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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억누를 수 없는 예배에 대한 갈망 (요 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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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누를 수 없는
예배에 대한 갈망

요한복음 4장 20-24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지난 주간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진짜 부흥회를 경험한 것 같습니다. 아마 부흥회에 참석한 분들은 다 똑같은 은혜를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100년 전 1907년 1월 2일부터 있었던 평양 대부흥 같았습니다. 진짜 부흥회 같았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 중 하나가 사람들이 모이는 역사가 놀라왔습니다. 둘째 날 저녁 집회 후에 안수 기도가 있었는데, 밤 11시 30분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거의 모든 성도들이 안수기도를 받은 것 같았는데, 그렇게 늦은 시간에도 꼭 안수기도를 받고 가겠다는 마음이 부흥의 증거입니다. 저녁 집회가 늦게 끝나 ‘내일 새벽 집회는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기도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의 역사도 그러했습니다. 1월 2일부터 성경 공부 모임인 사경회(査經會)가 열렸는데, 초반에는 그렇게 열기가 높지 않았으나 14일 밤부터 교인들이 잇달아 자신의 허물을 눈물로 고백하고 나서면서 회개의 물결이 이튿 날까지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올해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부흥을 부으시는 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 일에 대해서 전심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므로 반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부흥이 임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집니다. 모이는 역사가 일어나고, 말씀을 뜨겁게 사모하게 됩니다. 예배에 대한 열망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이번 부흥회 때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점점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면서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편이 여섯이나 있었던 수가 성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예수님께 예배에 대하여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0절)
좀 엉뚱한 질문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가만히 보면 좀 종잡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우물 물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그 다음에는 남편에 대하여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예배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주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인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인격적인 주님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예배와 예수님을 만난 후의 예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바로 그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전에도 제사를 드리는 일이 계속 있었지만, 예수님을 아는 눈이 뜨이면서 ‘어떤 제사가 진짜 제사일까? 어떤 제사를 하나님께서 정말 받으시는 것일까? 그런 제사를 내가 드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이 여인에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예배에 대한 변화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나타나기를 원하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는 결코 지겨운 것이 아닙니다. 따분한 것도 아니고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되는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예배는 그 자체가 감격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애인이 생긴 한 청년이 애인을 만나러 갈 때의 그 심정, 예배가 꼭 그와 같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러 오실 때 정말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바로 그 예배의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답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예배가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누구나 예배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성령충만했던 초대 교회의 특징 중 하나가 날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고, 집에 와서도 떡을 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6)

  제가 부목사이었을 때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교구를 맡았었는데, 어느 주일에 구파발에서 압구정동까지 스카프를 하고 맨발로 온 부인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가지 못하게 머리를 자르고 신발을 감추고 대문을 잠근 남편 몰래 담을 넘어 온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열망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어떤 성도에게 예배드리는 열망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동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가는 청년의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광야에서 삼촌 집으로 가는 도중에 돌 베게를 하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합니다. 그 때 야곱이 가장 먼저 한 것이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이적으로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후 가장 먼저 한 말이 평생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왕하 5:17)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는 지 안 만났는 지는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압니다.

한 달에 한번 예배드리러 나오던 사람이 매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면 그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일만 나오던 사람이 수요예배, 철야 기도회에 나온다면, 새벽 기도회에 나오고 그것도 매일 나오게 되었다면, 또 그럴 마음이 생긴다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이 식어진다면, 힘들어진다면 그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끊어진 것입니다. 전에는 새벽 기도회까지 나왔는데 요즘에는 거의 나오지 못한다고 하면 몸이 피곤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피곤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새벽 기도회는 내게 불가능한 일과도 같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영적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예배는 의식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항상 만나고 교제하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이것이 예배입니다. 천국에서는 영원히 예배만 드린다는 말에 부담스러워하는 교인을 보았는데, 그 말은 하나님과 항상 대면하여 지낸다는 표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삶은 그 자체가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참 예배는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의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셨지만, 하나님과 진정으로 만나는 예배는 예수님이 오시고서야 회복이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면 누구나 언제나 영적인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23절)
율법에 의하여 드려지는 제사는 불완전한 예배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 때, 하나님과의 만남 보다는 어디서 제사를 드리느냐? 예루살렘이냐, 그리심 산이냐. 장소와 방법의 문제로 싸웠습니다. 서로 열심히 제사를 드렸지만 정작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과는 너무나 먼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고도 살아있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복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적인 예배만 드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구약 시대 때 제사장이 제사 드리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경했듯이 지금도 구경하는 예배만 드리는 것입니다. 그저 예배는 성도의 의무로 여깁니다. 그저 목사의 설교나 성가대 찬양을 들으며 은혜 받는 시간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대단히 형식적인 예배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예배 시간을 지키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늦게 들어오다가 목사와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입니다. 미안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 모습조차 보고 계신 하나님에 대하여는 별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예배 시간에 또 늦는 것입니다. 예배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약속의 시간임을 안다면, 예배 시간을 미리 미리 준비할 것입니다. 옷도 헌금도 달라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예배 시간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독창이고 기도는 대표 기도이고, 설교는 주님의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여러분은 예배를 드리면서 목사를 보거나 성가대를 볼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보셔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나고 놀라운 복입니다.

