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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이 사라질 때 (사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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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죽었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닙니다. 특히 웃시야 왕의 죽음이 더 슬픈 소식인 이유는 솔로몬 왕 이후에 유다 왕국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6세부터 52년간 유다를 통치한 최장수 군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리더였고, 탁월한 행정가였으며, 정치와 경제 모든 면에서 유다왕국을 훌륭히 이끌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웃시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스타였고 살아있는 소망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인생 말년에는 교만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제사장의 직무를 대신하다가 문둥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문둥병에 걸려서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유다 백성들의 스타요, 소망이었습니다.

제 친척 중에 중풍으로 쓰러지신 분이 계셨는데 쓰러지신 후에도 10년 정도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후에 그 분의 부인이 하시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있어도 남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너무 다르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유다 백성들이 느꼈던 슬픈 감정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큰 별이 떨어지고, 소망이 사라지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 유다 백성들에게 걱정스러운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에 있는 거대한 나라 앗수르가 이방 나라들을 하나 둘 점령해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쪽에는 앗수르보다 더 크고 힘센 바벨론이 서서히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위기상황이 닥쳐온 것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유다라고 하는 작은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위기에서 그나마 의지할만한 국왕 웃시야도 죽고, 경험도 없고 미숙한 그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었으니 유다 백성들의 마음속에서는 점점 소망의 등불이 꺼져갔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점차 클로즈업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처럼 소망이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내게 소망이 있나?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우리 마음속에 떠오를 때에, 우리는 동일한 위기 가운데서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된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가 본 세 가지 비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참으로 어떤 분이신가?(Vision of God). 둘째, 자기 자신이 진실로 어떤 존재인가?(Vision of Self). 셋째,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Vision of Mission). 이 세 가지 비전이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비전 [Vision of God]

이사야는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새롭게 본 것입니다. 비록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통치하고, 인도하시며,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책을 저술한 신학자 필립스(J. B. Philips)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현대에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천문학이나 심리학이 매우 발달해서 인간이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현상세계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졌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이와 같이 복잡하고 거대한 우주의 배후에 어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결코 작거나 무능하거나 연약한 신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너무 작고 무능한 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 작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칠 수 있으실까?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실까? 아마 못하실거야.”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너무 작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충할 수 있는 다른 존재를 찾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소망이 끊기고 위기가 찾아온 순간에도 웃시야 왕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위대한 분이신지를 다시 바라보십시오.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 본 하나님은 여섯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8절).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라”(9절).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를 설립한 프란시스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도 살아계시며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의 모든 문제에 대해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문제라도 아침부터 붙들고 하루 종일 기도하기만 한다면 저녁이 지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안고 사는 이유는 단 하루도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권위 있는 분입니다. 말씀에 아무런 권위와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엄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 도전해서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최고의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높이 들린 보좌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넷째로 하나님은 영광이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1절b).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은 웨딩드레스가 온 예식장을 덮고도 남았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이 그런 드레스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옷자락,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성전을 가득 덮고도 남을 만큼 위대한 영광입니다. 그 영광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천사들도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보좌에 계신 우리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들은 이 영광을 받아서 날마다 영광스러운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여러 천사 가운데 호위하는 천사를 그룹(체루빔)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 천사들을 스랍(세라
핌)이라 부릅니다. 스랍 천사들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두 날개로는 얼굴을 덮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래에 있는 두 날개로는 발을 덮습니다. 감히 더러운 발을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 하늘을 날며 하나님을 창화합니다. 창화한다는 말은 서로 찬양을 주고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찬양할 때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집에 연기가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때는 터가 요동하도록 찬양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성가대 지휘자들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찬송만큼은 영혼이 번쩍 깨어나도록 크고 힘찬 찬송으로 합창해 달라고 요청하곤 합니다. 찬양할 때마다 큰 음성으로 터가 요동하도록 찬양하는 강남중앙침례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을 창화할 때에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노래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졌다’는 의미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분리되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은 ‘피조물과 분리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동방종교들은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해탈을 해서 보살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섬길 받을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겠다는 노력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침해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으로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다시 봄으로 소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인생사가 어려울지라도 소망을 다른 곳에 두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소망을 두거나 물질에 소망을 두면, 그 사람과 물질이 사라질 때 우리의 소망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없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오직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날마다 바라보며 소망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비전 [Vision of Self]

