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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손익 분기점(지경을 넓히라) (창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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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과 가정 위에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새해 첫 달도 세 째 주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마치 새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를 한 발자국씩 찍는 기분으로 2007년도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느냐에 따라 1년 동안의 인생이 좌우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내딛는 하루하루, 순간 순간의 발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 아닙니까? 인생은 선택으로 만들어져 간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인생 가운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있기는 하죠. 예를 든다면, 부모, 가문, 혈통 등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된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지혜롭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잘 선택하면 승리와 축복의 인생이 되고, 잘못 선택하면 실패와 저주의 인생이 됩니다. 구 소련의 수상이었던 어떤 분의 딸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결국 소련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왜 생명을 맞바꿀 만큼 자유를 찾아 망명했는데 그 엄청난 대가로 얻은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공산주의 국가로 간 줄 아십니까? 소련에서는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되었는데 미국 생활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장 어려운 것이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사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선택이 이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선택에 관한 한 누구에게나 상처도 있고 추억도 있잖아요?. '아, 그때 내가 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오늘 내 삶이 아름답게 되었구나.'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때 내가 잘못 선택해서 내 삶이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하는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 또한 선택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처럼 선택한 대로 인생을 거두게 됩니다. 갈6:9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한 선택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했던 시절, 삶의 멍에를 같이 지고 인생의 길을 걸어갔던 사랑하는 친족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옮겨오면서부터입니다. 그들은 재물이 늘어나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유가 갈등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어려웠던 시절, 다정했던 형제들이 상당한 부를 축적하자 재산 문제로 형제들간에 갈등하는 예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결코 낯선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재산 때문에 형제가 칼부림을 하고 부모를 학대하고 심지어는 살해하는 일들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보지 않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의 가정에, 또 한번의 먹구름이 온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서로 다투는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을 때에 아브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8-9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너 좋은 대로 선택하라!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롯이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10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바라보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정말 사모하면서 의도를 가지고 바라본다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평야를 보았을 때 '저 땅만 가지면 나는 행복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곳은 요단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벧엘 땅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처럼, 애굽 땅처럼 가뭄이 와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물이 넉넉하게 많았습니다. 강좌우변에 위치한 요단평지는 온 땅에 물이 넉넉해서 푸른 초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먼저 선택하라는 제안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그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곳입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지진 심판을 받았던 땅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하고 매력 있는 도시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유혹이 롯에게만 있을까요? 우리가 주거지를 선택할 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어떤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집 값이 오를 만 하기 때문에, 또 학군이 좋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세상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크리스챤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무엇을 결정하든지 신앙생활의 가치, 복음전도의 가치, 비전의 가치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 롯의 바라봄은 소유욕에 빠진 탐욕이었습니다.

탐욕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은혜를 모릅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이기적이 되고 자기중심적이 되면서 자기의 결정을 관철시킵니다. 롯을 보십시오. 그는 아브라함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돈도 벌고 가족을 다스리는 법도 배웠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의 근원 되는 주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보아도 롯이 아브라함에게 감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삼촌이 먼저 선택을 권했을 지라도 체면상이라도 삼촌이 먼저 하라는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은 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것을 챙기는 모습을 보십시오.

보십시요. 롯은 소돔 성을 선택함으로 어떤 결과를 얻게 됩니까? 당시에 롯은 스스로 선택을 잘 했다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자기 앞에 성공적인 인생과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리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와 저주를 맛보게 됩니다. 창세기 14장 보니까, 소돔 성에 거주하는 동안 전쟁을 만납니다. 있던 재산 다 빼앗기고 포로 신세가 됩니다. 다행히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간 아브라함이 구해 주었지만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그때 경고를 받고 정신 차렸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소돔 땅에 눌러앉음으로 유황불 심판을 만났고, 겨우 몸만 구원받았지만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롯의 가족을 끄집어 낸 덕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 보면, 가족들이 몸만 달랑 빠져 나오는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두 딸과 롯이 겨우 살아남습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어느 날 그의 두 딸이 자신들의 후손을 걱정한 나머지, 아버지를 잔뜩 술 취하게 만들어 놓고, 관계를 갖는 부끄러운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 이스라엘과 대대로 원수가 된 이방 민족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지금도 이들의 후손들로 인해 세계의 평화가 깨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조카에게 선택권을 주고 양보할 때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이렇게 결정은 했지만, 아브라함이 만약 저와 같은 사람이라면 조금은 뒷맛이 씁쓸했을 것입니다.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아무리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좋은 것만 몽땅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당시 만해도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초지를 양보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몇 시간 아브라함을 묵상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도 숱한 세월을 방황한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뭐,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기지고 있던 그 소유에 대한 집착을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그것을 놓치 않았기에 오는 아픔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기 아까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세월을 허비한 사람, 자기 한 목숨 유지하기 위해 아내도 버릴 수 있었던 사람! 그가 어떻게 고난의 한 복판에서 얻은 그 많은 재물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직도 연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한가지 때문에 때로 희생할 수 있고, 때로 내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비전의 각을 세운 사람이 아닙니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의 믿음의 날개는 점점 강해졌습니다. 그는 가족과 다툼에서 헤어짐의 아픔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순간 순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 한가지, 인생의 광야 길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삶의 현장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툼은 잘 해결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피붙이 같은 가족을 떠내 보내는 이 쓸쓸함을 알 수 있나요. 아마 자기를 등지고 떠나는 롯의 모습이 한 동안 지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람이라고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자기를 흔쾌히 버리고 떠나는 롯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나를 떠나라고 얘기할 때에 한켠에서는 "삼촌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삼촌과 함께 하는 것을 나는 보았어요. 삼촌은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삼촌을 떠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매달리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훌쩍 조카 롯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함께 갖은 고생을 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자기 곁을 훌쩍 떠나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고독하겠습니까? 바로 이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자! 14-15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여기도 '바라보라 '란 단어가 나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동서남북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동쪽만 보던 눈으로 서쪽도 보고 남쪽 북쪽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10절 11절을 잘 살펴보면 롯은 동쪽만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동서남북을 함께 바라본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잖아요. 물론 자신의 현실을 잘 살피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보지 못한다면 큰 잘못이 아닙니까?

