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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눅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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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마지막날, 마지막 주일예배네요.

인생의 끝을 생각할 때 삶의 지혜를 얻는다고 하였듯이, 2006년 한 해의 끝을 보내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지혜롭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자밟기와 돋는해잡기 하시면서 여러분도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많이 생각하였지요?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 생활의 중심인지라, 세밑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떻게 예수를 믿고 살 것인지 생각하며 돌아보기 좋은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혹시 여러분의 불신자 친구가 여러분에게, “예수믿는 게 도대체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제가 본문으로 선정한 <눅9:23>은 유명한 말씀이지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초기제자들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 말씀입니다. ‘제자도(Discipleship)'를 가르쳐 주는 대표적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 자체만 떼어서 생각하면, “뭐뭐 하고 나를 따라오너라”하시니까, 제자의 자격, 제자의 조건을 가르쳐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용상 확실히 이 말씀은 제자도(discipleship)를 가르쳐 줍니다.

‘제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종종 특별나게 선택된 사람들, 목사나 사제와 같이 직업이 사역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제자를 특별난 사람들이라고 구분하여 생각을 하는 데에는 커다란 맹점이 있습니다. 이 맹점은 교회 역사에서 숱하게 보여 왔습니다. 어떤 맹점이 있겠습니까?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은 열심은 있지만, ‘나는 보통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라고 여기는 우월의식을 갖게 되고, 제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나는 신앙생활을 적당히 해도 괜찮은 사람이야, 난 제자가 아니니까 이렇게 차지도 덥지도 않은 반(半)쪽짜리 마음의 도피처를 제공합니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공감대(consensus)가 깨어지고 계층화가 되어서 무기력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번 다시 읽어볼까요?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여러분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던 12제자에게 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성경은 명확하게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고 가르쳐 줍니다.

즉 이 말씀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또 이 말씀을 하시는 배경을 우리는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앞에 <18절>에서부터 어떤 장면입니까? 우리들에게는 <마태복음16장>의 본문이 더 익숙한,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는 그 장면이지요?

누가복음에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가 마태복음의 본문을 다시 읽어볼 터인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 이 대화에서 예수님의 마음, 심경에 어떻게 변화가 되었을까 한번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마16:13-20절> 읽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의 중간 점검을 하시는 듯한 인상을 받지요?

제자들이 대답을 하자, 곧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처음 질문은 도입성 질문이고 두 번째 질문에서 본색을 드러내신, 정말 묻고 싶은 바를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 예수님은 별로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이미지, 사람들의 지지도에 연연하여 여론에 민감하고 언론플레이에 많은 신경을 쓰지만, 예수님은 다수(多數)의 피상적(皮相的) 인식은 하나도 중요시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느닷없이, 조심스레 툭 던진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에는 예수님께서 과연 제자들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유의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긴장감의 분위기가 생겼을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짧고도 명확하게,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고 정통으로 정답을 말하자, 예수님께서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대답하시지요?

여러분, 이렇게 대답하실 때, 예수님의 심경이 어떤 느낌이었을 것같습니까? 예수님께서 안습하시지 않았을까요? “너 그거 어떻게 알았니, 아니 네가 벌써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이냐? 기특한지고..” 베드로의 정확한 대답에 감격을 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헛 사역한 것은 아니구나. 얘들을 키운 보람이 있네~” 이런 느낌도 갖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푸시고 사역을 하시는 초점이 무엇이냐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Lordship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만유의 주, 만왕의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이라는 것입니다. Lordship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역사적으로 유명한, 역사적 사건 때문에 지나치게 확대 해석되어진 구절들, <18,19절>은, 그렇게 지나치게 의미를 확대해서 부여하지 않고 쉽게 이해하면, 구원을 약속한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즉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예수님이 메시야, 그리스도,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영생, 확실한 구원이 보장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온 세상과 역사의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주인님, 오늘도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고백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Lordship을 인정하는 자가 구원의 확신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면 구원의 확신의 가르침을 쉽게 못받아들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원합니다” 이 신앙고백을 기꺼이 드리십니까?

또 한 해를 보내는 세밑에,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묵상하는 우리들 마음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머뭇거림없이 기꺼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가?”

예수님께서 당신을 적당히 좋게 평가해주는 다수의 피상적 여론에 별 관심없으시고, 정작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은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온전히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적당히 반(半)마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이미지만 갖고 적당히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으냐 그것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예수님이 메시야, 주인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3장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선포하시지요? “너희가 차든지 덮든지 하라” 여러분도 예수님의 주님되심 앞에서 차든지 덮든지 하십시오. 어중간한 태도는 반대보다 더 큰 해악일 수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고백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러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Lordship을 고백하는 것과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제자도의 말씀과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것 아닐까요? 힌트가 될 말씀을 하나 던져주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끄트머리부분에서 던져주신 날카로운 말씀이 하나 있지요?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7:21>

입술의 고백은 간혹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려고 하지 않지만, 연약한 인간의 마음이 복잡하고 생뚱맞게 생겨서 입술의 고백이 중심의 마음이 아닌 경우가 왕왕 많습니다.

