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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첨병 (수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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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가나안 정복을 위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두 가지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1) 양식을 예비하라 - 전혀 새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2) 적정을 파악하라-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과 같이
              전쟁에 있어서 적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경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해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리고 성 정복은 바로 발바닥 사건의 전형적인 모형입니다.
발바닥 사건의 첨병을 통한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를 통해
    우리들도 복음의 첨병으로 세움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점탐꾼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교훈이 무엇일까요?

1.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1절)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오라고 보냅니다.
오늘 여호수아로부터 명을 받은 두 정탐꾼은
    바로 발바닥 사건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첨병이라는 뜻을 빌1:12절에 복음의 진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은 <프로코페>로서 첨병이라는 말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글,
내가 미끄러지며 걷는 눈 내린 비탈길은 다른 사람에게 길이 된다는 말과 같이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는 항상 복음의 프로코페
    즉 발바닥 사건의 첨병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두 정탐꾼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교회는 에클레시아로서
    세상에서 부름 받아 하나님과 연합된 자들이라고 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부름 받았을 뿐 아니라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 아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부름 받은 교회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교인은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요17:8절 [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에 보낸 두 정탐꾼처럼 우리도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은 바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요, 사명을 감당해야할 현장입니다. 
5.16 혁명 후 신나게 암송했던 국민교육헌장 기억나십니까?      <2>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역사적 사명뿐만이 아니라
선교적 사명 즉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태어남을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합니까?
여리고 성이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리고 성만 하더라도
    1930년 고고학자 가스탕이 7년을 거쳐 발굴한 보고에 의하면
    성벽 위로 전차 두 대가 지나갈 만큼 두터운 성벽이
    4.5M 간격으로 두 겹으로 된 금성철벽 여리고 성입니다.
민14:에서 열 탐정꾼이 말했듯이 저들은 아낙 자손 대장부들이요
          우리는 그기에 비추어 보면 메뚜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저들은 우리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
문화적 명령이든, 선교적 명령이든 하나님의 명령은 가라는 것입니다.
발바닥 사건은 하나님의 가라는 명령에 의해서 이루지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아라, 그러나 현대 교회는 와서 제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 와서 은혜 받아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암6:1절에 보면
[ 화 있을찐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여 ]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안일에 빠져있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오직 했으면
농부 출신 아모스를 들어 책망을 하고 있겠습니까?

대구에 요한이라는 지체 부자유 청년이 있습니다.
혼자 교회를 돌아다니며 전도지를 들고
    시장이나 사람들 모이는 곳에 가서 전도지를 나눠주는데
말이 어둔하고 그러니 전도하는 모습이 덕스럽지를 못합니다. 
한번은 선배 목사님과 교인들이 심방을 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교인이 하는 말이 [ 저래가지고 전도하니 전도 문 막히지 ] 하니
그때 목사님이 하나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 멀쩡한 교회 목사 장로 권사들이 전도 안하니 병신이라도 해야지 ]

이제 두 탐정꾼이 여호수아의 명대로 여리고 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유숙을 합니다.

2.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교훈을 줍니까?(1-7절)

두 정탐꾼이 변장을 하고 들어갔겠지마는               
그러나 여리고 성 사람들이 저들을 보고 왕에게
    이스라엘 스파이가 성내에 잠입했다고 보고를 합니다.
그래서 왕이 사람을 보내어
    라합에게 네 집에 들어간 사람을 끌어내라고 할 때
라합이 두 정탐꾼을 옥상에 벌여 놓은 삼대 속에 숨기고는
    그 사람들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니
    빨리 따라 가보라고 합니다.
정탐꾼을 숨겨 준 기생 라합,
물론 정탐꾼들이 본래 기생 라합을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기생집은 누구나 쉽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일단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바로 여리고 성에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발바닥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그 땅을 밟으면
      꼭 이와 같이 예비 된 영혼을 부쳐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비 된 영혼을 부쳐 주십니다.

