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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믿음의 간증 (히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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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잘 하다가, 마지막에 부끄러운 퇴장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처음에는 고전하다가, 마지막엔 빛나는 승리로 장식하는 이들이 있다. 야곱은 후자에 속한다.

야곱은 허물 많은 사람이다.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다투었다.

  태어날 때도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쥐고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사람으로, 자기에게 이득이 된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팥죽 한 그릇으로, 배고픈 형 에서를 유혹해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고, 눈먼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에서 대신에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부자가 되겠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밤낮 없이 일했던 사람이다. 지극히 육신적인 사람이다. 이처럼 허물 많고, 부족한 야곱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오늘 본문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따라 살다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위골되었다.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야곱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말했다(창32:27).

  야곱은 자기가 야곱인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항상 야곱임을 부정하며 살았다. 손으로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음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야곱은 자기가 싫고, 에서가 되고 싶었다. 둘째가 싫었다. 나는 왜 장남이 아닌지 고뇌하며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자, 자기를 똑바로 보았다.

  자기 자신의 연약한 모습에 눈을 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다.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만났기에, 이렇게 아름답게 삶을 마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빛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보게 된다.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볼 줄 알아야 변화되고, 성숙해 진다. 참회록은 자신을 본 사람이 쓰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가면을 벗고 자신을 보게 된다. 없어도 있는 척, 약해도 강한 척하는 자신의 삶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참회록은, 죄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쓰게 된다.

  야곱에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나이가 들수록 믿음이 더욱 더 깊어졌다. 젊어서보다는 늙어서, 늙어서보다는 임종할 때, 더욱 더 깊어졌다. 우리의 신앙도, 이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는 야곱에게서, 어떤 믿음을 배울 수 있는가?

1. 믿음으로 죽자.

믿음으로 죽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죽음이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죽어야만, 행복한 죽음이 될 수 있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을 개판으로 살다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믿음으로 죽기는 불가능하다. 믿음으로 죽기 원하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살기 쉽지 않지만, 믿음으로 죽기는 더욱 어렵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래서 요즘 ‘웰빙’(well-being)이란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웰빙은 Well(좋은, 건강한, 만족스러운) + Being(삶)으로, 사전에는 “복지, 안녕, 행복, 번영”을 뜻하지만, 웰빙을 설명하면,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잘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뜻이다. (눅16:19) 이하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살았다. 잘 먹고 살게 되어 너무나 행복하게 여겨졌다. 웰빙의 삶을 살았는데, 성경을 보면 이 부자는 죽어, 음부의 고통가운데, 몸부림쳤다. 그는 웰다잉(well-dying)하지 못했다.

  잘먹고 잘 사는 게, 죄는 아니다. 성도들도 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죽음을 올바로 맞지 못했다. 죽음 후에 또 다른 삶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몸에 종기가 나서, 몸이 다 헐었다. 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나사로는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품은 낙원을 말하는데, 낙원에서 위로를 받았다. 인생이 역전되었다.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이 세상에서의 삶은, 기껏해야 100년이다. 36,500일 밖에 되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의 결과를 예측하면서, 행동하는 사람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미래의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눅16:1-) 이하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데,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다가, 쫓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쫓겨난 다음을 생각해서, 주인에게 빗진 자의 빚을 다 탕감해 준다. 자기 돈도 아닌데, 막 탕감해 준다. 남의 돈으로 인심을 썼다. 그래서 그는 분명히 잘못된 청지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결과를 염두에 두고 행동했기에,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준비하지 못한 자를, “어리석은 자”(눅12:16)다. 그러면 어떤 삶이 영혼을 위한 삶인가? 호화로운 무덤과, 화려한 장례 행렬을 준비해야 하는가? 아니다.

  부자는 좋은 무덤에 묻혔지만, 음부에서 고통 당했다. 이집트에 가면, 거대한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 인도에 가면 타지마할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웰다잉이 아니다. 아무리 화려한 죽음을 맞이했어도,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당한다면, 웰다잉이라고 볼 수 없다.

  부자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다른 준비가 다 되어 있어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했다.

  반면 거지처럼 불쌍한 인생을 살았어도,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면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이기 때문이다. 야곱은 나그네와 같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고난을 통해서, 계속 성화 되어 나갔다. 그의 믿음은, 더욱더 깊어졌다.

  두 아들 시므온과 베냐민이, 애굽에 볼모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에, 야곱은 (창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고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야곱은 고난을 겪을 때마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성화의 길을 걸어갔다. 그 결과 점점 믿음이 깊어졌다. 그래서 노년에, 깊은 신앙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이 텅 비는 고목이 되지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의 고목이 아니라, 신앙의 거목이 되어야 한다. 냄비처럼 쉽게 뜨겁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믿음이 아니라, 뚝배기처럼 뜨거움이 계속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게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이적을 베푸셔서, 병을 낫게 해주셨다.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렇게 간증했다.

  “내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이, 너무나도 놀랍고 고맙다.” 그러더니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요즘은 의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모릅니다. 옛날 같으면 저는 벌써 죽었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이렇게 바뀌었다.