베드로의 Lordship의 고백과 예수님의 Discipleship의 가르침 사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셨던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 이 제자도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진정으로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너희가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신앙고백이 진정한 것이라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Lordship의 고백이 진정이라면, Discipleship의 삶을 추구하라.“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의 진실성은 날마다 삶을 살아가는 너의 마음의 태도에서 보여진다. 네가 어떻게 살아가는 모습이 곧 네 마음의 신앙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정말로 나를 주님으로 믿는다면, 그래서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받고 영생을 누리려면, 나를 따르라” 이 가르침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의 주님되심의 신앙고백, 확실한 구원의 약속, 제자도의 생활, Lordship, Salvation, Discipleship 이 세 가지는 절대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에서처럼 이 셋은 한 몸입니다.

시작은 Lordhsip에서부터입니다. Lordship의 신앙에는 확실한 구원의 약속이 있고 Lordhsip의 신앙은 Discipleship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날마다 Discipleship의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의 고백은 가짜이고 더욱이 Lordship도 Discipleship도 모르는 구원의 고백은, 험하게 표현하면, 피상적 종교의 사기(詐欺)를 당한 것입니다.

지나간 교회 역사에서 종종 보여왔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믿는 것(to believe)과 따르는 것(to follow)을 자꾸 분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믿는 신앙고백과 따르는 삶을 분리할 수 없음을 강력히 증거합니다.

여러분 쉽게 생각해서 스승을 신뢰하지 않는데 따를 수 있습니까? 반대로 믿고 신뢰한다고 하는데, 스승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To believe is to follow).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여 예수님께 인생을 맡기고 그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려워서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지요?

그래서 한 해를 보내며 또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어귀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묻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는 예수님을 따르며 살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구원받았는가?

그 가운데 오늘 본문으로 삼은 <눅9:23>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자의 날마다의 삶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어야 함을 가르쳐 주면서 두 가지를 먼저 강조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는 것. 그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강조를 두어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심리학자들의 정의에 따르면, 자아(Ego)란 자신의 호의적인 측면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동기(motivation)를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좋게 보이려고 하고 내가 좋은대로 일을 만들려고 하는 자기중심성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자기중심성이 강화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자기중심성이 강화되면 될수록 그 자아는 경직됩니다. 우리 몸의 간(肝)이 병들면 딱딱하게 굳어서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하듯이, 사람의 육체도 죽으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듯이, 자아, 심령도 경직되는 것이 병들어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독일의 심리학자, 프릿츠 궁켈(Fritz Gunkel)은 자아가 병들어갈 때 어떤 모습들이 나타나는가, 자기중심성이 강화되어 자아가 병들어 나타나는 인격적 특징을 네 가지로 꼽았습니다. 

크게는 자아위축(自我萎縮)과 자아팽창(自我膨脹)이라는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두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치 열등의식과 교만은 동전의 양면이듯이, 자아위축과 자아팽창도 동전의 양면입니다. 둘 다 자기중심성이 강화된 결과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많이 보고 문제시 삼는 것은 자아팽창의 모습들입니다.
자아 팽창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2종류의 병든 자아상, 그 중 첫째는 스타형입니다. 흔히 공주병, 왕자병으로 알려진 자기도취적 형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모든 대화와 관계에서 자신만이 중심이 되고 자신이 모든 사람의 찬사와 관심을 끌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이 스스로 팽창해놓은 거짓된 자아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기만하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스타에게는 또 다른 스타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다른 스타는 오직 모든 힘을 동원하여 물리쳐야 하는 경쟁상대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에 대하여 마치 필름이 끊어진 영사기처럼 무감각합니다. 오직 자신을 드러내고 무대의 중심에서 인정을 받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에, 자신만 모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지독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쉽게 보입니다.

둘째는 네로형이 있습니다. 폭군 네로는 자신의 기분을 위해 로마 시 전부를 태울 수도 있는 무모함도 불사하지요? 폭군형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과 감정을 이해하고 칭찬하고 받아들일 때는 온갖 실력을 발휘하여 보상해 주고 대우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무자비하게 대상을 가리지 않고 척결하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자아상의 소유자입니다. 흔히 말하는 기분파가 이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흔히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자신에게 복종하고 따르게 만드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천재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목적을 위해 상대방을 회유와 협박으로 적절히 자기 수하에 둘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아팽창적인 모습은 병든 사람이라고 많이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는 반대되는 태도가 좋은 것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예컨대, 예배당 자리를 앉는 것을 보면 나타납니다. 자아팽창형의 사람은 잘 보이는 중앙의 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뒤쪽에 앉지요. 한국인은 자아팽창보다 자아위축의 병리현상으로 많이 치우치는 듯합니다.

그러나 자아위축의 모습은 자아팽창의 모습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여서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아가 병든 문제의 심각성은 똑같습니다. 자아위축도  2 종류의 병든 자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거북이형입니다 거북이는 주위가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얼굴을 빼고 활동하다가 불리하고 힘들다고 생각되면 얼른, 지고 다니는 껍질 속에 얼굴을 집어넣는 형입니다. 매사에 어려움과 도전을 회피하는 유형이다. 자기 논리가 안먹혀들어가겠다 싶으면 아예 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환경이 유리해지고 문제가 해결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활동하곤 합니다.

