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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예수께서 나시매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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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나시매
(마태복음 2장 1절~12절)

어느 날 고아원에 얼굴이 흉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아이를 찾으러 온 아주머니와 보호 받고 있던 원아가 면회실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뒤돌아서서 달아났다. 엄마는 두 팔을 벌린 체 하염없이 울었다. 고아원 원장님이 달려가 담벼락 뒤에 숨어버린 아이에게 아주머니의 얼굴이 왜 이렇게 흉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화재가 크게 나던 날, 이 아주머니는 방안에서 자고 있는 너를 구출하기 위해 불더미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너는 구출해 내었지만 이렇게 화상을 심하게 입어서 얼굴이 흉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아이를 고아원에 맡기게 된 것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다시 데려가겠다는 조건으로 맡긴 것인데 이제 보고 싶은 아들을 찾으러 엄마가 고아원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엄마의 얼굴이 이그러진 것,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불에서 건져내시려다가 상한 것임을 알고 엄마의 등으로 달려가서 안겼다. 엄마의 사랑을 모를 때는 도망치는 아이였으나 엄마를 알고부터는 엄마 때문에 감격하였다.

여기 위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예수님에 대하여 반응을 보이는 동방 박사들과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헤롯 왕 때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 예수가 탄생한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에 별빛이 나타났다. 계시가 나타났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께서 나시매 동방의 페르시아로 추측되는 곳으로부터 점성가라고 일컬어지는 아주 이질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이 찾아왔다.

왜 그들은 예루살렘까지 찾아왔는가?

마2:2下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였다. 이 말은 예수가 진정한 왕이시기에 왕으로 섬겨야 한다는 고백이다. 이는 바로 동방 박사들이 예수를 바로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예수로 믿으면 예수가 계신 곳으로 오게 된다. 예수께 경배하게 된다.

마2:11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에는 큰 뜻이 있다. 그러니까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에 나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믿었고 거기에 맞는 예물로 예수님의 됨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즉 황금은「예수의 왕 되심」유향은「예수님의 거룩한 생애」몰약은「쓰디쓴 고난의 삶, 그리고 부활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높인다.

어떤 학자들은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에게 세 가지 예물을 드린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의 왕되심 앞에서 새 삶을 고백하는 예배 행위라고 하였다. 즉, 박사들의 과거 직업은 점성가 또는 마술사였다. 마술사라는 직업에 있어 황금, 몰약, 유향은 직업에 따르는 중요한 재료들이다. 그런데 그 재료들을 예수 앞에 드리는 것은 자신의 지금까지의 직업을 포기하고 새롭게 살아가겠다는 결단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변화가 온다. 예수님을 몰랐을 때 반복하던 삶의 행태들을 다 내려놓고 새로운 인생의 꿈을 꾸게 된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에서 강단 위에 담배가 드려졌다. 강사는 이 담배가 어느 술꾼의 장난기 섞인 예물인 줄 알고 야단을 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 말씀에 은혜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받아드린 술주정뱅이가 자기 삶을 내려놓고 새 삶을 결단하는 표현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술, 담배에 사로잡힌 삶을 살지 않고 주님께 모두 맡겨 드린다는 결단이었다.

예수를 믿으면 달라진다. 변화된 인생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이 알아본 아기 예수를 정작 유대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다. 이것은 성탄의 아이러니이다. 그들은 예수를 알았으나 믿지를 않았고 예수를 다른 목적으로 알려 하였다.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여기 이 사람들을 보라.

첫째, 헤롯 왕이 알지 못하였다. (마2:3)

마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헤롯 왕은 분봉 왕으로서 유대를 다스리는 왕은 자기 밖에 없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며 왕의 탄생을 묻는 동방 박사들의 소식을 듣고 소동을 보였다. 헤롯 왕은 예수의 왕되심을 알지 못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정치적인 왕, 전쟁을 치르는 왕이 아니고 평화의 왕, 구원의 왕, 사랑의 왕, 겸손의 왕이 출현한 것인데 예수를 알이 못하여 오히려 예수를 오해한다. 자기와 대적한 왕인 줄 알고 예수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는 유아 학살 명령을 내리는 미움의 주인공이 되었다. 왕이 예수를 모르니 자신의 삶이 살인의 괴수로 전락하였다. 즉 예수를 알고자 애쓰는 헤롯 왕은 예수를 죽이려는 목적으로 예수를 알려 한 것이다.

