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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잔에 넘치는 은혜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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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잔에 넘치는 은혜 :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下)

가난한 마음을 위하여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속담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서만큼 정확하게 적용되는 영역도 드물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허함을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가리려는 마음, 하나님과의 관계의 잘못에서 오는 불만족과 고통을 시인하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아니하려는 인간의 회피하는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회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주신 첫 말씀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이 대목은 소위 팔복의 말씀이 실려 있는 첫 번째 부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이 첫 번째 복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축복의 성격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모든 복들은 첫 번째 복 안에서 누리는 결과로서의 구체적인 복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그 자체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코 인간의 행함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신앙이 가져다 준 마음의 상태입니다.
‘가난한’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원래 ‘파산 선고받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집안이 몰락해서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고 거리에 쫓겨나게 되어 가난한 자가 된 그런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하시던 사업이 실패하여 부도가 나서 망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아버님은 행선지도 알 수 없는 곳으로 피신을 하시고 가산은 모두 빚쟁이들에게 넘겨지고 가족들은 길거리로 나서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겪은 것과 같은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그때에 누군가가 이렇게 오갈 데가 없게 된 가족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한다면, 그때의 식구들의 반응이 어떠하리라 생각됩니까? 당연히 감사하다는 말 외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설마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요. “아, 그렇습니까? 당신을 따라가면 넓은 방은 있나요? 욕실과 침대를 딸려 있는지 모르겠네요. 침대방이 아니면 잘 수 없는데···. 아침은 한정식인가요? 아니면 양식인가요?”

뜻밖의 호의(好意)에 대하여 거절하거나 마다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음, 호의가 주어졌을 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절대적인 의존의 상태, 이것을 ‘가난한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회복에는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회복이 있기 전에 먼저 심령이 가난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한 없이 낮아져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께로부터 오는 도우심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소망을 줄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가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거나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가난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게 되겠습니까? 소유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응시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소유를 통해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가난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마틴 루터(M. Luther)의 수도 생활의 체험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는 수도 생활에 있어서 남다른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맨 무릎으로 돌계단을 기어오르며 다리가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숙제는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굶었으며 때로는 물 한모금도, 빵 한 조각도 먹지 않은 채 3,4일 씩 동굴에서 금식하며 추위에 떨기도 하였다. 그렇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동안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다시 따뜻한 방에 누워 피곤을 풀면 죄와 욕심들이 영혼 깊은 곳에서 살아나기 시작했고, 나는 또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 같은 절망을 느꼈다.”

그러면 진정한 영적 회복을 위해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난한 자가 되어 영적 회복을 넘어 심령의 부흥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요?

가난함에 이르는 길

먼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인식(認識)’이라는 단어를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매우 궁핍하고 헐벗고 있으며, 자신의 삶의 모든 불행과 불만족의 원인이 바로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과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불만족스러운 삶,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목양 아래 있는 풍성함과 신령한 만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보며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릇된 만족입니다. 이것은 근거 없는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만족이 아닌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첩경입니다. 영적인 회복과 소생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에 기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은혜의 역사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는 심령의 가난함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령의 가난함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분명한 영적인 인식을 가질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혼의 빈 잔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인간은 모두 이런 빈 잔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 속에 깃들여 있는 이 빈 잔은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도 채워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식과 의와 거룩한 성품들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심령 속에 이렇듯 영원한 세계를 향한 갈망을 주셨고, 하나님 자신을 향한 목마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주셨지만, 인간의 죄악 된 성품과 악한 삶이 그들로 하여금 점점 더 그러한 갈망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가치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사실과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거받기도 합니다. 다만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할 때 느껴지는 절대자에 대한 감각과 영원에 대한 희미한 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거짓된 신들과 우상에 굴복하게 하고 운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데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자신의 영혼에 빈 잔이 있으며 삶의 모든 허무와 불만족이 여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깃든 다른 욕망의 잔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채우고 그 결핍으로부터 마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 잊어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기를 원하는 인간의 영혼의 빈 잔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을 보십시오.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진정한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세상이 부러우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면서도 때때로 세상의 자녀들을 부러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마치 매일 기적의 만나를 먹으며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는 때의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한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겪는 삶의 허무함과 향방 없는 몸부림으로 지친 그들의 내면의 세계를 주목해 보십시오. 목자 없이 살아가는 양떼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느끼게 됩니다.