  “다 좋지만,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강해야 한다. 음식도 가려서 먹고, 운동도 꾸준히 해야 한다. 내가 살 수 있다는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하나님이 쑥 빠져버렸다. 이와 같은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믿음은 점점 더 깊어져야 한다. 야곱처럼 믿음을 따라서 살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믿음을 따라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하고,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2. 믿음으로 축복했다.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야곱은 나이 들고 병들어, 죽음이 가까웠다. 요셉은 그 사실을 알고서, 자기의 두 아들을 야곱에게 데리고 갔다. 야곱은 그들을 보고서,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았다.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다.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행위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축복의 통로요, 축복의 샘물로 쓰신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서 물려받은 하나님의 축복들을, 믿음으로 후손에게 쏟아 부어 주었다.

  야곱은 자기가 축복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믿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축복의 통로요, 축복의 샘물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포하는 축복 그대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1858년 뉴욕의 어느 가정에,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다리가 너무 가늘었다.

  그래서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시력도 나빴다. 천식이 있어서, 앞에 놓여 있는 촛불을 불어서 끌 기력도 없는 쇠약한 몸인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항상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가진 장애로 인해서 괴로워하지 말아라.

  네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그래서 장애 때문에 오히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주목하는,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축복 속에 자랐다. 그는 열심히 운동을 해서, 체력을 단련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보다도, 더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주의원에 당선이 되었다. 그 뒤 그는 여러 요직을 거쳐서 부통령이 되고, 43세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바로 미국의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이다.

  대통령 시절, 파나마 운하 건설을 추진했으며, 1906년에는 러․일 전쟁을 종식시킨 공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가 믿음으로 그를 축복한 대로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우리도 믿음으로 입을 열어, 마음껏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축복하자. 사랑하는 가족들을 축복하자. 이웃들도 축복하자. 우리가 선포하는 대로, 하나님은 그대로 역사 하신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자기의 오른손을 요셉의 둘째아들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얹었고, 왼손을 요셉의 큰아들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었다. 요셉은 너무 놀라 아버지의 손을 바꾸려 할 때,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창48:19)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고 하였다.

  요셉은 야곱이 지극히 사랑했던,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했던, 라헬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을 사랑해서, 어릴 때 채색 옷을 지어 입혀서, 형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기를 받았다. 더군다나 지금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요셉 덕분에 온 가족이 극심한 흉년을 피하고 있다.

  그러니 웬만하면, 요셉의 청을 들어주었을 텐데, 요셉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람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믿음이었다.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데 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삶이었다. 주님께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를 보면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개인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성취한 모든 것들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서 행한 일만이, 마지막 심판대 앞에 남을 영원한 사건이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나의 뜻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란다.

3. 하나님께 경배했다.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본문의 배경이 (창47:27-31)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은 자기가 죽거든,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장사하여 달라고 유언한다.

  야곱은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애굽 땅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가나안 땅에 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야곱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신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야곱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에 가서 살아야 한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가슴 속 깊이 간직했다. 그는 일시적으로 애굽에 이민을 왔지만, 그의 생각과 애정은 언제나, 시온 땅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만 있지, 확실한 증거는 오히려 애굽에 있었다. 잘 나가는 아들 요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

  또 야곱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창47:31)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에서 경배하니라”고 하였다. 그는 임종시에 힘이 없었지만,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며, 최후를 마쳤다. 그는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며, 최후를 마쳤다.

  야곱은 예배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부족과 허물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경배를 드렸다.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중히 여겼다. 야곱은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한창 치열할 때였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바쁜 와중에서도, 주일이 되면 한 번도 빠짐없이 꼭 교회에 나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친 뒤에 사회자가 뜻밖에도, 이런 소식을 전했다.

  “여러분, 앞으로 당분간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중단하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지금 전쟁이 매우 치열해, 사상자가 많이 생기고 있다. 그래서 교회 건물을 개조해서, 당분간 병원으로 만들어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기로 했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집에서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주시기 바란다”

  그 소리를 들은 링컨 대통령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 된다. 이는 틀린 생각이다. 물론 전쟁이 치열하고,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그렇다고 어떻게 교회를 바꾸어서, 병원으로 사용할 수가 있고,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중단할 수가 있는가?

  우리는 나라가 어려울수록, 더욱더 하나님께 간절히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링컨 대통령의 믿음이었기에, 교회를 병원으로 개조해서 봉사하겠다는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회에서 계속해서 예배를 드림으로, 결국 북군의 승리로 끝날 수가 있었다.

  교회의 사명 가운데 제일 중요한 사명은, 봉사하고, 구제하고, 교육하고, 선교하고 전도하는 일이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나? 왜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왜 이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셨나? 우리의 예배를 받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떻게 일생을 마치려고 계획하시나요?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저는 죽기 원한다. 야곱의 마지막은 매우 아름답다. 그의 젊은 날에는, 아름답지 못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이고 빼앗으며 살았다.

  그러나 인생의 석양이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역사 하심 속에, 아름다운 인격으로 다듬어져 갔다. 일생을 예배로 마쳤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자. 자녀들을 믿음으로 축복하면서, 예배하는 삶을 살다가 가자.

  야곱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말자. 야곱처럼 우리도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다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겨서, 영생 복락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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