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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고전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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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성경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경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베드로후서 1장에 이르기를 “20)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성경인 근거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들의 깨달음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은 오류가 없고 완전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서, 우리의 구원과 성도다운 삶을 위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니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수십억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자는 예수를 주(主)시라 고백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그 같은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데, 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와 같은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신 것이 믿어지는데, 저들은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곧 “성령의 전적인 도우심이 없이는” 예수님이 주님이신 줄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는 걸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내린 곳은 빌립보라는 도시였는데, 어느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강변에 나갔다가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자주옷감 장사를 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저와 그 집안 식구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루디아는 말하기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우리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 하고 강권했습니다. 그리하여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은 여자들이 여럿이었으나 루디아만 믿은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니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려면 먼저 그 영이 거듭나야 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그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이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아무 것도 인식하지 못하듯이 영이 죽은 사람은 영적인 일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캄캄절벽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도 모르고, 인간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나 깨나 육신의 일에만 몰두할 뿐 자기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그 영이 죽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우상을 섬기는 데는 많은 관심을 나타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이라면 얼마나 열심을 내는지 모릅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듣지도 보지도 말도 못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 뿐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과 같은 천체를 신으로 숭배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입니다. 조상의 혼령을 숭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상숭배입니다.

무릇 신이 아닌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다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은 헛것이므로 그것을 섬기는 자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하고 소원을 비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니 어찌된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알게 해 주신 결과입니다. 거듭남은 영적 출생을 의미합니다.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곧 신생(新生)이 거듭남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에는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그의 보혈로써 내가 죄 사함 받았다는 말씀이 이전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거부감 없이 믿어집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 거듭남의 진리는 세상 지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묻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분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두 번째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영생의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씀한 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에는 역사에 대한 많은 기록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역사책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문학적인 표현이 많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이 성경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문학책은 아닙니다. 또한 성경에는 과학적인 내용도 적지 않게 나오지만, 과학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의 주제는 구원입니다. 성경의 주제를 요약해서 진술한 구절이 요한복음 3장 16절과 17절입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열쇠입니다.

세상에는 기독교를 공격할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교양인이라는 평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쨌든 성경을 읽었으므로 성경에 관해서 이런저런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더라도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희랍 신화와 같은 히브리 민족의 신화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른 데 원인이 있지 않고  저들이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기록해 놓은 것이라면 자기들의 머리로 성경을 이해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상고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에 보니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령한 젖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들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에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수적입니다.

감사할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심령에는 성령께서 임재 해 계십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9절에 보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고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 6:63).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곧 영생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주님의 말씀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는 자는 그로 인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고 하셨습니다.

듣는다 함은, 단지 말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다 함은, 그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믿는 단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믿음을 화합한다’ 또는 ‘말씀을 믿음과 결합시킨다’고 합니다(히 4:2). 예를 들면,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접촉되어야 전등에 불이 들어오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믿기만 하면 반드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믿는다면, 어찌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면, 어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진실한 믿음에는 실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믿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타력 종교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사람이 제 노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교를 자력 종교라고 합니다. 세속 영웅들과 성경에 나오는 영웅들을 비교해 보면 한 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중국 역사에 나오는 항우는 그 힘이 어찌나 세던지, 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힘은 산을 잡아 뽑을 만하고 그 기세는 세상을 덮어 누를 만하다고 해서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항우보다 더 힘이 센 장사가 나옵니다. 삼손이 그 사람입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쳐 죽였습니다. 젊은 사자를 만나 맨 손으로 찢어 죽였습니다. 또 성의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산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그 초인적인 힘은 본래 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 곧 성령께서 삼손에게 임하시니 그처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혼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대결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가 참 신이신지, 아니면 바알이 참 신인지를 가려내기 위해서, 각기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벌려놓고 소를 잡아 각을 떠서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각기 자기 신의 이름을 불러서 불로 응답하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했습니다. 아합 왕과 백성들이 보는 데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수를 믿고 덤볐으나 그들의 기도에는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자 즉시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살랐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 450인을 기손 시냇가로 끌고 가서 처형했습니다. 그리고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허리를 동이고 비가 억수로 퍼붓는 속을 아합 왕의 마차 앞에 서서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마차 보다 더 빠르게 힘차게 달렸습니다. 열왕기상 18장 46절에 보면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 같은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날 영적 전쟁에 나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돈으로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을까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신 대로, 오히려 우리가 돈 때문에 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권력일까요? 아무리 강한 권력도 세상의 임금인 마귀를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하고 지혜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마귀와 싸워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마귀보다 더 강한 이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 마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3장 16절에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26절 이하에 보니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만큼 영적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말로 믿음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다니 얼마나 마음 든든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켜나가는 단계를 뛰어넘어서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은 삼년 이상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으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붙잡혀 가시자 겁을 먹고 다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으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데도 가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며 숨어 지냈습니다. 한번 꺾인 용기와 열정을 회복한다는 것이 그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되어 제자들을 감람산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막중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아야 능력 있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성령 받는 것은 곧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은 제자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십니까? 먼저 믿은 우리는 멸망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복음을 전해 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예수 믿으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기력이 약해서 보검을 휘두를 힘이 없어서 패하고 만다면 얼마나 가련합니까?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 하신 말씀에 나오는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방불한 무기력한 신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 역시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되는 것 역시 영적으로 무능한 것이 원인입니다. 살리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한탄할 것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됩니다.

스룹바벨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나 백성들의 비협조로 진척이 없자 낙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큰 산과 같은 문제도 평지처럼 해결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요즘은 기술이 좋아서 조화를 생화보다 더 생화처럼 만듭니다. 그러나 조화가 아무리 아름답고 생화처럼 보일지라도 조화는 조화일 뿐입니다. 둘을 구별하는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생명입니다. 조화는 생명이 없으므로 생화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실상은 더 비참한 것입니다.

믿노라 하면서 세속을 좇아 살아가는 신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입니다(딤후 3:5). 그래서는 주님의 책망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한다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셔서 어떤 시험과 역경도 능히 이기고도 남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마다 그 심령에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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