 ‘아니다. 사랑.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그렇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한국의 성도들이 사랑이라는 말의 뜻을 알고 이 말을 사용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면, 이 한 가지만 해도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질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에 힘쓰며 2006년을 보내왔습니다.
「푸른 풀밭 맑은 시내」37호, 11월․12월 호가 이번 주에 나올 것인데 거기에 ‘2006년 목양행전 10대 뉴스‘가 있습니다.

여러분 2006년 목양교회 10대 뉴스 가운데 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19 새 생명 큰 잔치 두 번 한 것입니다.
그 결과 1994년 대치동 성전을 철거한 이후 제일 많은 숫자의 새 가족이 등록했습니다.
두 번째가 디지털 선교가 쇄신된 것이고 세 번째가 로스토프 선교가 확장된 것입니다.
10대 뉴스에서 1번, 2번, 3번이 모두 전도와 선교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2007년에도 변함없이 전도에 힘쓸 것입니다.
2006년 교역자 팀을 구성하고 업무를 배정할 때 선교 담당 목사는 전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부임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만 선교를 담당한 목사님에게 ‘목사님은 전도, 속회, 선교회, 이 세 말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도할 때 전도대상자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의무감에서, 남이 하니까, 전도실적 올리기 위해서 전도하면 참 피곤합니다.
열매도 잘 맺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하면 뿌리를 잘 내리지 않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 상대방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전도가 잘 될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전도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들이 뿌리를 튼튼하게 내릴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같은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는 너를 더욱 사랑한다.’ 하실 것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께서 그 힘을 풍성하게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다시면서 구원해 주시도록 사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시 한 번 고백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사랑을 받고, 힘을 얻고, 이웃도 사랑하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하시는 믿음을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믿음은 사실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믿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참 멋있는 정의인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목사인 제가 이해하기 어려우니 여러분은 더 어려우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믿음은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다.’ 했습니다.
시적인 아름다운 정의인데 이것도 믿음의 부분적인 면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알기 쉬운 정의 하나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겸손 더하기 순종,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겸손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 새벽기도에 대해서 좀 강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2007년을 가장 내실성 있게 맞이하는 것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새벽기도에서 시작되었고 또 1907년의 대부흥운동 때문에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거든요. 

어제 어느 성도가 말하기를 ‘목사님, 평소와 달리 강하게 말씀하셨네요. 이제 성도들이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올 것입니다.’ 했습니다.  저도 일단은 기대가 됩니다. 

금요심야합심기도회 설교에 준비했다가 그만 모르고 빼먹은 대목이 있습니다.
양해하시면서 들으세요.  ‘새벽기도회 안 나오고 어떻게 장로라고 할 수 있습니까? 새벽기도회 안 나오고 어떻게 권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집사님들은 새벽기도회 안 나와도 좋다는 이야기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권사 후보들을 천거할 때 엄격한 평가 기준이 있는데 거기 주일성수는 10.4로 배점이 되어 있습니다.
각종 예배, 주일저녁, 여선교회 회원들의 수요예배 참석, 심야합심기도회 참석, 새벽기도회 참석이 모두 합해 5점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의 점수를 좀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밤에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내일은 새벽기도회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레부터, 화요일부터  새벽기도회 많이, 열심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다음 금요심야합심기도회에서는 회개에 대해서 더 강한 말씀을 할 것입니다.
2007년 1월의 표어가 ‘심층 회개의 달’입니다.
1907년의 대부흥운동은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회개할 것입니다.
저 자신에 대한 가장 큰 회개는 겸손한 척하면서 사실은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서운 교만, 위선이 있는 것을 회개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가장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따르기 어려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큰 믿음입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고향에서 평안하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얼마나 어이없는 명령입니까?
청천벽력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순종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8절에서 공의를 말하고, 그 다음에 사랑을 말하고, 그 다음에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삼각형에 대해서 말하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꼭대기를 말하고 중간을 말하고 그 다음에 밑변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사랑도 믿음을 기초로 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 가운데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정의도 믿음을 기초로 한 것이어야 합니다.
믿음을 기초로 한 정의가 법이 말하는 정의보다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 중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고,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은 사회봉사활동은 요즘 동회마다 있는 사회복지사들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더욱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서 기초가 튼튼한 신앙인으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8절 앞, 6절과 7절에서는 일 년 된 송아지,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맏아들, 내 몸의 열매가 나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는 가장 잘 선별된 희생 제물을 말합니다.

레위기 9장 3절을 보면  번제 제물로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송아지와 어린 양을 가져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은 아주 많은 예물을 말합니다.
맏아들은 가장 귀한 것을 말합니다.
미가는 혹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의 열매는 자녀들을 말하기도 하고 내가 수고해서 얻은 소득을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보다 우리에게 더 먼저 원하시는 것이 공의와 사랑과 믿음입니다.
공의와 사랑과 믿음 없이 이런 것을 바치고 ‘내가 할 일 다 했다.’ 하는 것은 무익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제사가 됩니다.
예언자들은 이와 같은 형식적인 제사를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정성스럽고 많은 제물이 믿음의 표현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산 제물로 여기십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고 간증이 되기를 바라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제, ‘2006년에 우리 가정에서 얼마나 봉헌을 했나?’ 교회 컴퓨터에서 뽑아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무기명으로 하는 주일헌금과 속회헌금을 제외하고 기명으로 하는 헌금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컴퓨터에 다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왕 내친 김에 제가 1997년 11월에 목양교회 8대 담임목사로, 정확하게는 7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봉헌을 했나 뽑아보았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많았습니다.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를 기준으로 최소한 10분의 6조 이상을 했습니다.
계산에 따라서는 10분의 7조가 될 것입니다.
부임해서 몇 년 동안 건축헌금에 집중적으로 힘썼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10분의 3 내지, 4 가지고 생활하고,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시집보내고, 저도 문학 공부에서 방향을 돌려 신학석사, 신학박사 공부 다 했습니다.
생활비와 함께 때때로 교회와 성도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신기했습니다.
방송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는 그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가지고 봉헌은 적게 하면서도 쩔쩔 맸거든요.
이런 것이 바로 봉헌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제목을 가지고 감사헌금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믿음에서 나온 봉헌이었나?’ 깊이 살피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못해 한 봉헌은 아니었나?’
‘성도들의 봉헌을 많이 끌어내기 위한 목적전시성 봉헌은 아니었나?’
목회할 때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어떤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의한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하면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제부터 이 문제를 계속해서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기초를 두고 모든 것을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공의, 사랑, 믿음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미가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공의, 사랑, 믿음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공의, 사랑, 믿음을 구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신명기 10장 12절과 13절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2006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을 드리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혹시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드리기에 힘쓰면서 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기 어려우면 이제 남은 몇 시간만이라도 그와 같은 것들을 드리기에 힘쓰시면서 2006년을 닫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이제 몇 시간 뒤에 시작되는 2007년, 여러모로 특별한 해,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며 살겠습니다.’ 서원하는 주일이 되기를, 이것을 구하시며 우리가 이렇게 행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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