기생 라합이 두 정탐군을 숨겨준 사실을 
히11:31절 [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 라고 합니다.
이 믿음 때문에 안 망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기생 라합 팔자 고쳤습니다.  여자는 남자 잘 만나면 팔자 고친다면서요.   
글쎄요.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복음을 받아 드리면 팔자 고칠 줄 믿습니다.
기생 라합
발바닥 사건의 첨병 두 정탐꾼 만나지 못했다면
    여리고 성 무너질 때 함께 다 함께 멸망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수6:22절에
[ 성중에 있는 것은 다 멸하되 남녀노유와 우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라 ]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저주를 면치 못합니다.
수6:26절에 [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어버릴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다음 자식을 잃으리라 ]
이렇게 여리고 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땅입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이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을 만남으로 생애가 바뀌어 집니다. 
현대판으로 이야기하자면                             
기생 라합이 예수 믿고 변해도 얼마나 확실하게 변했으면
마1:5절에 유다 지파 족장 가문에 며느리가 되었겠습니까?
그것뿐 아니지요.                                 
유다 지파 족장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가문에 속했다는 말이고
그것도 족장 마나님이 되었다는 것은 부잣집 마나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 뿐아니지요.
히11:에 천상교회에 장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육 간에 복을 받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 되었습니다.
만약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만나지 못했다면
    룸살롱 해서 돈 벌어 부동산 투자해서 졸부가 되었다 해본들
    그 누가 기생 라합을 기억하는 사람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의 삶이 가능할가요?
라합의 이런 행위는
민족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 행위였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간첩을 숨겨주었고
    그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또 그들이 안전하게 도망가도록 도와줌으로써
    조국을 파멸시키는 이적행위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라합은 죄악이 관영한 가나안을 심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라합은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선이냐 악이냐,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분명하게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우리도 때로 하나님과 물질, 하나님과 권세, 하나님과 학문,
    하나님과 연인,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을 선택하게 되면
    내가 선택한 그것과 함께 결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로도 대치될 수 없는 분으로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경배하고 섬기고 복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라합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믿음의 여인으로 쓰임 받게 되고
이 땅에서도 부자집 마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결단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정탐꾼이 여리고성 기생 라합의 집에서 숨어 들어가서 놀라운 말을 듣습니다.

3. 라합이 정탐꾼에게 한 말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십니까?(8-14절)

왕의 군사들을 유인하여 돌려보낸 후 라합은 그 정탐꾼들 앞에서
    왜 자기가 이처럼 그들을 도와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밝힙니다.
라합은 그 첫마디에서
9절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 여호와 앞에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을 라합이 이미 확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라합이 놀랄 말을 합니다.
9절 [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
즉 여리고 사람들이 너희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금성철벽 여리고성 사람들이
    메뚜기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합니까?
윌리암 바클레이 같은 성경학자는
“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할 확률은 백만분의 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리하였습니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사막을 건너 온 유목민들이
      여리고 성을 정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라합의 하는 말이
[ 이 땅 백성들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소문이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소문을 내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미 멀리 출애굽 때부터 지근거리에 있는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이 당한 일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베푸신 두려운 일들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10-11절 보세요.
[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
[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
오늘 교회가 해야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소문나는 교회가 되면 세상이 두려워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날 때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권력과 부의 힘으로 군림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게 한다는 것 바로 성령충만을 말합니다.
성령충만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라합의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에 대한 소문이 펴졌을 때
    여리고 백성들은 절망하고 낙담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낙담이 되어 술을 더 많이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소문이었지만 라합에게는
    그가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소문이지만 이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되었고,
          이를 영접한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똑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라합은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았습니다.
[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고 했고,
[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

그럼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까?
4.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어떤 자를 통해 나타내십니까?(12-14절)
라합이 두 탐정꾼에게 청을 합니다.
12절 이하에
[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나의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모든 자를 살려주겠다고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 하니
탐정꾼이 하는 말이
[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라합과 그의 집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이라도 내어놓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 나라가 왕성해 지고
          복음이 왕성하게 일어날 때는
그 배후에는 반드시 생명을 각오한 헌신의 무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주변의 복음의 일군들 가운데
특히 빌2;25절 이하에 나오는 에바브로 디도는             
[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자 ]
  라고 합니다.
항상 하나님 나라가 흥왕할 때는 이와 같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충성된 일군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두 사람을 택해
        정탐꾼으로 보낼 때는 그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을 바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복음의 첨병으로 보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헌신된 일군들이 많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편이 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확신하여 정탐꾼들을 도와 준 라합은
이제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명 보장을 약속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여호와로 맹세하고
    진실한 표를 내라`고 그 정탐꾼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정탐들은 그런 요청에 대하여
`우리 생명을 걸고 당신과 당신 가족을 구원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을 반드시
`인자하고 진실하게 대우할 것이라`고 확약해 주었습니다.
  이 `인자와 진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를 강조할 때
      창세기 등에서 여러 번 쓰인 단어입니다.
구원에 대한 약속은 그것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 편에서는
    호리라도 잘못되어서는 아니 될,
    정말 1%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될 중대한 약속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중요한 언약을
    당신의 `인자와 진실`로써 확증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이 진실하듯이
    생명 바쳐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자를 통해
          생명의 역사를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라합에게는 그 구원 약속의 징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5. 두 정탐꾼과 기생 라합 사이에 한 창문의 붉은 줄의 약조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진리는 무엇입니까?(15-21절) 