위대한 신학자 칼빈은 인간에게 두 가지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가 위기에 처한 이유가 웃시야 왕의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면한 후에는 유다의 위기가 자신의 속에 있는 죄악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이사야는 자신이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신만큼은 깨끗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자마자 자기가 얼마나 부정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입술의 부정함을 탄식하면서 내가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었으니 이제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죽이지 않으시고 스랍 천사 하나를 명하여 제단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스랍 천사는 제단 숯불을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제단에서 피는 불은 제물을 태워서 사람의 죄를 사하는 불입니다. 그러므로 이 불이 입술에 닿았다는 말은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고 해도 진실로 회개하며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고 거듭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제단 숯불이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에 닿자 죄악이 제하여졌습니다. 이사야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유다가 위기에 처한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변화가 오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고, 어둠이 빛으로 바뀝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면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죄와 부족을 고백하며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유명한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원래 1970년대 닉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수뇌부로서 자문역할을 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닉슨 대통령을 재선시키기 위해 반대당 후보들의 정보를 수집해서 루머를 퍼뜨렸던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찰스 콜슨을 ‘악의 천재’라고 불렀고,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그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들어가기 직전에 친구였던 탐 필립스라는 사람이 C. S. 루이스가 쓴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 책을 선물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나는 이 책을 읽고 삶이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네. 자네도 이 책을 읽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자신에게 책을 선물하는 탐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친구의 권면을 듣고 나와서 자동차 시동을 거는 찰스 콜슨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핸들을 붙들고 심히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워터게이트의 더러운 정치적 죄가 아니라 내 안에 깊이 숨어 있는 한 죄를 발견했습니다. 내 영혼은 몹시 고통스러웠고 나는 그 고통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그 크신 팔로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으며, 그 날 밤 예수 그리스도께 내 자신 전부를 드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내 인생의 위대한 실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친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순간부터 그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찰스 콜슨은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일곱 달 동안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도 죄수들의 발을 씻겨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자신의 변화된 모습으로 죄수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백악관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죄수들의 발을 씻고 빨래를 해주며 섬겨주니까 사람들이 쇼하는 거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일곱 달이 지나도록 찰스 콜슨의 섬기는 모습을 보던 다른 죄수들은 그것이 쇼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변화 받은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곱 달 후에 출소한 찰스 콜슨은 죄수들을 교화하고 교도소 문화를 개선하자는 취지로 ‘교도소 선교회’를 구성해서 꾸준하게 활동하였고, 20년 뒤인 1993년에는 템플턴상까지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책 중에 가장 유명한 책도 「Born again」(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자신의 인생이 절망에서 소망으로 바뀌었음을 고백한 책입니다.

비록 백안관에서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정치적 명성을 누렸지만 그가 쌓아놓은 명성은 교도소 안에서 모두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가족들까지도 그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마음이 변화되자 교도소는 학교로 변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은 소망 있는 인생, 닉슨 대통령보다 백배는 더 위대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므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내 마음의 죄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은혜를 받으면 우리에게도 새로운 소망이 생겨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새로운 사명에 대한 비전(Vision of Mission)

저는 28살 때, 공군 소위로 근무하던 중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까지의 저의 삶은 절망스러운 시절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데모하다가 끌려가서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사회의 부조리가 내 힘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대는 어차피 가야 하니까 공군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런 군대생활이라 재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술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때, 저와 같이 교육대대의 교관으로 근무하며 같이 하숙했던 친구는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가 저를 전도하고자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오히려 그 친구를 유혹해서 술집에서 술을 먹이고 주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절망의 시간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휴가를 간 사이에 제가 예수님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자 저의 절망이 소망으로,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고 그 분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싶어서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휴가를 갔던 친구는 제가 성경책을 읽다가 잠이 든 모습을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나서야 비로소 저의 삶에 광명이 비치고 제 인생의 사명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이 사명을 발견하고 나자 저의 모든 절망이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고 나서야 자신의 절망을 극복하였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에 마음이 변화된 이사야는 즉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시는 소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예언할지라도 백성들이 듣지 않고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사야가 낙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고통을 당한 후에 그루터기처럼 은혜를 따라 택하심을 입은 백성들이 남은 자로 세워지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사야가 전하는 말씀을 진실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당대의 인기는 설교자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는 증거하는 메시지가 하나님의 메시지인가, 영영토록 남을 수 있는 진리인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사야가 당시에는 인기없는 선지자였지만 그의 메시지는 책으로 기록되어 지금도 우리가 읽고 은혜받는 위대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쉽지 않은 사명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절망과 위기를 극복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 론

여러분! 세상 사람에게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사람에게 소망을 두면 그 사람이 죽을 때, 소망이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또 은행잔고에도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잔고가 비면 소망이 날아가지 않겠습니까? 건강과 권력에도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건강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모두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 것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 소망이 쉽사리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말씀을 수행해 가시는 하나님, 오직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비록 죄 많고 추한 존재라도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절망을 모두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이 소망을 갖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첫째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요, 둘째로 자기 자신의 죄악을 깨닫는 것이요, 셋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깨닫고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둘 때에 우리의 인생이 복되며 영원토록 빛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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