  중국에 살던 한 선교사가 1907년 한국을 다녀가던 중 놀라운 대 부흥 운동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국 교회에 일어났던 엄청난 부흥을 보았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그 선교사님이 중국에 돌아가서 중국 선교사들과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부흥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중국 교인들에게 상당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예배 때, 한국에서 본 부흥에 대하여 설교하다가 너무 오래 설교 했다는 느낌이 들어 즉시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죽음과 같은 정적이 그 현장을 압도하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약 6,7분이 흐른 뒤 회중 가운데 어느 분이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회개의 역사가 터졌습니다. 죄를 고백하고 나쁜 성질, 다툼, 그리고 그 유사한 죄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성령님께서 불로써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후 4일간의 사경회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중국 교회가 부흥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 정각에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그 선교사님이 그 때까지 목도한 가장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 기도회는 1908년 만주 지역에 시작된 부흥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임을 깨닫게 되면 예배 자체가 불이 됩니다.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복도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예배에 대하여 도전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를 드릴 때 실제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아닌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냥 예배 시간에 앉아있는 것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일으키시는 사마리아 여인이 경험했던 바로 그 갈망을 놓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부흥회가 왜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는가 하면 강사인 박보영 목사님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간증이 너무나 강력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간증을 더 듣고 싶었고, 그리고 자신도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부흥회 때, 안수기도 받으러 나온 이들 중에 “저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하고 기도 요청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기도 제목은 전혀 없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 받으러 나온 것 자체가 성령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대학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실연을 당한 것도 아니고, 큰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중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웁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소원이 울 정도라면 성령님께서 너무나 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본인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제 밤 늦게까지 말씀 준비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에 다니는 저의 딸 하영이가 와서 눈물로 고백하였습니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모두 다 큰 은혜를 받았는데, 자신에게는 예배의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안타깝다고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으로부터 너무나 기뻤습니다. 예배의 감격이 없다고 통곡하는 그 자체가 예배의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생 다닐 때 부흥회 참석했다가 은혜 받지 못했다고 예배의 감격이 없다고 그렇게 울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영이 안에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시는지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예배의 감격이 없어도 무덤덤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예배를 위하여 우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려분, 진정한 예배에 대한 갈망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은혜받고 있는 성도도 더 큰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연초부터 한국 교회는 열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올해가 1907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인구의 1%도 되지 않은 7만 명이었지만, 교인들의 영적 각성으로부터 시작된 평양 대부흥은 한국 교회가 선교를 받는 교회에서 영적으로 독립된 교회로 서고 다시 선교하는 교회로 서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금주, 금연, 도박 추방, 물산 장려운동으로 이어지고 한글 성경 보급으로 문맹 퇴치에도 기여하며 일제 식민지 시절을 버텨낼 수 있는 민족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 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한국 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기도하여 왔습니다. 하나의 갈망이었습니다. 2007년! 100주년이 되는 해가 되었습니다. 1월 7일부터 14일에는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 경기장에서 초교파적인ꡐ부흥을 넘어 변화로-평양부흥 100주년 기념 집회ꡑ가 열리고 이어 14일, 15일에는 같은 장소에서ꡐ역사를 이루는 기도ꡑ를 주제로ꡐ한국 부흥 100주년 기념 리바이벌 2007ꡑ행사가 열립니다. 특히ꡐ리바이벌 2007ꡑ은 그동안 다시 1907년의 부흥을 주시기를 갈망하던 모든 기도 모임이 대 연합을 이루어 14일 오후 5시부터 15일 오후 9시까지 금식을 하며 기도를 계속하는 행사로 연 인원 약 5만 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집회입니다. 개신교 진보파와 보수파가 어우러지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할 것입니다. 기도를 모아야 합니다. 부흥을 구해야 합니다.

  1907년 6월에 평양의 스왈른 선교사는 어떻게 그들이 한국에서 더 큰 역사를 목도하게 되었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ꡒ나는 개인적으로 1906년 중반까지 우리가 목도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한국에서 목도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의 결과를 중국에서의 결과들과 비교할 때 우리의 선교 결실들이 이들 나라들에서의 어떤 것보다 훨씬 능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의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이 1905-6년에 일어나 2년 동안 8,200명의 회심자가 세례를 받게 된 인도 카시아 지방(Kassia Hills)의 부흥 운동을 들려주었을 때 새롭게 우리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평양 집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 평양에는 감리교, 장로교 선교회 소속 2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사람들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평양에서보다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더 큰 은혜가 임할 때까지 정오에 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약 한달 간 기도한 후 한 형제가ꡐ우리가 약 1달을 기도해왔으나 아무것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느냐ꡑ며 기도회를 중단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ꡐ우리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느 때처럼 우리 사역을 계속합시다. 그러고 각자가 편리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합시다.ꡑ 그 제의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선교사들은 주님께서는 인도 카시아 지방에 허락하신 그 축복을 평양에도 내려주시기를 거부하시지 않을 것임을 믿고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일어나기 전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미 부어주신 부흥이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동안에 은혜를 많이 받으셨던 분들도 결코 여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도, 우리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교회에 부으려고 하시는 부흥은 엄청난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예수님 한 분을 원합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담대한 고백을 하고 세상을 이기게 해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2007년 축복의 해에 여러분이 은혜의 구경꾼이 되지 말고 그 은혜의 중심에 서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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