18절 [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
그래서 라합이 붉은 줄을 창문에 매어 둡니다.
결과 수6:22절 이하에 나중에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 약속한 대로 
[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라] 고 합니다.
그처럼 온갖 정성과 힘을 다 써 주는 라합에게             
정탐꾼들이 약속해 준 `진실한 표`는
바로 자기 자신들을 성벽에 달아내려 줄 때 사용했던 `붉은 줄`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이 그 성벽을 타고 내려갈 때 사용된 `붉은 줄`이
      또한 라합에게도 자기 생명 구원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 `붉은 줄`을 매어 놓은 집 안에 있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될 것이지만     

만약 누구라도 그 집 밖으로 나가면 죽어도 가하다는,
  실로 엄중한 약속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물론 그 때까지 결코 이 사실을 누설하지 않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조건 또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라합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한번 하나님 경외하고 구원 약속 받았다고 해서
그 이후로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후의 삶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라합은 그 정탐꾼들을 보내자말자
당장 그 `붉은 줄`을 자기 집 창문에 매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사실 여리고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을 수 있고
추궁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이미 여호와 경외의 신앙으로
  다른 모든 두려움들을 떨쳐 버린 라합에게는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리고성 공략이 시작될 때
자기와 자기 가족은 반드시 그 `붉은 줄`이 창문에 매여 있는 집안에         
머무르고 있어야 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요 최대의 관건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창문에 매어둔 붉은 줄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붉은 줄은 마치 출애굽 시 진노의 천사가 지나가는           
문설주에 발라 놓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문에 매어 단 붉은 줄은
바로 라합과 그의 가족의 신앙의 고백이요 구원받는 징표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전할 복음의 내용은
        바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붉은 줄은 생명을 보장해 주는 징표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줍니다.
    십자가를 든든히 붙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구원의 인자하고도 진실한 표식인 십자가만을 붙들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라합이 언제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로 침공해 올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언제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지 그 날자는 알 수 없으니,
한시라도 그 십자가를 떠나지 않고 살아야 할 뿐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한갓 이방민족의 창녀에 불과했던 라합은
하루아침에 선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들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녀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위치로까지 높이 들리어지게 됩니다.
마1: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개종한 라합은 살몬과 결혼하게 되고
그녀에게서 태어난 보아스는 바로 다윗 왕의 조상이며
        멀리 예수님의 선조가 됩니다.
창녀가 졸지에 메시아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을 올려놓게 되었으니,
정말 인생이 바뀌어도 어떻게 이렇게 극적으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며,
어떻게 그렇게 천한 신분에서
    이토록 영광스러운 자리로 격상될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이 엄청난 기적적인 인생 도약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원의 언약을 붙드는 믿음,`
    그것 하나만 가지고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자신의 `팔자`를 탓하고           
그 `팔자를 고치기` 위하여 온갖 헛수고와 허탄한 짓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형편을 한탄하며 뭔가 하루아침에
자기인생이 극적으로 향상되기를 바라는 헛된 꿈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권을 사 놓고 그날 밤에 돼지꿈을 꾸려고 애를 쓰고,
남편이 국회의원이 되게 해 달라고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자기네 말마따나
    그런 `비참한 팔자`에서 평생토록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침몰하는 배에 끝까지 미련을 가지고 그 안에 남아 있으면
결국 같이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짜 인생 탈바꿈은 그런 유치한 것이 아닙니다.             
    죄악 세상 가운데 살던 인생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거하게 되는 것,     
지옥멸망이 임박한 장망성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어
          영원한 천국구원을 누리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놀랍고도 놀라운 인생 격상입니다.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신앙만이,
한번 붙잡은 구원의 기회를
그 언약의 징표를 붙들어 매고 끝까지 기다리는 신앙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크나큰 변화, 엄청난 도약을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 두 정탐꾼
바로 발바닥 사건의 첨병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실현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 세상을 향해 보내심을 받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전도 지향적인 교회, 전도 지향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변에 많은 기생 라합같이
      팔자가 바뀌어 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 담대해야 합니다,
    헌신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예비된 영혼을 붙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복음 받은 우리의 삶 - 라합같이 순종하는 삶을 통해
                    예수 가문의 장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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