양떼의 대열을 이탈하여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이리저리 헤매는 길 잃은 양들이 잠시는 자유롭게 보일런지 모르나 목자 아래 있을 때보다도 더 큰 구속과 속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것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받으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오히려 주님의 눈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이 세상의 백성들이 포로되고 눈멀고 눌린 자로 비쳤습니다(눅 4:15-19).

이렇게 극단적인 죄악과 범죄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과 땅에 있는 썩어질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을 추구함으로 삶의 만족을 얻어 보고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빈 잔에서 오는 허무함을 메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언제나 잠시 인간을 만족하게 할 뿐, 진정한 행복을 위한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가치들, 세상 학문이나 예술이나 문화나 이웃을 향한 진실어린 봉사나 세상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 넘치는 인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갈망, 이 모든 것들도 역시 세상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치 있다고 해도 결코 절대선(絶對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안전한 행복을 위한 궁극적인 대안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영적 회복의 출발점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자신의 영혼의 빈 잔에 채워지는 만족을 경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잔을 여전히 비워둔 채 쓸데없는 것들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회복과 치유의 출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고,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평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뜻을 다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고통 받고 있으나 회복으로부터 아직 먼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영적 회복을 위하여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정확한 인식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살아온 자신의 껍질뿐인 삶의 무가치함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는 언제나 더 크고 위대한 보상을 가져다줍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것은 나쁜 의미에서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위장(僞裝)의 천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참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감추려고 하는 위장의 몸부림이야말로 헛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가장하려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손으로 찬란한 빛을 가리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기도해야 마땅합니다. “주여 보옵소서. 나의 영혼의 빈 잔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만이 나의 만족이시옵나이다. 이제껏 저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오래 참으시는 자비하심을 나의 방종의 기회로 활용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내게 베풀어 주신 원수 앞에서의 이 식탁을 인하여 내 영혼이 만족을 얻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제게 베푸시는 말씀 식탁을 인하여 제 영혼이 배부르며 내게 부으신 성령의 은혜로 나의 심령이 만족을 얻사옵나이다. 하나님, 당신이야말로 나의 전부이옵나이다.” 이렇게 온 영혼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사람들을 일깨우고, 세상에 있는 것들로 영혼의 빈 잔에서 오는 고통을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 허무함을 보여주며 목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영혼 속에 타오르는 은혜의 불길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회복(回復)을 갈망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의 빈 잔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로는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로 채워 보려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시인에게도 바로 이런 빈 잔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게 되자 그는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이 언제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을 때였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고 기름으로 자신의 머리에 바르신 것을 생각했을 때였습니다. 어쩌면 이 일은 방금 일어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오래 전에 원수 앞에 수없이 식탁을 베푸시고 한 번 기름으로 부어 왕으로 세우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케 하셨던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는 그는 자신의 빈 잔이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채우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교회가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復興)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 중 이 말보다 적합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차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가득 찬 상태이다.”

진정한 부흥(Revival)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넘친 은혜와 소망의 잔으로 말미암아 교회에서 흘러나온 그 기쁨과 변혁의 물결이 온 세상을 뒤덮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 가장 불타오르는 열망(熱望)은, 그 백성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 자신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내며 땅 끝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명백히 볼 수 있으리만치 하나님과 교회와 구원받지 못한 세상을 위하여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열방(列邦)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 때문에 타오르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불꽃을 간직하게 된 사람, 그 존귀하신 하나님을 아는 은혜의 불을 만나는 사람들 가슴마다 붙여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언젠가 그 불이 온 땅을 사르리라고 믿으며 사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은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영적 회복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가 이런 열망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가난한 심령으로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기뻐 받으십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하여 흘러가는 세상과 변천하는 사상 속에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이렇게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熱望)이 너무나 간절하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대를 능가하는 은혜를 온 땅에 가득히 부어주시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참된 영적인 부흥(Revival)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유혹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 차게 하시는 것이야 말로 대치할 수 없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시 67:1-4). 고난 받을 때에 다윗의 기도는 그가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6-7).