여기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 환경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온 세상에 행복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초라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를 바라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존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14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그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1년 후, 5년 후, 10년 후에가 아닌, 지금 처해진 환경에서 보라고 하십니다. 바라보되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바라보되 어느 곳이든지, 어느 분야이든,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지경을 넓히기 위해서 먼저 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보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한계 내에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발뒤꿈치를 들고라도 최대한 멀리 보아야 합니다. 점프를 해서라도 저 멀리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비전의 각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뜻 앞에 나의 삶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통찰력과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 언제나 먼 곳을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커지고 눈이 넓어지고 꿈이 커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세계, 들어보지 못한 세계, 꿈꾸지 못한 세계를 향하여 마음과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버려진 땅 밧모섬에서 그는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져 하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살 새로운 세계의 꿈을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생만 보던 눈이 영원한 하늘나라를 본 것입니다.

오늘 저녁부터 '부흥에 목말라하라'는 주제로 사경회를 열지만, 100년 전에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왔던 선교사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인생의 손익 분깃점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영적으로 황무한 이 땅에 와서 세상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미국의 부통령으로 지명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기도하는 가운데에 한반도를 보았습니다. 예수 없이 죽어 가는 한민족을 보았습니다. 그는 미련 없이 세상 명예를 내려놓고 고난 당하는 이 민족에 들어와 자신의 삶을 기꺼이 조선인을 위해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펜셀러 선교사는 전라도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황해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익사했습니다. 세상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유능한 의사요, 학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안전하고 평안한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마다하고 성경을 들고 전도하러 다니다가 물에 빠져 허망하게 죽었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제물포항에 들어왔던 언더우드 선교사를 보십시오. 당시 조선의 현실을 바라본 그는 그의 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 넓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 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조선 땅,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사람... 120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땅에,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를 세우고 YMCA를 조직하고, 연희전문학교를 세워 나가는 지경을 넓혔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에 증거라고 했습니다. 지난번에 안식년을 보내면서 L.A.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지역은 우리나라 사람이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L.A.는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서울에 10배가 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400km 500km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나무를 심고 도시를 건설합니다. 거미줄처럼 고속도로를 도시 가운데 건설하고 전 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함께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 가고 있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도시를 확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시야가 넓습니다. 안목이 넓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농촌마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자라 서울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니던 태영이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태영이는 한국 농촌 마을 가난이 싫어 농촌 부흥을 꿈꾸고 늘 덴마크 유학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새벽기도를 다니며 늘 「덴마크, 덴마크」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영어로 자신의 꿈을 썼습니다. 유학을 하고 싶다고 썼습니다. 그리고는 누구에게 이 편지를 보낼지 몰라 봉투에 「프레데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40일후 덴마크 국왕보좌관으로부터 그리고 덴마크 외무성으로부터 허가장과 왕복 비행기 티켓이 날아왔습니다. 그가 바로 덴마크 그리고 이스라엘 유학을 마치고 건국대학교 교수가 된 농촌 운동의 선구자 유태영 박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역시 인생의 손익 분깃점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깊이 고민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신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잃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소중히 여기던 것을 잃을 뿐 아니라 그 속에 담겨있던 미래와 삶을 대하는 철학, 희망을 한꺼번에 잃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잃어버림을 통해서 새 인생의 길을 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잃어버림은 고통과 불행 너머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18절에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세상적으로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서 단을 쌓는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 단을 쌓는다는 것은 "동행의 삶, 깨끗이 씻는 삶"을 말합니다. 한편 헤브론은 '교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마므레는 '부요'를 상징합니다. 비록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것을 잃는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선택을 한다면, 영적인 충만과 살아있는 교제가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 인생에게 베푸는 특별한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손익 분기점을 어떻게 다루시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약속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의 손익 분깃점의 자리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되렵니까? 아니면 롯이 되시렵니까? 둘 중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밤부터 우리는 영적으로 목마름을 가지고 부흥 사경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요나서를 붙잡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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