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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남편을 불러오라 (요 4: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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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3-18)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고, 생명력 있는 믿음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은 오직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성령을 구해야 할까요? 우리가 성령의 충만, 혹은 성령의 임하심을 그토록 간절하게 구하여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가 성령을 구해야 할 필요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첫째로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영적인 군사로 무장될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로 이 같은 성령의 충만함,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경험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능력을 입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난 해 사경회 때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 곧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린 후, 성령을 구하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들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진리들입니까? 하나님의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십자가의 대속, 영생, 천국, 지옥, 종말, 심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이런 것들을 믿고 있고, 또 그것들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신을 못할 때가 있더라도 적어도 거짓말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믿음이 항상 동일한 것만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알게 된 지식”과 “경험한 지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신앙의 체험이 없어도 반복되는 설교를 들으며, 그 가르침을 받고, 기독교적인 분위기 속에 젖어서 그 같은 지식으로 나아가는 일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습관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이런 지식들을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지식은 말씀을 통해서 오게 됩니다. 다만 단순히 지적으로 들리던 말씀이 성령의 경험을 통해서 보다 풍부하고 생생한 지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 “경험하게 된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던 때의 일입니다. 고등학생인 그들 중에는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해 온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졌거나 혹은 주일학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닌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중 한 형제로부터 충격적인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지 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착실하게 잘 나옵니다. 물론 그들이 회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착실한 교회 생활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적 경험의 결핍에 관한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앞에서 말씀드린 그 형제의 고백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해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식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 지식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로소 경험하는 영적인 체험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바로 “믿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좀 더 생생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7세기 영국 옥스퍼드 맥달린 대학의 총장이며, 유명한 설교가였던 토마스 굳윈(T. Goodwin) 목사님은 성령의 체험을 통한 하나님을 경험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의 어린 아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곁에 계시며, 자기가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불확실함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시각에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려서는 전에 없이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 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듬뿍 쏟아 표현하고는 그 아들을 다시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어떤 변동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아들은 이전에도 그분이 자기 아버지인 줄 알았고, 또 그가 자기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스러운 포옹과 뜻밖의 입맞춤을 통해서 아버지의 존재와 그의 사랑에 대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존재와 사랑에 대한 더 깊은 지식에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만이 신앙의 전부라고 할 수 없을런지 모르나,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체험과 지식을 얻는 중요한 길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18세기 미국 대각성 운동과 부흥운동의 선구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 목사님은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깊이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세례 줌에 있어서까지 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지성주의적이고, 이지주의적인 메마른 신앙에 대한 절실한 충고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수가 성 우물가에 서 있었던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속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유대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의 일을 적고 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편 땅을 기준으로 세 지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맨 위쪽으로는 갈릴리 호수를 끼고 있는 갈릴리 지방이었고, 맨 아래쪽으로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지방이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있는 지역이 사마리아 지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통혼은 물론 상거래까지도 꺼렸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처럼 동족에게 따돌림을 받게 된 데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지역은 원래 분열 왕국시대에 북 이스라엘 왕국 땅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왕국 이스라엘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 약 130년쯤인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동족을 대적해 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 지역 사람들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게 된 데에는 좀 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앗수르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실시한 정책이 소위 사민정책과 잡혼을 통한 혈통의 국제화였습니다. 사민정책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외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한편으로 외국 사람들을 이 땅에 이민 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잡혼정책은 국제결혼을 강요함으로써 유대민족의 동질성을 파괴하려는 민족성 말살(抹殺) 정책이었습니다. 결국 사마리아 지방은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살아가는 “혼혈인들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가고자 할 때는 이 지방을 지나지 않기 위해 차라리 요단강을 건너서 동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땅으로 여겨지던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피곤해서 우물곁에 앉으셨을 때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죄인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영생(永生)과 성령(聖靈)에 대해 값진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II. 목 마르지 않는 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자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이 여인은 물을 긷기 위해 우물가로 왔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물을 길어야 하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물동이를 이는 일은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어서 물을 길어서 집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이 우물 앞에서 두레박을 내리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육신의 목마름을 모면하기 위해 물을 길으러 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 속에서 목말라 하는 그녀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이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내게 마실 물을 줄 수 있느냐?”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무엇보다도 헐벗고 굶주린 우리들의 영혼,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우리들 자신도 관심을 기울이지 아니하는 그 영혼의 목마름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물을 좀 달라”는 요청을 시작으로 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등을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의 갈망”을 종종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 하나님에 대한 갈망, 곧 목마름은 오직 생수로만 해갈(解渴)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생수”란 “흐르는 물”로서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갈망(渴望)을 해갈시켜주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물을 가지고 영생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는 명백한 설명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계 21:6-7).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영생에 대해서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의 여러 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물을 통해 영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을 보십시오. 자기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영생을 주는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도 계속해서 육신의 마른 목을 축여 줄 한 모금의 물만 생각하면서 질문하고 대꾸를 합니다. 이것을 통해 보여 주고자 하는 성경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무지(無知)입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가르쳐 주tu도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에게로 옮겨지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육신에 매달려 있습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두 세 번 설명하시는데도 그저 육신의 해갈을 위한 한 모금의 물을 구하려고 예수님 앞에 마주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무지하고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여인의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읽습니다. 그 답답하고 어리석은 여인 앞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깨우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읽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약 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십 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려고 결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금식하는 기간 중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먹는 생각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노릇노릇하게 튀긴 튀김 위에 설탕 소스를 얹은 탕수육을 먹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금식을 시작한 지 이 삼일 쯤 지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저는 거리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금식을 깨고 중국집에서 탕수육을 시켜 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이 달던지······. 그리고 배부른 다음에는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던지·······. 비록 목표한 금식은 다 못했지만 굶주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그것이 깊으면 깊을수록 음식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굶주리면서도 배고픔을 전혀 못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고픔을 느껴도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육신의 병이 깊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깊이 병든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해 가는 굶주림 속에서도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목마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비록 심령 가득히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모하는 목마름이 남아 있는 한 여러분의 영혼은 아직 빈사 상태가 아닙니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영혼의 목마름조차 느끼지 못하는 성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토록 반복해서 “하나님의 선물”, “목마르지 않는 생수”,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오히려 “성령”,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도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 목마른 자에게 성령주심에 대한 우리의 형편을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듭해서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도 공동체를 위협해 오는 악령의 세력들이 역사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도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지 못하는 우리의 메마른 신앙을 들여다보면서도 하나님의 성령 주심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얼마나 유사합니까?
오! 하나님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성령 주심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 느끼게 하옵소서. 여인이 이토록 깨닫지 못하는 답답한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설명하십니다. 성령주심에 대해 갈망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목마르지 않는 물, 곧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성령의 샘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것은 예수께서 영적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치심으로 영적인 필요를 느끼게 해 주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처가 너무 심해 생명의 기력까지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라도 예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고치시는 사랑의 치료자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침체(沈滯)가 너무나 오래도록 계속되어 목마름조차 잃어버린 형제, 자매들은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와 같은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손길을 구해야할 것입니다.