환희, 희열, 기쁨

그런 의미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바로 환희(歡喜)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으며 자라가는 신앙생활은 단지 불만(不滿)이 사라진 삶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만족(滿足)을 넘어서 환희의 고백이, 단순한 감사를 뛰어 넘는 희열의 찬송이, 평범한 즐거움을 능가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기쁨과 희열에 넘치는 내면세계를 가지고, 소망이 없는 어두운 세상에 자신 속에 있는 소망(所望)에 관한 이유를 들려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바라고 추구한 그 이상의 영원한 가치에 대한 소망,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되찾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환희(歡喜), 이것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친숙해야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갔던 믿음의 사람들은 이런 환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를 지나며 눈물 골짜기를 더듬기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강당하기 위하여 애통하는 자로 이 세상을 살기도 하였으며, 슬픔을 머금은 나그네로 먼지 나는 황야 길을 걷는 것처럼 인생 여정을 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들에게는 슬픔을 능가하는 위로와 애통함을 능가하는 환희와 서러움을 초월하는 희락(喜樂)이 있었습니다. 환경은 그들을 울게 만들었고 그들 앞에 놓여진 거대한 사명들은 그들로 하여금 애통하며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영적인 삶 한가운데서 만나는 하나님은 그들만이 아는 놀라운 위로와 기쁨을 가득히 채워 주셨습니다. 그들은 고난에 넘치는 위로,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기쁨, 박해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그 위대한 기쁨의 원천이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별로 웃을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부어주신 그 놀라운 영적인 자선(慈善)들은 그들로 하여금 능히 불굴의 확신과 투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승리와 완성을 대망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반드시 역사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세상의 나라는 망해도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영히 서리라는 불붙는 확신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의 영적인 삶 안에서 희락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쁨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곧 기쁨의 비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신앙의 기쁨은 언제나 은밀한 세계 안에서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입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경험한 그들끼리는 서로 압니다. 슬픔 많은 이 세상을 노래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은밀한 내면의 기쁨과 아픔을 이기고 상처받은 자의 고통을 위하여 희생의 포도주를 붓는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진정한 희락이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압니다.

치유를 넘어선 회복

그러므로 영적인 회복은 단지 상한 감정의 치유가 아닙니다. 지난날의 상처에 대한 기억을 합리적으로 바꾸어 보는 정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영적인 회복은 실로 치유나 회복 이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영적인 회복은 지난날에 상처에 대한 치유를 넘어서서 그리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믿음 생활해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신앙의 회복을 초월하여, 이렇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희열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심령의 부흥입니다.

이렇듯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와 기쁨이 죄악 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거룩한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는 이미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의 선교의 지도와 복음화의 판도가 변화될 수 있은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방탕한 세상이 우리의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하였는지 기억한다면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휘장을 여시고 보좌에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에 당신의 보혈을 뿌려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지고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그런 사랑의 예수를 세상은 미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자신을 구하려 오신 생명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람들이 온 세상을 구하려 오신 그분의 몸값을 은 삽 십으로 계산하였으니 이것은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심을 못 박은 세상의 피 묻은 손과 악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토록 주님을 미워한 세상의 가슴에 안길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몸에 흐르는데 그토록 그분을 저주한 세상의 입에 입 맞출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밀어(蜜語)는 오직 우리의 주님께 한 번 바쳐진 것으로 족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우리의 것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세상과 혼인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우리들에게 감격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에 매인 바 된 특별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原動力)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특별한 영적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렇듯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 가운데 살아야할 특권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펼쳐진 이 엄청난 고통과 슬픔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무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어두운 세상을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합니다. 오직 그러한 힘이 하나님께로만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위대한 능력을 당신의 말씀의 숲속에서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숲속을 사모하십시오. 장엄한 성경 진리의 원시림 속에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경험하십시오.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으로 살아서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말씀의 숲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배우십시오. 거기서 잠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영혼은 새로운 체질의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인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넘치는 성령의 부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영적인 삶을 허락해 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절로 그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악한 욕망과 더불어 싸우고, 죄의 세력과 더불어 다투는 가운데 승리하게 하시는 당신 자신을 체험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신령한 원동력을 공급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환희가 찬 고백을 하기까지는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과 신앙의 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속에서 그는 날마다 그분과 자신의 관계를 붙들고 살아갈 새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그분 안에만 모든 부요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을 찾는 자들을 자신으로 가득 채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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