“내 속을 알려고 하지 마라. 건들면 쏙 들어간다” 식으로 살아갑니다.

만약 누가 이 거북이형의 사람에게 목 좀 내밀라고, 마음을 좀 열라고 반복하면, 처음에는 그래도 모른 척 가만히 있다고 계속 그러면 갑자기 상대방에게 공격적으로 나옵니다. 감정적인 한 마디 툭 던지고 또 목을 쏙 집어 넣지요.

둘째는 넝쿨형입니다. 넝쿨은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언제나 타의에 의해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그 쪽으로 기울고 나아갑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모험도 결단도 무의미하기만 합니다. 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그 사람들의 생각과 기분과 변화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맞추어 갑니다. 일면 어느 사람에게나 잘 어울립니다.

넝쿨형이 자신이 비빌 언덕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볼만하게 주욱 퍼집니다. 의기소침하고 감정이 헝클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원망합니다. 의존적 성향의 사람들이 이 부류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떤 형에 가까운 것같습니까? 소그룹으로 성경공부하면 이런 유형적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예들은 자아가 건강치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이 네 가지의 공통점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어서 하나같이 두터운 가면을 쓴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애써 감추거나 자기 아닌 모습을 자기 모습인 양 애써 과장하거나...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병적 현상들은 자기중심성을 강화시킨 결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자기중심성이 강화가 되고 결국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병적 심령이 되고 맙니다. 그 극단적 종말은 정신병입니다. 정신병은 자아집착이 심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애써 감추거나 자기 아닌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중심성을 벗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성을 벗어야 삶의 태도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중심성을 벗을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왜 의식과 무의식으로 되어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모든 정신분석학자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의 무의식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자기방어적인 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의 의식이 정지된, 무의식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사람, 의식의 기능이 정지되고 무의식만 존재하는 사람을 우리는 식물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식물인간인 양, 의식의 기능이 없이 본능적 무의식에 의해서만 움직여지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 노력이 없이는 인간은 자기중심성을 절대로 벗지 못합니다. 거꾸로 인간의 건강한 삶을 위하여서는 자신의 마음의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자꾸 끄집어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경건훈련, 영적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실 때, 여러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신비적인 체험을 연습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소위 무아지경에 몰입해가는 것이 영성에 중요하다 이렇게 가르쳐 주신 적이 있습니까?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인간의 무의식 저 바닥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계속해서 자극해서 드러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기도의 가르침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많이 기도하여야 기도를 잘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평가절하하시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속내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드러내는 것인데, 사람의 마음은 중언부언하여 기도를 많이 하면, 멋지게 기도하면 자신이 기도를 잘한 것처럼 도리어 자기중심성이 강화됩니다.

사실은 자기중심성을 벗고 자기를 부인하는 좋은 방편이 하나님과의 대화, 기도인데, 그 기도가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폐단을 예수님은 경계하시고 금하셨습니다.

기도는 내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는 노력입니다.

제가 왜 오늘날 많은 교회의 흐름과 다르게 우리 교인들에게 단정한 기도, 정상적인 기도를 강조하는지 이유를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자기중심성이 강화되어서 딱딱하게 병든 자아가 되는 것이 싫거든, 단정한 기도를 연습하십시오. 당신의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끄집어내는 영적 훈련을 부지런히 드리십시오. 이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배움이 필요하고 반복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영적 훈련입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성이 강화되어 딱딱한 심령이 되는 것을 막고 우리 심령이 은혜 가운데 거하는 데에는 이 골방의 기도, 단정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기중심성으로 흘러가는 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어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기중심성을 벗도록 돕는 또 하나의 좋은 방편은 대화,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대답을 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속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밖으로 드러내도록 자극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수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시몬아 네 생각이 어떠하뇨?”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너는 누가 이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교제를 강조한 것이 이 이유입니다. 속내를 나누는 교제가 되어야 치유가 일어납니다. 자신의 마음을 대화, 교제를 통해서 나누지 못하면 자기중심성은 더욱 강화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지요?

소그룹 성경공부를 해 보면 아시겠지만, 대개는 성경공부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 잘 못하는 사람이 자아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치유의 은혜를 위하여, 소그룹 성경공부, 성경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가기를 힘쓰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핀잔도 받고 그럴 때도 간혹 있겠지만, 그렇다고 자라목 들어가듯이 쏘옥 들어가면,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당신의 생각과 느낌, 솔직하게 나누는 과정이 은혜를 입는 과정입니다. 우리 교회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큰 은혜 중의 하나가 열린 분위기입니다. 마음의 이야기들을 쉽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상당히 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치유가 일어나고 딱딱한 자아를 잊어버리고 부드러운 심령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새해엔 더 쉽게, 솔직하게 성경학교와 작은 공동체에 참여하여 교제하십시오. 그것이 은혜를 입는 길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예를 통해서 보면, 한번은 무너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자아가 무너졌듯이,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 존재인가를 깨닫고,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한번은 무너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심하게 책망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충격요법입니다. 이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베드로 자신 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 황?!--"<-->
(이덕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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