III.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드디어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말합니다.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4:15) 이것은 놀라운 영적인 전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수를 네게 주었으니라”(4:10) 하실 때, “당신은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물은 깊습니다.”로 대꾸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하면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예수님께 구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4:16) 하나님의 영생,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생수, 예수님께서 주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 등으로 영생과 성령을 말씀하실 때까지는 이 대화의 주제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이 한 마디의 말씀을 던지심으로 주제가 갑자기 하나님에서 사마리아인인 이 여자에게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무슨 뜻일까요? 이 여인은 남편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 것인 이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기에 있어서, 먼저 해결해야할 문제에 직면하게 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성령을 받는 복스러운 경험에 앞서서 선결되어야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죄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여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 여인의 말 속에는 단순히 남편이 없다는 진술 이상의 느낌이 풍겨납니다. 자기 남편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으며 더 이상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여인의 짧은 대답 속에 담긴 하소연은 이런 것입니다. “왜 좋은 선물,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기분 나쁘게 남편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그 문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까 하시던 성령 이야기나 계속하십시다.”

이 당시 사마리아 지방은 성적으로 문란한 지역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방인을 상대로 몸을 파는 여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는 이 여인이 창녀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살았던 남성 편력을 지닌 과거 있는 여자였습니다. 지난 시절 자기의 몸을 떠난 다섯 명의 사내들 중에는 망부가 되어 땅에 묻힌 남자도 있었을 테지만 그 중에 어떤 남자들은 살다가 헤어져 다른 데로 장가든 남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이런 남성 편력의 과정 속에서 새로 맞아들인 남성들 중에는 이 여인과 향락을 위해서 본 부인과 헤어졌던 사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구약은 이러한 남녀를 간음의 죄를 범한 죄인들로 규정합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살았던 그러나 지금 함께 몸을 섞으며 살고 있는 남자와의 생활도 결혼을 통하지 않는 불륜의 동거 관계였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성령의 선물을 말씀하실 때까지만 해도 이 여인은 호기심 많고 기대에 들뜬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예리하게 던진 예수님의 한 마디 이 말씀은 그녀로 하여금 의식 없이 지내오던 자신의 가장 뿌리 깊은 죄악의 치부에 마주 서게 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삶,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영적 생활을 갈망하는 우리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할 진리인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성령 받음에 있어서 개인의 죄가 심각한 장애가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기에 앞서 이와 같은 죄의 지적을 통해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지적된 죄에 대한 회개, 하나님의 죄사함, 성령을 주심. 이것이 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방식에 대한 사도행전의 설명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은 이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가련한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당신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는 채 육신의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기르러 왔던 이 죄 많은 여인에게 예수님이 먼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영생,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 여인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열망은 이 여인이 영생과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 다섯 번이나 면사포를 써야했던 이 기구한 여인의 불행한 과거를 예수님께서는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남의 남자와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하는 대신에 그 자신의 죄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그녀를 절망에 떨어뜨리고자하심이 아니었습니다. 정죄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뉘우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회개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 그분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의 영이시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이 여인이 “성령 하나님”을 충만하게 받는 감격이 있기에 앞서,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죄 문제에 직면해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무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바램이십니다.