둘째, 예루살렘 백성이 알지 못하였다. (마2:3)

왕이 탄생한 소식은 헤롯 왕에게만 소동거리가 된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시민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 다양한 종교인들에게 소동거리가 되었다. 예수를 알지 못하면 예수가 자기 땅에 태어났어도 문제다. 상인이든, 농사꾼이든, 로마인이든 예수가 왕이 되심을 받아드릴 수 없다. 예수를 알지 못하기에 오히려 예수에 대한 의혹을 가진다. 소동을 벌인다. 소동이란 시끄럽게 되고 소란스럽게 된다는 뜻이다. 왕이 존재하는데 또 하나의 왕이 태어났다는 오해는 사건을 만드는 주제로 확대되게 된 것이다.

예수를 알지 못하면 평화와 사랑을 누릴 것이 소란스러운 사건이 된다. 예배와 경배, 찬양과 기쁨이 혼돈과 적대감, 무질서와 다툼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자기 땅의 백성들은 예수를 알아도 비웃고 경멸하기 위해 알려고 했을 뿐이다.

셋째, 지도자들이 알지 못하였다. (마2:4)

마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사7:14, 미5:2에 나타난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탄생하는 예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성경을 잘 알고 정확하게 대답하고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이란 산헤드린 회원을 의미한다. 유대교의 보호와 장려를 위해 만들어진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은 사법적인 힘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요, 말씀과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예수 탄생을 알지 못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알고는 있으나 정녕 그분이 자기 땅에 예언의 성취로 오셨지만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경을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아는 자의 비극이다. 예수가 메시야임을 안다. 태어난 곳을 안다. 그러나 지식으로만 알면 섬김이 없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성탄이 예수 오신 날임을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러나 이런 앎은 쓸모없는 것이다.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큰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다. 성경공부가 지식 전달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앙은 머리로 이해해야 하지만 삶으로 만나야 하고 삶으로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펴 놓고도 지도자들은 오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신앙을 머리로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배하기 이다. 신앙은 이해보다 중요한 것이 섬기며 드리는 일이다. 신앙은 지식 축적보다 중요한 것이 변화를 위한 옛 것의 포기이다. 여기 동방 박사는 예수를 제대로 알고 믿었다. 그래서 제대로 섬기며 예배하지만 유대 땅의 모든 왕과 백성, 지도자들은 예수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믿지 않는 저들은 예수를 알아도 죽이려고, 조롱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두 가지 상태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어머니의 흉악한 얼굴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고아원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을 믿지 못하여 어머니를 멀리하듯 유대 땅 모든 사람들, 모든 백성들이 예수를 거절하였다. 나를 위해 오신 예수를 믿지 못하기에 영접지 않았다. 그러나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오늘 성탄절을 묵상하는 이 아침, 우리는 동방 박사처럼 예수께로 달려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 예수를 영접하는 자가 되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괴어야 한다. 선민의 자손이라도,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한 사람이라도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면 예수를 핍박하는 자가 된다. 이방인도, 죄인의 괴수라도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환영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참된 신앙은 미움이 아니다. 조롱도 아니다. 지식도 아니다. 신앙은 움직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 일어나고 예수님께 엎드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예배하며 예수님께 귀한 헌금도 드리는 것이다. 희생하려고 찾아가는 것이다. 나의 잘못된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만한 지식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의 잘못된 삶의 방식도 내려놓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시매 그 예수가 이제 당신의 마음에 나셔야 한다. 베들레헴이 아니다. 수원 오목천교회에 다니는 당신의 가슴 속에 태어나야 한다. 내가 구유요, 내 마음이 구유여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동방 박사처럼 왕이신 그분에게 엎드리는 것이다.

신앙은 추상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의 결단이며 삶이다. 신앙은 드리면서 기뻐하고 신앙은 또 새로운 하나님의 인도로 따라가는 것이다. 말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그 복되고 존귀한 예수를 영접하여 예수께 엎드리는 성탄절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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