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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생 라합의 믿음 (히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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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의 요절은 히11:6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금보다 귀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우리로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것도 믿음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가 믿음의 위인들 사이에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믿음의 위인 중에 라합이라는 사람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고 믿음을 더욱 새롭게 하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입니다. 이 성경 안에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별과 같은 이름들 사이에 라합이라는 이름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여성이었다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히11:11절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이름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23절에는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나오는데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요게벳도 역시 여자입니다. 그리고 35절 이하에 보면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35절을 함께 읽도록 하시겠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라합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말은 주목할 가치가 없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라합을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입니다. 그 이름 앞에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기생 라합은’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을 기생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나, 유대의 랍비들은 기생이라고 하는 단어 ‘조나’를 ‘여관주인’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번역 성경에는 라합을 ‘포르네’ 즉 ‘창녀’라고 번역을 했는데 적절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조나’라고 하는 말은 ’간음하다, 매춘하다‘를 뜻하는 ‘자나’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많은 이름들 가운데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인 경우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라합의 이름 앞에 ‘기생’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사실 히브리서 11장을 연구해 보아도 그런 예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에녹은, 노아는, 아브라함은’이라고 했지 ‘믿음으로 족장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애굽의 총리 요셉은’ ‘믿음으로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등, 이렇게 표현한 데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라합에게만은 ‘기생’이라는 말을 그 이름 앞에 붙였습니다. 정말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자기의 몸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보잘것없고,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의 이름이 신앙의 위인들 사이에 당당히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거룩한 성경에 네 번씩이나 열거됩니다.(수2:1,마1:5,히11:31,약2:25)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론 하고 누구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직업의 귀천도 없지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신분의 귀천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한 대로 한 줌의 흙에 불과합니다. 아침에 내리는 이슬과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기생 라합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잘 살고, 바르게 산다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저희들이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을 내가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믿음은 귀중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여생(餘生)을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라합을 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깨닫는 것은 우리의 믿음은 행함을 수반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과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정탐꾼은 여리고성의 적입니다. 이들을 환영하고 숨겨준다는 것은 전시중이라면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 라합은 자기 집을 찾아온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해 주었고, 숨겨 주었습니다. 또 그들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왜 라합이 이런 일에 목숨을 걸었을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향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난공불락과 같은 견고한 여리고 성벽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벽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약2:25-26절에서 야고보는 “라합의 믿음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행함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살아 역사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순종과 실천과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초신자가 목사님 앞에서 세례 문답을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도님은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때에 초신자는 의외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확신 있게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죽더라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다.”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고백입니까? 그래서 목사님은 사실 좀 놀랐습니다. 어떻게 예수 믿은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저런 믿음을 가졌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또 물었습니다. “만일 공산당이 성도님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또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예, 저는 총에 맞아 죽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목사님은 감격을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성도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십일조 생활은 잘하고 계시겠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 뻥뻥 치던 그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아직은 십일조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에 강도가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돈 내놔. 있는 것 다 내놔.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어!!” 정말 죽일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돈은 다 가져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사실 비겁한 것 같아도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안 돼! 죽어도 못줘! 어떻게 번 돈인데.... 한 푼도 못가지고 가! 죽일 테면 죽여 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분명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는 사람이 물질이 아까워! 어떻게 살까를 두려워서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화려하게 보이지만 진실한가를 검증받아야 할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대선교회 성도들은 기생 라합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살아 역사하는 참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생 라합은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라합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기를 소원합니다.

3. 끝으로 순종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31절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시겠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음으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사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기에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고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합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말씀하신 그대로 라합의 믿음은 그 자신을 살렸습니다. 아울러 그의 가족들도 구원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영광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스러운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며, 영광스러움이 그 집에 있게 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살리는  것은 믿음입니다.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인하여 두 정탐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승리케 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이 영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모쪼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라합의 믿음이 우리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먼저 우리 자신이 살고, 우리의 가족이 살고, 우리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는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축복의 통로들이 되시고,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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