이 시간도 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절망적으로 무지한 우리를 깨우쳐 성령을 받아야할 절박한 필요를 느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들을 이처럼 매정하게 죄 문제에 직면하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성령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교제로 들어가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죄의 지적 앞에서 괴로워하기보다는 그 뒤에 약속된 죄 사함과 성령 주심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IV. 100년 전의 평양 대부흥

1907년 1월 2일, 오랫동안 기도하며 기다리던 한 사경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평양 장대현 교회의 사경회입니다. 선교사들은 이 집회를 위해서 4개월간이나 매일 2시간 이상씩 기도했습니다.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열린 평안남도 사경회의 첫 날, 평양시내 사람들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많은 신자가 회집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열렬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더불어 1월 6일부터 시작된 저녁집회에는 평양시내 사람들의 참석도 허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모여든 온 교인들은 이 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매일 저녁 약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저녁집회의 열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집회 마지막 이틀간에 놀라운 영적대각성운동이 폭발하게 됩니다. 1월 14일, 15일 그 이틀 동안에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역사라고 평가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첫 영적대각성이 나타난 것은 14일 저녁집회 때였습니다. 그전 12일 토요일 저녁집회 날, 블레어 선교사는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가지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미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를 설교하면서,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냥을 하다 한 손가락 끝이 총에 맞아 상처가 났을 때 전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간증했습니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몇몇 남자들이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형제를 미워한 죄를 고백하면서 영적인 분위기가 뜨겁게 조성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13일은 주일날로, 오전에는 각 교회에 흩어져 예배를 드리고 저녁에 전도 집회가 열렸는데 이 때 분위기는 한 마디로 냉랭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으나 마치 천장이 놋뚜껑으로 덮인 듯 기도가 상달되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역사를 두고 선교사들은 마치 사단이 회중을 압도하는 것과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다음날 14일인 월요일, 선교사들은 정오 기도회를 가지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대로 사경회가 끝난다면 그들이 그토록 사모했던 영적 부흥운동을 경험하지 못하고 끝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날 저녁 집회 설교가 끝난 후,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이 교회의 유력한 장로인 길선주 장로가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집회에 은혜를 베푸실 수가 없었습니다. 약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내게 부탁했습니다. ‘길 장로, 내가 세상을 뜨거든 내 집 살림을 돌보아주오. 아내가 너무나 세상을 모르니 당신만 믿겠소’ 나는 잘 돌보아 줄 테니 염려 말라고 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면서 미화 100불의 해당하는 돈을 사취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길 장로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길 장로의 회개가 있은 후 그렇게 장벽과 같았던 막힌 담이 별안간 무너져 내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집회 장소에 충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어 그 곳에 모인 이들은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집회를 인도하던 이길함 선교사는 그 곳에 참석한 이들에게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돌아가라고 말하고 남은 자들과 더불어 기도에 집중하기를 원했습니다. 1500명 중에서 그 자리에 남은 사람은 600명가량이었습니다. 600명이 밤이 맟도록 간절히 기도했고, 그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애끓는 회개가 예배당 전체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저녁 7시에 시작된 예배가 다음날 새벽 2시가 되어도 끝나질 않았습니다. 울부짖는 통곡소리와 함께 엄청난 회개의 물결이 장대현 교회에 모인 모든 성도들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회개하면 할수록 그들은 자기들의 지은 모든 죄가 더욱 가슴을 찢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회개의 역사가 불길처럼 일어나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교인들은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기의 죄를 형제들에게 고백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이 바로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사 속에서도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성령의 불길이 평양을 휩쓸기 시작하던 그날” 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경회 때에도 이 같은 성령의 큰 권능이 이 척박한 땅에 재현되어서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고, 조국 교회가 다시 사는 날을 고대합니다. 그토록 오랜 기도 가운데 모인 집회였지만, 숨겨진 죄가 있는 동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방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자백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갈망은 시대마다 달랐습니다. 그리고 성령 주심에 대한 평가도 역사마다 한결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교회를 삼키려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항상 우리들에게 성령주심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죄인들에게 영이신 당신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도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에 의해서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성령은 다양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방법은 항상 회개를 통해서입니다.

Ⅴ. 결론

이 여인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 앞에 직면함으로써 성령을 선물로 받는 축복의 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구하고자 하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예수님의 나직한 음성 앞에서 여러분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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